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다"는 것과 "패거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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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ㆍ2011-11-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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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번씩 꼭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TV 동물농장"과 "나가수(나는 가수다)"이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이 주는 사실성을 통해 동물과 인간의 진면목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주에는 바비킴이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는데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투표를 했던 방청객들의 어떤 이유가 그동안 계속 상위권에 머물었고 나름대로 독특했던 바비킴의 편곡을 외면했던 것일까 ? 이런 생각으로 "만남"을 생각하다가 보니 인간관계로 까지 생각이 발전되고 "이것을 글로 한번 정리해 보고싶다"는 욕심이 나로하여금 컴터 자판을 잡아당겨 두들기게 만든다.
우리의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우리의 희노애락이 생성되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기도 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친하다"라는 단어로 정리하고 싶다.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에는 사실 "친하다"라는 단어의 위력이 굉장한 힘을 갖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한마디에 일국의 대통령이 될수도 있고 그말 그대로 남이면 동장이나 이장도 될수 없는 것이 한국인의 독특한 인간 관계이다.
" 내가 누구를 안다 "거나 "누구와 친하다"라는 한마디의 위력이 거액의 공사를 수주하거나 은행에서 거액의 금융지원을 받을수도 있고 하다못해 시장의 좌판에서도 콩나물 한웅큼이 더가거나 덜가기도 한다.
그런데 자주 만난다고 친한 것일까?
많은 대화를 오래 나누었다고 친한 것일까?
반면에 일년에 한번 만나도 , 어쩌다 이메일 , 전화 한 통화에도 변함없는 모습과 느낌이 드는 그런 인간 관계도 있으며 우리는 그럴때 진정 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정 친하다는 것은 나의 유익과 상관이 없는 그런 관계이며 이는 "신뢰와 사랑"이 우선이 되야 한다. 이런 관계에서 우리는 내가 정말 필요할때 기댈수 있고 속마음(나의 부끄러움)을 털어 놓을수 있게 된다. 신뢰와 사랑이 없으나 나의 유익을 위한 만남은 친한 것이 아니라 "패거리 문화"일 뿐이다.
이런 모습은 부끄럽게도 교회안에서도 볼수있다. 내가 누구와 만나고 싶거나 만나기 싫은 마음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행히도 소위"거듭났다"고 말은 하지만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뿐 나의 판단 기준은 아직 나의 유익에 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의 소치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은 그 범위가 클수록 그 영향력의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해진다. 같은 교회내 만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끼리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수 있으며 이런 관계가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을때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힘겨루기가 벌어진다.
xx 기도회니, xx 선교회니, xx 성경 연구회니, xx 기독 포럼이니 많은 목회자들의 모임이 애시당초의 귀하고 선한 목적이 변질되어 자파의 유익을 구하고 상대방과의 힘겨루기에 돌입하게 될때 패거리 문화일 뿐이며 자리다툼후의 논공행상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 사건의 현장에서 예수의 모습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을 수시로 보게 된다.
이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흘리던 때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저 천국에서 다시 보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그 상대의 심령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품고 살아가는 나의 형제 자매인데,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깨닫고 상대에게 겨누웠던 손가락의 끝을 내안으로 돌리자는 것이다.
교회의 강단에서만 말씀을 선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유익이 달려있고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그 현장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모든 사람이 이를 볼수있고 깨달아 무리가 함께 기뻐할수 있는 역사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바로 "TV 동물농장"과 "나가수(나는 가수다)"이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이 주는 사실성을 통해 동물과 인간의 진면목을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주에는 바비킴이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는데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투표를 했던 방청객들의 어떤 이유가 그동안 계속 상위권에 머물었고 나름대로 독특했던 바비킴의 편곡을 외면했던 것일까 ? 이런 생각으로 "만남"을 생각하다가 보니 인간관계로 까지 생각이 발전되고 "이것을 글로 한번 정리해 보고싶다"는 욕심이 나로하여금 컴터 자판을 잡아당겨 두들기게 만든다.
우리의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우리의 희노애락이 생성되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기도 한다.
그것을 한마디로 "친하다"라는 단어로 정리하고 싶다.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에는 사실 "친하다"라는 단어의 위력이 굉장한 힘을 갖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한마디에 일국의 대통령이 될수도 있고 그말 그대로 남이면 동장이나 이장도 될수 없는 것이 한국인의 독특한 인간 관계이다.
" 내가 누구를 안다 "거나 "누구와 친하다"라는 한마디의 위력이 거액의 공사를 수주하거나 은행에서 거액의 금융지원을 받을수도 있고 하다못해 시장의 좌판에서도 콩나물 한웅큼이 더가거나 덜가기도 한다.
그런데 자주 만난다고 친한 것일까?
많은 대화를 오래 나누었다고 친한 것일까?
반면에 일년에 한번 만나도 , 어쩌다 이메일 , 전화 한 통화에도 변함없는 모습과 느낌이 드는 그런 인간 관계도 있으며 우리는 그럴때 진정 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진정 친하다는 것은 나의 유익과 상관이 없는 그런 관계이며 이는 "신뢰와 사랑"이 우선이 되야 한다. 이런 관계에서 우리는 내가 정말 필요할때 기댈수 있고 속마음(나의 부끄러움)을 털어 놓을수 있게 된다. 신뢰와 사랑이 없으나 나의 유익을 위한 만남은 친한 것이 아니라 "패거리 문화"일 뿐이다.
이런 모습은 부끄럽게도 교회안에서도 볼수있다. 내가 누구와 만나고 싶거나 만나기 싫은 마음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행히도 소위"거듭났다"고 말은 하지만 아직도 그 언저리를 맴돌뿐 나의 판단 기준은 아직 나의 유익에 관한 계산에서 나온 행동의 소치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은 그 범위가 클수록 그 영향력의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해진다. 같은 교회내 만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끼리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에서도 같은 현상을 볼수 있으며 이런 관계가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을때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힘겨루기가 벌어진다.
xx 기도회니, xx 선교회니, xx 성경 연구회니, xx 기독 포럼이니 많은 목회자들의 모임이 애시당초의 귀하고 선한 목적이 변질되어 자파의 유익을 구하고 상대방과의 힘겨루기에 돌입하게 될때 패거리 문화일 뿐이며 자리다툼후의 논공행상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 사건의 현장에서 예수의 모습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을 수시로 보게 된다.
이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흘리던 때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저 천국에서 다시 보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그 상대의 심령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품고 살아가는 나의 형제 자매인데,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깨닫고 상대에게 겨누웠던 손가락의 끝을 내안으로 돌리자는 것이다.
교회의 강단에서만 말씀을 선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유익이 달려있고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그 현장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모든 사람이 이를 볼수있고 깨달아 무리가 함께 기뻐할수 있는 역사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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