지금은 조율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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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ㆍ2010-08-3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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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련의 위력으로 기독교는 반드시 박멸되고, x 집은 문닫고, x 먹(목사)은 산업현장에서 땀을 흘리게 되며, x 독들은 점점 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내년도(2011년도) 통계청에서 전국인구센서스를 하게 되는데, 내년도까지 기독교인구는 적어도 10-20% 이상 줄 것으로 저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10-20%는 곧 x 독교가 망해가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징조입니다. )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위 문구는 자신들의 혁혁한 공로로 우리 기독교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자랑하느라 신바람이 난 어느 반기련 인사가 그의 게시판에 올려놓은 황당한 발언 중에서 가장 mild한 문장을 카피해 온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란 긴 세월을 자랑하며 내려오지만, 정서는 유교 사상과 샤머니즘 사상이 뼛속 깊이 파고든, 그것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보시기에는 턱없이 미련하고 패역한 민족이었을 뿐이다. 샤머니즘에 물든 우리 조상은 삼라만상 모든 것을 신(神)으로 간주하여 거기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recognized)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때가 되어 정통신학에 입각한 개혁주의 보수신앙은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우리 땅에 소개했으며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먼저 받아들인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알지 못하여 망해가는 민족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은 굶주리고 헐벗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 헌신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들은 신앙의 보수를 부르짖었고, 새벽마다 울부짖는 눈물의 기도가 방방곡곡 울려 퍼졌으며 깨끗하고 청결한 삶을 몸소 실천실행함으로써 성령의 사람이 나가야 할 올바른 길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도 모든 기독교 역사가 지닌 공통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피 흘린 발자취’ 위에 건축이 된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분들의 눈물 어린 기도로 이제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새벽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 선교도 가장 열정적으로 하는 나라, 통계를 보면, 개신교인 숫자만 전체 국민의 21.6%(2009 년)가 되기까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나오고 있었다. 그뿐이랴, 비행기를 탄 채 밤하늘에서 잠시 내려다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십자가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좋은 현상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 이토록 훌륭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 현대 기독교인의 실상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그 찬란한 신앙의 업적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세상으로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덕스러운 향기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닮은 신실한 사람들’이란 명예로움을 향기처럼 흩날리던 멋진 공동체였으나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x 독교’라고 손가락질 받는 부끄러운 공동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또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많은 지각있는 성도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겠다. 이제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돌아 보며 문제를 파악하고 조율(調律)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이토록 혼란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심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지켜 나가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치중하는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조직신학 교수님이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도 같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는 2천 년이라는 긴 역사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성경을 기초로 다듬고 다듬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며,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의 무수한 논쟁을 거쳐나오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긍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검증을 받은 위대한 산물이요, 보배로운 유산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개인이 자신의 입맛대로 새로운 자가신학을 양산(量産)해 내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급히 조율(調律)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많지만 우선 몇 가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교는 정(靜)적이요, 기독교는 동(動)적이다.
1. 예수님께서는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 )
성경을 보면 세 초부터 세 말까지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 동(動)적인 하나님이시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일하셨다. 병자를 고치기도 하셨으며, 잃은 영혼을 찾아 헤매는 일을 하셨고, 각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전도의 일을 감당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지금까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일하시는 분, 동(動)적인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2.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요 8 : 29)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의 사역 시작은 파송(보내) 하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많은 무리 중, 70인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제일 먼저 주신 사명이 ‘각 동네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명하셨다. (눅 10 :1- )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지상명령)도 역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 28 :19)...!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희는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세상으로 가라.” 하는 말씀이다.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佛敎, Buddhism)에 대해 깊이 공부한 바 없어 확실히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잠시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불교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른 종파와 매한가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라고 보겠다.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니 그 나타나는 형태가 바로 고행이요, 신(神)의 경지를 자기 속에서 찾아야 하고 이루어 내어야 하니, 도를 닦으며, 참선 (參禪)도 하고, 좌선 (坐禪)도 하고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앉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리 성도는 참선(參禪)이나 좌선(坐禪)을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 도를 닦아야 하는, 정(靜)적인 불교(佛敎)의 불자(佛者)들이 아니라 그분(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역동(力動)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이런 윈리,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닫고 알기만 한다면 하루는 24시간 1년이면 365일을 가만히 앉아서 찬양과 기도만 하고 들어 앉아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그것이 신탁(神託, oracle)이건, 예언이건 간에, 처음부터 성경적 개념이 아니며, 이치에 맞지도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과연 성령의 사람이라면 ‘주께서 가라시면 세상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마 28 : 16 - 20)
구약 성경에 느헤미야도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삽을 들어 예루살렘 성곽을 세우는 일에 힘을 다했다. 느헤미야는 일하는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느3: 15-23 참조).
3.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 :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 역시 말씀이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디 선생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라고 말했다. 성령 충만은 자기의 신비적인 환상이나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개인이 직접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는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하며, 신비적 현상에 치중하여 꿈이나 환상을 더 따르려는 성도들을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안 된다.
4. 잘못된 회개(悔改) 관을 회개(悔改)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 "(슈-브)는 "회개하다" 시 7:12) "돌이켜 회개하다" (겔 18:30), 이며, 신약의 회개(悔改, repentance), 그리스 어로 Μετάνοια(메타노에아) ‘돌이키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런 뜻이다..
도적질 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치고 손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열심히 일하는 것, 아내를 버린 사람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다. 회개는 전인격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 ‘간음한 자도 주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라고 믿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으면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후에 취해야 할 자세를 지시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3 :11) 이 말씀을 모든 죄와 회개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서 앞부분만을 똑 떼서 남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하셨는데,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문장 안에서도 이렇게 자기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전적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죄가 되었건, 한 번 회개했으면, 용서함을 받고 그 용서함 받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성도(聖徒)가 죄를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 죄를 짓고 내일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이것은 회개가 아니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나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슬피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돌이킨다고 하는 고백이, 고백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짓 죄로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悔改)"라는 용어 표현은 오역을 합하여 불과 3번 언급되고 있지만 결코 "회개"의 요구가 경시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줄기차게 지적해 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행동 따로, 회개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먹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회개(悔改)관 때문인 것을 깨닫고 회개(悔改)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요즘은 정(靜)적이어야 할 불교는 세상으로 내려와 동(動)적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반대로 가장 역동(力動)적이어야 할 기독교는 정(靜)적이 되어야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비우고 깊이 기도에 착념하면 하나님의 심장까지 들락날락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 종교에서 도입한 ‘관상기도’의 현주소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는 12시간, 1년이면 365일을 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고 찬양만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생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 좋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지상명령은 “세상으로 나가라!”하는 것인데, 언제 세상으로 나가서 언제 전도할 수 있고,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 생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이렇게 되면,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성도이고, 그럴 수 있는 여건이 허락지 않는 성도나 목회자들은 매일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그들을 흠모하게 될 것이며, 그런 그들은 그렇지 못한 성도들보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듯, 영의 세계에서도 상하(上下), 우열(優劣)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動)적이어야 마땅할 기독교가 정(靜)적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며, 변질한 사례일 뿐이다. 모두 욕심을 따라 변질시킨 것이다. 우리는 돌이켜야 산다. 아직도 늦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어느 특정 구절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인 말씀 속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성령의 조명 하심을 구하고 날마다 나의 신앙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조율(調律)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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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통재라!
2010-09-17 14:00
173.xxx.169
'신앙의 조율'이란 개념, 참 적절합니다.'신앙의 반성'이라는 말은 좀 편협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했었는데꼭 맞는 옷처럼 적절한 용어를 소개하시는군요.
이럴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죠.
별똥별님의 칼럼은 항상 신선한 자극을 주셔서 좋구요 또한 믿음이 깊은 분들이 많아서 편안히 읽을 수 있어서 좋아요.특히 교제님이나 thomas님들과 같은 분들이 바른신앙을 위해 열심히 변증하는 모습이 좋습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위 문구는 자신들의 혁혁한 공로로 우리 기독교인 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자랑하느라 신바람이 난 어느 반기련 인사가 그의 게시판에 올려놓은 황당한 발언 중에서 가장 mild한 문장을 카피해 온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반만년이란 긴 세월을 자랑하며 내려오지만, 정서는 유교 사상과 샤머니즘 사상이 뼛속 깊이 파고든, 그것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보시기에는 턱없이 미련하고 패역한 민족이었을 뿐이다. 샤머니즘에 물든 우리 조상은 삼라만상 모든 것을 신(神)으로 간주하여 거기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recognized)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때가 되어 정통신학에 입각한 개혁주의 보수신앙은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주님을 우리 땅에 소개했으며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먼저 받아들인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알지 못하여 망해가는 민족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은 굶주리고 헐벗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 헌신을 아끼지 아니했다. 그들은 신앙의 보수를 부르짖었고, 새벽마다 울부짖는 눈물의 기도가 방방곡곡 울려 퍼졌으며 깨끗하고 청결한 삶을 몸소 실천실행함으로써 성령의 사람이 나가야 할 올바른 길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도 모든 기독교 역사가 지닌 공통적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피 흘린 발자취’ 위에 건축이 된 자랑스러운 역사다.
그분들의 눈물 어린 기도로 이제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새벽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 선교도 가장 열정적으로 하는 나라, 통계를 보면, 개신교인 숫자만 전체 국민의 21.6%(2009 년)가 되기까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나오고 있었다. 그뿐이랴, 비행기를 탄 채 밤하늘에서 잠시 내려다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십자가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좋은 현상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지…) 이토록 훌륭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 현대 기독교인의 실상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그 찬란한 신앙의 업적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세상으로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덕스러운 향기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리스도를 닮은 신실한 사람들’이란 명예로움을 향기처럼 흩날리던 멋진 공동체였으나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x 독교’라고 손가락질 받는 부끄러운 공동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또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많은 지각있는 성도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겠다. 이제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되돌아 보며 문제를 파악하고 조율(調律)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이토록 혼란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이유야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심된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지켜 나가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치중하는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조직신학 교수님이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도 같지만, 사실, 기독교 교리는 2천 년이라는 긴 역사의 과정을 지나오면서 성경을 기초로 다듬고 다듬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며, 정(正, right)과 반(反, wrong)의 무수한 논쟁을 거쳐나오면서 좀 더 많은 사람이 긍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검증을 받은 위대한 산물이요, 보배로운 유산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개인이 자신의 입맛대로 새로운 자가신학을 양산(量産)해 내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급히 조율(調律)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많지만 우선 몇 가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교는 정(靜)적이요, 기독교는 동(動)적이다.
1. 예수님께서는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 )
성경을 보면 세 초부터 세 말까지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 동(動)적인 하나님이시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일하셨다. 병자를 고치기도 하셨으며, 잃은 영혼을 찾아 헤매는 일을 하셨고, 각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전도의 일을 감당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지금까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일하고 계신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일하시는 분, 동(動)적인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2.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요 8 : 29)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의 사역 시작은 파송(보내) 하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많은 무리 중, 70인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제일 먼저 주신 사명이 ‘각 동네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명하셨다. (눅 10 :1- )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지상명령)도 역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 28 :19)...!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희는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세상으로 가라.” 하는 말씀이다.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필자는 불교(佛敎, Buddhism)에 대해 깊이 공부한 바 없어 확실히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잠시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불교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른 종파와 매한가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종교’라고 보겠다.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니 그 나타나는 형태가 바로 고행이요, 신(神)의 경지를 자기 속에서 찾아야 하고 이루어 내어야 하니, 도를 닦으며, 참선 (參禪)도 하고, 좌선 (坐禪)도 하고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앉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우리 성도는 참선(參禪)이나 좌선(坐禪)을 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가만히 앉아 도를 닦아야 하는, 정(靜)적인 불교(佛敎)의 불자(佛者)들이 아니라 그분(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역동(力動)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이런 윈리,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닫고 알기만 한다면 하루는 24시간 1년이면 365일을 가만히 앉아서 찬양과 기도만 하고 들어 앉아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그것이 신탁(神託, oracle)이건, 예언이건 간에, 처음부터 성경적 개념이 아니며, 이치에 맞지도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과연 성령의 사람이라면 ‘주께서 가라시면 세상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마 28 : 16 - 20)
구약 성경에 느헤미야도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삽을 들어 예루살렘 성곽을 세우는 일에 힘을 다했다. 느헤미야는 일하는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역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것을 알 수 있다. (느3: 15-23 참조).
3.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 :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 역시 말씀이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디 선생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라고 말했다. 성령 충만은 자기의 신비적인 환상이나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개인이 직접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는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하며, 신비적 현상에 치중하여 꿈이나 환상을 더 따르려는 성도들을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안 된다.
4. 잘못된 회개(悔改) 관을 회개(悔改)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 "(슈-브)는 "회개하다" 시 7:12) "돌이켜 회개하다" (겔 18:30), 이며, 신약의 회개(悔改, repentance), 그리스 어로 Μετάνοια(메타노에아) ‘돌이키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런 뜻이다..
도적질 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치고 손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열심히 일하는 것, 아내를 버린 사람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다. 회개는 전인격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 ‘간음한 자도 주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라고 믿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으면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후에 취해야 할 자세를 지시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3 :11) 이 말씀을 모든 죄와 회개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서 앞부분만을 똑 떼서 남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하셨는데,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문장 안에서도 이렇게 자기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전적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죄가 되었건, 한 번 회개했으면, 용서함을 받고 그 용서함 받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성도(聖徒)가 죄를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 죄를 짓고 내일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이것은 회개가 아니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나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슬피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돌이킨다고 하는 고백이, 고백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짓 죄로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悔改)"라는 용어 표현은 오역을 합하여 불과 3번 언급되고 있지만 결코 "회개"의 요구가 경시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줄기차게 지적해 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행동 따로, 회개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먹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회개(悔改)관 때문인 것을 깨닫고 회개(悔改)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요즘은 정(靜)적이어야 할 불교는 세상으로 내려와 동(動)적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반대로 가장 역동(力動)적이어야 할 기독교는 정(靜)적이 되어야 신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을 비우고 깊이 기도에 착념하면 하나님의 심장까지 들락날락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 종교에서 도입한 ‘관상기도’의 현주소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는 12시간, 1년이면 365일을 한 곳에 가만히 앉아서 기도하고 찬양만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생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 좋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명하신 지상명령은 “세상으로 나가라!”하는 것인데, 언제 세상으로 나가서 언제 전도할 수 있고,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 생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이렇게 되면, 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성도이고, 그럴 수 있는 여건이 허락지 않는 성도나 목회자들은 매일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그들을 흠모하게 될 것이며, 그런 그들은 그렇지 못한 성도들보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듯, 영의 세계에서도 상하(上下), 우열(優劣)을 조성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動)적이어야 마땅할 기독교가 정(靜)적으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요,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것이며, 변질한 사례일 뿐이다. 모두 욕심을 따라 변질시킨 것이다. 우리는 돌이켜야 산다. 아직도 늦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어느 특정 구절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인 말씀 속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성령의 조명 하심을 구하고 날마다 나의 신앙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다시 조율(調律)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멀어도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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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통재라!
2010-09-17 14:00
173.xxx.169
'신앙의 조율'이란 개념, 참 적절합니다.'신앙의 반성'이라는 말은 좀 편협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했었는데꼭 맞는 옷처럼 적절한 용어를 소개하시는군요.
이럴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죠.
별똥별님의 칼럼은 항상 신선한 자극을 주셔서 좋구요 또한 믿음이 깊은 분들이 많아서 편안히 읽을 수 있어서 좋아요.특히 교제님이나 thomas님들과 같은 분들이 바른신앙을 위해 열심히 변증하는 모습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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