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교회 운동 > 지난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이곳은 2017년 이전에 올려진 아멘넷 오피니언 칼럼 글입니다. 이름으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황상하 | 김동욱 | 최송연 | 허경조 | 이수일 | 송흥용 | 김정국

지난 오피니언

유사교회 운동

페이지 정보

황상하 2009-10-13

본문

로마 가톨릭은 성례가 구원의 길을 독점한다는 주장을 포기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복이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부활의 신비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에 참여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신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파격적인 이 진술도 “부활의 신비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비밀스러운 일체가 요구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급진적인 현대신학자들은 구원을 교회나 기독교 또는 그리스도께 제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기독교적 용어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타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기독교의 신은 오래 전에 정통 신학과 함께 죽었고 교회는 그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21 세기의 교회의 존재에 대한 저돌적인 이교주의와 뉴에지종교와 다원주의의 도전에 직면한 기독교는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선포한 하늘과 땅의 주인인 하나님을 선포해야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자들을 향하여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 대신에 사람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지엽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므로 다원주의까지를 포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닌 회중들의 교회가 되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원리가 교회 안에서 지배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물리적 위력이 확대되어 기독교의 능력을 통계숫자로 제시하지만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인적인 증거는 너무도 무시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관심은 개인적인 체험과 이율배반적이게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땅에서 잘 되는 것에만 천착(穿鑿)합니다. 자각 증세 없이 서서히 왜곡되고 변질되어 온 성경의 메시지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 지도자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세속적 선구자처럼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였습니다. 교회 성장의 방편으로서의 선교지상주의는 교회와 선교 나가서는 하나님 나라 모두를 왜곡시켰는데 특히 일치 운동을 통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20세기 교회 선교의 확장은 교회 일치 문제를 피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선교활동은 교파적 분할협정으로 제어될 수 없었기에 교회의 가시적 일체성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관심은 WCC의 교회론에 의하여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기 동안의 에큐메니컬 운동의 ‘생명과 노동운동’의 모토는 ‘신학은 분열시키고 봉사는 연합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하여 일어난 평화운동은 봉사에서의 연합을 필요로 하는 긴급성 때문에 자유주의가 선점하였습니다. 특히 히틀러의 나치화된 독일 기독교를 보면서 신정통주의자들은 히틀러에게 대답하기 위한 교회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나 바른 성경적 교회론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주도했던 신학자들의 주장들이 근본교리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교회는 되어 있는 것(being)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becoming)으로 규정되었고, 구속받은 무리가 아니라 구속의 사역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 같은 교회론은 기독론에까지 적용되어 그리스도도 되어 있는 것이 아닌 되어가는 것 안에, 즉 행동 안에 존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에큐메니컬 운동은 바르트의 유형을 따라 교회를 ‘행동’으로 보는 입장과 가톨릭 신학자들처럼 교회를 성례적 제도로 보는 입장의 긴장을 환경론에서 일치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는 아주 나쁜 씨앗을 배태하고 있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에큐메니컬 교회론이 좌익으로 선회하더니 얼마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혁명신학이 되었습니다. 이 혁명신학은 선악의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사회참여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나타난 해방신학이 에큐메니컬 운동의 한 시대를 풍미했고 그 이후에는 WCC가 성령과 창조를 다원론에 부합하는 주제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구원론에 있어서 모든 사람은 그 나라로 부름 받는 것이지 모든 사람이 교회로 부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이 가능하게 한 것은 성경의 언어 계시의 객관적 권위를 상대화시킨 자유주의 사상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자유주의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자 복음주의는 제도교회 밖에서 교회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점증하는 유사교회 단체(parachurch)들은 의식 있고 젊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제도 교회 밖에서 교회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교단의 한계 내에서 또는 교단의 한계를 넘어서 수많은 선교 기관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와 봉사를 강조하므로 교회를 선교를 위한 도구로 이해하였습니다. 선교와 봉사의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하나 됨을 에큐메니컬 운동에 맡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선교단체와 유사교회들은 선교와 봉사에 있어서의 일치된 강조점 외에는 제각기 신학적 입장과 선호하는 운동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은사주의와 세대주의와 근본주의와 혁명신학 등 다양한 신학과 운동을 취향에 따라 취하게 되었으나 선교와 교육과 봉사라는 연합전선을 형성하였으며 미국과 한국에서는 그러한 토양이 대형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들 유사교회들과 그 배경에서 생겨난 초대형교회들은 그들 가운데 스며든 자유주의와 종교 혼합주의를 감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초대형교회들은 교단과 교리를 무시하는 실질적 하나의 교파가 되었으며 자기들의 교회가 마치 보편교회인양 행세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초대형 교회 목사는 모든 목사들이 자기에게 와서 배워야 한다는 듯 자기의 목회프로그램을 보급하는 일에 열을 올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아닌 선교와 교회 성장과 성공을 위한 방법론이 메시지가 되게 하므로 진정한 교회의 모습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점점 잃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독선연의 뉴욕에서의 목사안수를 뉴욕교협과 목사회가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뉴욕교협과 목사회가 한독선연의 뉴욕에서의 목사 안수에 반대하는 신학적 근거는 미흡하지만 한독선연은 그 활동과 그 회원들의 성향으로 보아 유사교회운동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기와 지명도가 있는 몇몇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신학적 모호성과 다원주의적 목회 성향에서 공감대를 형성하여 만든 것이 한독선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 교회의 질서를 거부하고 모든 교회는 자율적으로 치리하며 목회자의 소명도 객관적 확인이 아닌 주간적 고백에 의존하는 것이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 발상입니다.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다는 자들이 소정의 신학과정을 거치기만 하면 교회와 교단적 배경이 없이도 안수할 수 있다는 발상은 주님께서 위탁하신 권위가 아닌 인위적 권위입니다. 교회가 목회자의 소명 확인을 노회에 위탁한 것은 조심 없이 안수하는 우를 피하기 위한 성경적 지혜입니다. 개 교회나 목회자는 언제나 잘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노회와 교단의 지도와 견제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교단법이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개 교회나 목회자가 독선적이 되거나 사이비화 내지 이단화 되는 것을 막아주는 데는 필요하기 때문에 초대 교회 때도 예루살렘 공의회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와 질서를 무시하는 자들은 마치 자기들은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반면 기존 교단들은 페쇠적이고 구태의연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더욱 교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뉴욕에 목회자가 되려고 하는 이들이 있고 소정의 신학적 과정을 이수하였으니 안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한독선연다운 발상입니다. 유사교회들은 늘 그렇게 하여 신학과 교리를 해체하고 교회의 질서를 거부하며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주님의 교회를 이교적 영성과 신앙적 상품을 파는 혼합주의적 종교시장화 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유사교회 운동과 단체들이 선교와 교육과 봉사에 나름대로 기여한 바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제도적 교회의 기능까지 하려고 하는 것은 무지와 오만일 수 있습니다. 유사교회의 활동과 교회의 역할을 분별하지 못하면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교회와 지도자들은 예민하게 감지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연락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