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부재에 우는 선지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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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6-11-0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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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의 잘못을 쉽게 비판하고 욕하지만 내가 비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쏟으시는 관심과 배려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판이란 대부분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인간 사회는 거의 논리와 과학과 사실의 토대에서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논리와 과학과 사실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설득력을 지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집단 안에서의 인간관계와 조직과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논리와 과학과 사실만으로 다 파악하고 설명하고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논리와 과학과 사실은 존중되어야 하되 그런 것만의 토대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설명하고 비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민주주의는 아직까지 그것을 대체할만한 좋은 것이 없을 만큼 장점이 많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좋은 것이 그렇듯이 지금의 정치나 교회 현실에서는 민주주의의 어떤 장점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적으로 기울어 공공의 영역에 엄청난 해를 끼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부족한 점은 사회주의의 장점으로 보완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용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초월적 권위를 갖지만 역사와 인문학적 이해가 없으면 그 깊이와 넓이와 풍성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만물은 서로 유기적 관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에 복종합니다.
어떤 이념과 제도와 사물에까지도 중요성의 우선순위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 자체보다도 그것을 운용하는 태도와 목적과 방법에 따라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이익에 기여도가 달라집니다. 제도와 법과 사실과 규범만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와 개인과 공공의 유익을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념이나 제도의 운용과 과학적 비판이 반드시 토대로 삼아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만물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이념이나 제도나 학문이라도 사랑의 토대에서만이 하나님 나라와 인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지도자나 국민이나 또한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이나 건전한 비판자나 그 누구라도 그들이 가진 책임의 영역에서 자신의 역할을 사랑의 동기와 목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바른 역사 인식에서 현실을 통찰하면서도 사랑의 동기와 목적에서 지도자와 백성을 비판하며 울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단순한 감성적 눈물이 아닙니다. 그의 예리하고 신랄한 비판은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탁월한 안목과 비판은 하나님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불의에 대항할 담력을 갖게 되고 또한 사랑도 갖게 됩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조국 유대의 운명은 하나님 부재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한 의사처럼 조국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 부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울었습니다. 그가 내린 유일한 처방은 하나님을 찾는 것인데 유대 백성들은 그들 중에 하나님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정확한 진단에 따른 유일한 처방을 내렸는데도 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울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 부재를 슬퍼하는 영적 감성이 풍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만남의 증거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값싼 동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값싼 동정심은 서로를 더욱 비참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차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창한 것만 내 세우고 주장하여 명분만 세우지 말고 사소하고 가능한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과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기여하지 못해도 아내를 불쌍히 여기고 남편을 불쌍히 여기고 가족과 친척과 이웃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영적 통찰과 감성이 필요합니다. 지도자를 신뢰하고 약한 자를 돕고 실수하고 실패한 이들을 격려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 부재의 원인과 그 심각성을 발견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또한 우상에게 속지 말고 거짓 위로에 속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의 운명을 생각하시면서 우셨던 것처럼 예레미야는 울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의 울음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부재의 상황임을 통찰하고 그 심각성에 당황해 하고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 영적 통찰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건강한 태도입니다. 유대 주민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며 왕으로서 통치하지 않는다고 신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유대 주민들의 주장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비시켰습니다. 당시 유대는 주변의 열강들에게 심한 압력을 받았습니다. 유대 주민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면 유대가 바벨론이나 애굽에게 이렇게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을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재로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그들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겼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하나님 보다 애굽을 믿었습니다.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들의 욕심에 집착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 부재의 상황입니다. 하나님 부재의 상황은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보다 사적인 것에 집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사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삶이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이, 불치의 병에 결린 사람에게는 건강이 절대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대 규모의 지진이나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당하게 되는 형편에서는 불행의 요인을 물리적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불행을 당한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돈, 건강, 물리적 안전 등은 우리 삶의 절대적 토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해결되면 행복할 것 같아도 그런 것이 채워져도 역시 인간은 불안하고 불행합니다. 나는 돈이나 건강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거나 돈과 건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 영적 깨달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상대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돈과 건강이 확보되지 않으면 삶이 힘들기 때문에 돈도 벌고 건강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것을 위해 노력한다고 아무도 나무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결국 대충 살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절대적 토대와 삶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 부재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토대는 돈도 건강도 인간관계도 사회정의도 사회보장도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신앙생활을 대충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부재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우리가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 부재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에게도 하나님 부재의 삶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사회에서는 하나님 부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유대 주민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다른 나라에서 우상을 들여와서 섬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상 섬기는 지름길입니다.
요즘 이단이나 사이비에 대한 대 교단들의 입장의 우유부단한 번복과 교단 총회에서 총기위협과 투신 소동이나 지도자들의 부정행위 같은 사건들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종교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점점 성경의 바른 교훈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결국 하나님 부재의 심각한 영적 질병이 된 것입니다. 지금처럼 혼란하고 혼탁한 때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엇에 분개하고 무엇을 안타까워 하는지 예레미야의 눈물을 생각하고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이 어떻게 만들어 지고 흐르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 렘 8:18-22 -
그러나 모든 좋은 것이 그렇듯이 지금의 정치나 교회 현실에서는 민주주의의 어떤 장점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적으로 기울어 공공의 영역에 엄청난 해를 끼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부족한 점은 사회주의의 장점으로 보완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용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초월적 권위를 갖지만 역사와 인문학적 이해가 없으면 그 깊이와 넓이와 풍성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만물은 서로 유기적 관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에 복종합니다.
어떤 이념과 제도와 사물에까지도 중요성의 우선순위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 자체보다도 그것을 운용하는 태도와 목적과 방법에 따라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이익에 기여도가 달라집니다. 제도와 법과 사실과 규범만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와 개인과 공공의 유익을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념이나 제도의 운용과 과학적 비판이 반드시 토대로 삼아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만물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이념이나 제도나 학문이라도 사랑의 토대에서만이 하나님 나라와 인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지도자나 국민이나 또한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이나 건전한 비판자나 그 누구라도 그들이 가진 책임의 영역에서 자신의 역할을 사랑의 동기와 목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바른 역사 인식에서 현실을 통찰하면서도 사랑의 동기와 목적에서 지도자와 백성을 비판하며 울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단순한 감성적 눈물이 아닙니다. 그의 예리하고 신랄한 비판은 깊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탁월한 안목과 비판은 하나님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불의에 대항할 담력을 갖게 되고 또한 사랑도 갖게 됩니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조국 유대의 운명은 하나님 부재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한 의사처럼 조국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 부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울었습니다. 그가 내린 유일한 처방은 하나님을 찾는 것인데 유대 백성들은 그들 중에 하나님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정확한 진단에 따른 유일한 처방을 내렸는데도 환자가 의사의 처방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울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 부재를 슬퍼하는 영적 감성이 풍부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만남의 증거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값싼 동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값싼 동정심은 서로를 더욱 비참하게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차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창한 것만 내 세우고 주장하여 명분만 세우지 말고 사소하고 가능한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과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기여하지 못해도 아내를 불쌍히 여기고 남편을 불쌍히 여기고 가족과 친척과 이웃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영적 통찰과 감성이 필요합니다. 지도자를 신뢰하고 약한 자를 돕고 실수하고 실패한 이들을 격려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 부재의 원인과 그 심각성을 발견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또한 우상에게 속지 말고 거짓 위로에 속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의 운명을 생각하시면서 우셨던 것처럼 예레미야는 울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의 울음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부재의 상황임을 통찰하고 그 심각성에 당황해 하고 안타까워하며 슬퍼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 영적 통찰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건강한 태도입니다. 유대 주민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며 왕으로서 통치하지 않는다고 신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유대 주민들의 주장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비시켰습니다. 당시 유대는 주변의 열강들에게 심한 압력을 받았습니다. 유대 주민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면 유대가 바벨론이나 애굽에게 이렇게 당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을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재로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그들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겼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하나님 보다 애굽을 믿었습니다. 신앙에서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들의 욕심에 집착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 부재의 상황입니다. 하나님 부재의 상황은 사람들의 관심이 하나님 나라보다 사적인 것에 집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사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삶이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이, 불치의 병에 결린 사람에게는 건강이 절대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대 규모의 지진이나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당하게 되는 형편에서는 불행의 요인을 물리적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불행을 당한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돈, 건강, 물리적 안전 등은 우리 삶의 절대적 토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해결되면 행복할 것 같아도 그런 것이 채워져도 역시 인간은 불안하고 불행합니다. 나는 돈이나 건강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거나 돈과 건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그 영적 깨달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은 상대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돈과 건강이 확보되지 않으면 삶이 힘들기 때문에 돈도 벌고 건강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것을 위해 노력한다고 아무도 나무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결국 대충 살라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절대적 토대와 삶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삶이 바로 하나님 부재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삶의 토대는 돈도 건강도 인간관계도 사회정의도 사회보장도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신앙생활을 대충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부재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우리가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 부재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에게도 하나님 부재의 삶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사회에서는 하나님 부재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유대 주민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다른 나라에서 우상을 들여와서 섬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상 섬기는 지름길입니다.
요즘 이단이나 사이비에 대한 대 교단들의 입장의 우유부단한 번복과 교단 총회에서 총기위협과 투신 소동이나 지도자들의 부정행위 같은 사건들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종교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점점 성경의 바른 교훈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결국 하나님 부재의 심각한 영적 질병이 된 것입니다. 지금처럼 혼란하고 혼탁한 때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엇에 분개하고 무엇을 안타까워 하는지 예레미야의 눈물을 생각하고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이 어떻게 만들어 지고 흐르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 렘 8: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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