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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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조ㆍ2017-01-1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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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7
아멘넷에 올려진 행사 안내 광고중 ‘목양장로사역 컨퍼런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장로의 본질은 목사와 같이 목양입니다.” 라는 문구가 필자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래서 등록했으며 5월 3, 4일 양일간 교육에 참가하여 느낌 점들을 이곳에 올리고 싶다.
먼저 장소를 제공한 순복음교회의 교육 장소에 대한 준비와 특히 여교우님들의 정성어린,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접대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컨퍼런스 내내 매 강의마다 은퇴 후 칠순의 목회자 답지않게 열정과 기쁨과 사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감동어린 모습의 최홍준 목사님, 장로직의 본질 회복에 대하여 교회사적인 배경으로 탄탄한 강의를 이끌어 가시며 특히 눈동자와 목소리가 인상적인 고현권 목사님, 소속 교회인 순복음교회의 4-14 윈도우를 적용하여 다음 세대를 향한 목양사역의 중요성을 굵은 목소리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강조하신 허연행 목사님, 아날로그 세대와 Digital Imigrant 세대, 그리고 Digital Native 세대로 나누어 가장 충격적인 숙제를 던져주신 팻머스 선량욱 대표님, 이번 컨퍼런스의 궂은 일을 도맡아하며 목양장로 사역의 실제 사례들을 인용하여 구체적 청사진을 보여주신 김명섭 목사님등 수준 높고 탄탄한 강의 내용으로 금번 컨퍼런스의 모든 진행이 마음에 흡족했다.
목양장로란 무엇인가 ?
(행 20;28), (딤전 5;17 ), (벧전 5;2-3) 등의 관련 성구에 의하면 성경이 보여주는 장로의 직무로서 “다스림(ruling)""이란 장로가 권세를 가지고 성도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 도리어 성도들을 감독하고, 보호하고, 돌보아서 그들이 영적으로 잘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경은 장로직의 본질이 목양(shepherding) 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의 코넬리스 교수는 목양사역의 핵심이 ‘심방’ 이며 초대교회 장로들은 사도들의 본을 따라 가정을 방문하여 성도들을 살폈고, 이것이 교회가 권징을 행하는데 기본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장로와 목사가 분리된 초대교회사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아직까지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지 못했기에 감독, 목사, 장로라는 직분이 별 구분 없이 사용되다가 주후 96년경의 <클레멘트 1서>에서부터 지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인 장로들 가운데서 뽑힌 장로를 ‘감독’으로 불렀으며 이후 조직적인 면모가 나타나며 감독-장로-집사의 삼중직으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이그나티우스 감독(주후35-주후107) 시기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이단들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목사가 진리를 선포하고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기 때문에 그 권위가 여타 장로들에 비해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목사와 장로의 직분은 본질상 동등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였으며, 장로들은 감독들과 협의체(collegium)를 구성하여 치리와 목양에 힘썼다.
그러나 4세기를 지나면서 밀라노 감독, 암브라우스(340-397)의 주장에 의하면 이전의 전통이 약화되며 장로가 목사와 더불어 공회에서 교회의 치리를 집행하고, 성도의 도덕 교정을 시행하였던 관습이 폐지되었으며 그 이유로는 감독(목사)들이 장로들과 교회를 다스리는 권세를 나누어 가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후 중세교회(카톨릭)에서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계층적 성직자 체계가 확립되면서 평신도 장로직을 폐지시켰고 장로들의 목양사역을 대신한 것이 ‘고해성사’라고 코넬리스 교수는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는 칼빈 이전에 여러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연구를 통하여 장로직의 성경적 근거와 그 사역의 성격을 재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천명하였으며 이후 보헤미아 형제단등과 마틴 루터의 영향으러 칼빈 역시 1541년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에 이르른다.
“그들(장로들)의 직무는 모든 이들의 삶을 감독하고, 그들이 보기에 그릇 행하거나 무질서한 삶을 산다고 여겨지는 자들에 대해 친근하게 권면하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그들 자신이 직접 혹은 다른 이(장로)들과 함께 형제애에 근거한 교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간략한 장로 변천사에 의하면 중세시대 동안 폐지되었던 장로직을 회복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장로직분의 본질이 양무리를 돌보는 목양(牧羊)에 있다는 것과 그 섬김을 통하여 성도들을 온전케 세우는 사역이라는 것을 재 발견했는 것이다.
필자의 이전 글에서 서술한바와 같이 현재 교회의 교인수가 감소하며 헌금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원인에 대한 책임론으로 인한 리더쉽의 문제와 급작스럽게 소천한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의 고 정인수 목사와 같이 중대형 교회의 산적한 목회와 선교지의 사역으로 over loading 되어 burn out 된 안타까운 교계 현실에 대한 돌파구는 과연 무엇일까 ?
그것은 장로의 직무 및 당회의 사역 초점이 행정에서 목양으로, 군림에서 섬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목양장로 사역이야말로 현시대의 가장 중차대한 사역이라는 것을 전심으로 강조하고 싶다.
이제 마지막으로 필자의 경험을 통하여 지교회의 목사와 장로가 긴장 관계에 이르렀을 상황에 대해 장로들에 관한 조언을 하고 싶다.
첫째, 교역자 직분은 주님이 주셨다. (엡 4;11-12)
교직은 엄연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허락하신 직분이다. (옥한흠 목사)
목사와 다른 신자 사이에 어떤 차이 특히 신분상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으로 목사의 직분은 다른 것과 확실히 구별된 직분이다.(루터)
필자는 출석하던 교회에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담임 목사와의 긴장관계가 조성됐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조용히 교회를 떠났다.
장로 임직 후 여지껏 단 한번 , 그것도 돌아가신 선친의 장례식을 도외시하고 아내를 모함한 김의승씨에게 의분으로 집으로 찾아가 시비를 가른 적은 있었으나 그것도 필자 개인에 관한 직접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러면 담임 목사가 교회법이나 사회법으로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
둘째,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창 50;19)
긴장 관계가 조성될 경우 필자는 상기에 언급하였거니와 언제나 교회를 조용히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겼다. 교회에 남아 분쟁을 조성하는 것은 장로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
벌써 5 년 전 소천하신 필자의 선친은 평생을 장로로 교회를 섬기셨다. 한국에서 이민 오기전 마지막으로 섬기던 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교회 공금을 횡령하였고 교인 다수에게서 돈을 빌렸다가 안 갚은 것들이 선친에게 들통이 났다.
자신의 불법을 감추기 위해 담임 목사는 교회 여권사, 집사를 동원하여 기도하던 선친을 강대상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비롯하여 여러 방법으로 괴롭혔다. 그래도 아무 저항 없이 선친께서는 괴로움을 감당하셨고 급기야 노회가 나서서 담임 목사의 불법을 밝혀내고 면직시켰으며 이후 자기를 따르는 여교인들과 근처에서 교회를 개척한 이 목사 부부는 같은 해에 이스라엘을 방문중 렌트하여 손수 운전하던 차가 예루살렘 근처의 골짜기에서 추락하여 부부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선친께서는 필자에게 몇 번이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까지 인간적인 판단으로 나서지 마라”고 하시면서 교회 문제는 판단하기가 어려우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고 충고하셨다.
이후 필자는 이유가 어떻든지간에 담임 목사와 긴장 관계가 조성될 시에는 즉시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조용히 옮겨가게 되었다.
또한 6 년 전 장로 임직후 담임 목사가 본인의 잘못을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사과하였음에도 당회에서 불법으로 필자를 근신시킨 김의승씨에 대해서도 당시 교회를 조용히 떠났으며 작년도에 언론을 통하여 10년간 여교인과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교단 제명과 목사 면직된 김의승씨의 사건을 접하면서도 필자는 같은 생각을 깨달았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리이까 ?”
말세지말을 맞이하여 사탄은 여러 모양으로 교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여러 사건으로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많은 교회에서 제자훈련은 이미 정착이 되었으나 그것으로 머물게되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게된다. 제자 훈련으로 성숙한 장로들을 사역으로 동력화시키고, 이들이 행복하게 교회를 섬기는 목양장로 사역을 통해 장로들은 교회의 걸림돌에서 디딤돌로 반드시 바뀌게 된다.
간절히 바라기는 목양장로 사역이 모든 교회에서 시행되어 교회도 행복하고, 장로와 목사도 행복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며 그럼으로 교회가 더욱 굳건히 서서 이 영적 겨울을 감당하고 다시금 한국 교회의 부흥이 이룩되기를 기원한다.
아멘넷에 올려진 행사 안내 광고중 ‘목양장로사역 컨퍼런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장로의 본질은 목사와 같이 목양입니다.” 라는 문구가 필자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래서 등록했으며 5월 3, 4일 양일간 교육에 참가하여 느낌 점들을 이곳에 올리고 싶다.
먼저 장소를 제공한 순복음교회의 교육 장소에 대한 준비와 특히 여교우님들의 정성어린,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접대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컨퍼런스 내내 매 강의마다 은퇴 후 칠순의 목회자 답지않게 열정과 기쁨과 사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감동어린 모습의 최홍준 목사님, 장로직의 본질 회복에 대하여 교회사적인 배경으로 탄탄한 강의를 이끌어 가시며 특히 눈동자와 목소리가 인상적인 고현권 목사님, 소속 교회인 순복음교회의 4-14 윈도우를 적용하여 다음 세대를 향한 목양사역의 중요성을 굵은 목소리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강조하신 허연행 목사님, 아날로그 세대와 Digital Imigrant 세대, 그리고 Digital Native 세대로 나누어 가장 충격적인 숙제를 던져주신 팻머스 선량욱 대표님, 이번 컨퍼런스의 궂은 일을 도맡아하며 목양장로 사역의 실제 사례들을 인용하여 구체적 청사진을 보여주신 김명섭 목사님등 수준 높고 탄탄한 강의 내용으로 금번 컨퍼런스의 모든 진행이 마음에 흡족했다.
목양장로란 무엇인가 ?
(행 20;28), (딤전 5;17 ), (벧전 5;2-3) 등의 관련 성구에 의하면 성경이 보여주는 장로의 직무로서 “다스림(ruling)""이란 장로가 권세를 가지고 성도들을 지배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 도리어 성도들을 감독하고, 보호하고, 돌보아서 그들이 영적으로 잘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경은 장로직의 본질이 목양(shepherding) 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의 코넬리스 교수는 목양사역의 핵심이 ‘심방’ 이며 초대교회 장로들은 사도들의 본을 따라 가정을 방문하여 성도들을 살폈고, 이것이 교회가 권징을 행하는데 기본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장로와 목사가 분리된 초대교회사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아직까지 조직적인 면모를 갖추지 못했기에 감독, 목사, 장로라는 직분이 별 구분 없이 사용되다가 주후 96년경의 <클레멘트 1서>에서부터 지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인 장로들 가운데서 뽑힌 장로를 ‘감독’으로 불렀으며 이후 조직적인 면모가 나타나며 감독-장로-집사의 삼중직으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이그나티우스 감독(주후35-주후107) 시기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이단들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목사가 진리를 선포하고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기 때문에 그 권위가 여타 장로들에 비해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목사와 장로의 직분은 본질상 동등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였으며, 장로들은 감독들과 협의체(collegium)를 구성하여 치리와 목양에 힘썼다.
그러나 4세기를 지나면서 밀라노 감독, 암브라우스(340-397)의 주장에 의하면 이전의 전통이 약화되며 장로가 목사와 더불어 공회에서 교회의 치리를 집행하고, 성도의 도덕 교정을 시행하였던 관습이 폐지되었으며 그 이유로는 감독(목사)들이 장로들과 교회를 다스리는 권세를 나누어 가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후 중세교회(카톨릭)에서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계층적 성직자 체계가 확립되면서 평신도 장로직을 폐지시켰고 장로들의 목양사역을 대신한 것이 ‘고해성사’라고 코넬리스 교수는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는 칼빈 이전에 여러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연구를 통하여 장로직의 성경적 근거와 그 사역의 성격을 재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천명하였으며 이후 보헤미아 형제단등과 마틴 루터의 영향으러 칼빈 역시 1541년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에 이르른다.
“그들(장로들)의 직무는 모든 이들의 삶을 감독하고, 그들이 보기에 그릇 행하거나 무질서한 삶을 산다고 여겨지는 자들에 대해 친근하게 권면하며,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그들 자신이 직접 혹은 다른 이(장로)들과 함께 형제애에 근거한 교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간략한 장로 변천사에 의하면 중세시대 동안 폐지되었던 장로직을 회복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장로직분의 본질이 양무리를 돌보는 목양(牧羊)에 있다는 것과 그 섬김을 통하여 성도들을 온전케 세우는 사역이라는 것을 재 발견했는 것이다.
필자의 이전 글에서 서술한바와 같이 현재 교회의 교인수가 감소하며 헌금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원인에 대한 책임론으로 인한 리더쉽의 문제와 급작스럽게 소천한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의 고 정인수 목사와 같이 중대형 교회의 산적한 목회와 선교지의 사역으로 over loading 되어 burn out 된 안타까운 교계 현실에 대한 돌파구는 과연 무엇일까 ?
그것은 장로의 직무 및 당회의 사역 초점이 행정에서 목양으로, 군림에서 섬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목양장로 사역이야말로 현시대의 가장 중차대한 사역이라는 것을 전심으로 강조하고 싶다.
이제 마지막으로 필자의 경험을 통하여 지교회의 목사와 장로가 긴장 관계에 이르렀을 상황에 대해 장로들에 관한 조언을 하고 싶다.
첫째, 교역자 직분은 주님이 주셨다. (엡 4;11-12)
교직은 엄연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허락하신 직분이다. (옥한흠 목사)
목사와 다른 신자 사이에 어떤 차이 특히 신분상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으로 목사의 직분은 다른 것과 확실히 구별된 직분이다.(루터)
필자는 출석하던 교회에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담임 목사와의 긴장관계가 조성됐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조용히 교회를 떠났다.
장로 임직 후 여지껏 단 한번 , 그것도 돌아가신 선친의 장례식을 도외시하고 아내를 모함한 김의승씨에게 의분으로 집으로 찾아가 시비를 가른 적은 있었으나 그것도 필자 개인에 관한 직접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러면 담임 목사가 교회법이나 사회법으로 불법을 자행하는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
둘째,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창 50;19)
긴장 관계가 조성될 경우 필자는 상기에 언급하였거니와 언제나 교회를 조용히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겼다. 교회에 남아 분쟁을 조성하는 것은 장로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
벌써 5 년 전 소천하신 필자의 선친은 평생을 장로로 교회를 섬기셨다. 한국에서 이민 오기전 마지막으로 섬기던 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교회 공금을 횡령하였고 교인 다수에게서 돈을 빌렸다가 안 갚은 것들이 선친에게 들통이 났다.
자신의 불법을 감추기 위해 담임 목사는 교회 여권사, 집사를 동원하여 기도하던 선친을 강대상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비롯하여 여러 방법으로 괴롭혔다. 그래도 아무 저항 없이 선친께서는 괴로움을 감당하셨고 급기야 노회가 나서서 담임 목사의 불법을 밝혀내고 면직시켰으며 이후 자기를 따르는 여교인들과 근처에서 교회를 개척한 이 목사 부부는 같은 해에 이스라엘을 방문중 렌트하여 손수 운전하던 차가 예루살렘 근처의 골짜기에서 추락하여 부부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선친께서는 필자에게 몇 번이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까지 인간적인 판단으로 나서지 마라”고 하시면서 교회 문제는 판단하기가 어려우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고 충고하셨다.
이후 필자는 이유가 어떻든지간에 담임 목사와 긴장 관계가 조성될 시에는 즉시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조용히 옮겨가게 되었다.
또한 6 년 전 장로 임직후 담임 목사가 본인의 잘못을 개인적으로 필자에게 사과하였음에도 당회에서 불법으로 필자를 근신시킨 김의승씨에 대해서도 당시 교회를 조용히 떠났으며 작년도에 언론을 통하여 10년간 여교인과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교단 제명과 목사 면직된 김의승씨의 사건을 접하면서도 필자는 같은 생각을 깨달았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리이까 ?”
말세지말을 맞이하여 사탄은 여러 모양으로 교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한 여러 사건으로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많은 교회에서 제자훈련은 이미 정착이 되었으나 그것으로 머물게되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게된다. 제자 훈련으로 성숙한 장로들을 사역으로 동력화시키고, 이들이 행복하게 교회를 섬기는 목양장로 사역을 통해 장로들은 교회의 걸림돌에서 디딤돌로 반드시 바뀌게 된다.
간절히 바라기는 목양장로 사역이 모든 교회에서 시행되어 교회도 행복하고, 장로와 목사도 행복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며 그럼으로 교회가 더욱 굳건히 서서 이 영적 겨울을 감당하고 다시금 한국 교회의 부흥이 이룩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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