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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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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99세의 방지일 목사님이 뉴욕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는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담백한 말씀이 인생 백세의 경험을 통해서도 변질되지 않아 마치 주일학생 때 사경회에 참석하였던 기분이었습니다. 길선주, 주기철, 최봉석 목사님들과의 교우(交友)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들은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여 한 세기에 가까운 역사의 간격을 무색케 하였습니다. 칼빈의 탁월한 성경이해를 말씀하시면서 “나이도 어린 것이 어떻게 그렇게 심오한 것을 깨달았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인간을 만드셨는지..”라고 하는 노옹의 탄복은 어떤 신학자의 논리적 주장보다도 개혁주의의 소중함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강조하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목사님은 조카 방선기 목사가 한국의 “기독교윤리신천운동”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시다는 심기를 드러내셨습니다. 오직 예수만 전하는 것을 강조하시려다가 하신 말씀으로 이해를 하면서도 어쩐지 떨쳐버릴 수 없는 부정적 여운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 집회에 참석하였던 한 동역자도 조심스럽게 그 이야기를 한 것을 볼 때 그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2004 년 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전도를 하는 검찰청 사무국장이 검찰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전도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를 하였으니 교회도 열심히 다녔을 것입니다. 직장 사람들은 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죄목은 부하 여직원을 성희롱했다는 것입니다.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성희롱을 하는 경우는 사회적으로 자주 문제가 되는 일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사의 지나친 친절이 부하 여직원에게 성희롱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런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상습적으로 부하 여직원을 성희롱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검찰 감찰위원장이 장로님이었는데 그 보고를 받고 얼굴이 뜨거워 혼이 났다는 말씀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검찰청 사무국장쯤 되려면 좋은 학교를 나왔을 것이고 공부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교회에서는 충성하는 교인이라고 인정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직장에서 부하 여직원을 상습적으로 성희롱을 하였습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나쁜 짓을 하면서 전도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부하 여직원을 성희롱하면서도 여전히 열심히 전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전 도하는 일과 성희롱하는 일의 관련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 것입니다. 성희롱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한 것은 아닐 텐데, 이 경우는 잘못된 기독교인의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도를 한 것이 탄로 나자 그 여자가 불쌍해서 그랬다고 했다고 합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한 것이 자기의 외도까지도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한 모양입니다. 무속종교나 미신에는 윤리가 없고 고등종교일수록 윤리를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는 아니지만 어떤 종교보다도 고도의 윤리적 수준을 요구합니다. 교리만 강조하고 윤리를 소홀히 하는 기독교는 온갖 이단과 사교가 발생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것을 교회사가 증언해 줍니다. 

윤리적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기독교는 유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윤리는 곧 이타적 사랑의 희생적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박사 그리스도인, 판.검사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닥터, 그리스도인  국회의원, 나아가 기독교지도자들에게 노불리즈 오불리제 정신의 윤리의식이 없다면 기독교는 유치한 무속종교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신자는 그가 믿는 교리의 내용을 윤리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십계명과 그것을 확대 적용한 구약의 율법과 제사의식에는 고도의 윤리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와 예배에 교리적 내용만 있고 윤리적 실천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 역겨운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는 신자가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목회에 성공했다는 목회자가 거짓말을 정치적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은 그 자신의 무지함을 폭로하는 것이고 무모하게 하나님께 대항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윤리를 이야기 하면 성경은 윤리적인 책이 아니고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고 성경이 윤리적인 책이 아니라는 말은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위험한 말입니다.

물론 교리적인 것이 윤리적인 것에 우선합니다. 구원 얻는 도리인 교리가 절대적으로 윤리에 우선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절대적 교리가 윤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교회는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인간의 행위와 윤리를 강조하여 많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런데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윤리적인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심지어 극단적으로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그 부작용의 극단적인 예가 전도 열심히 하면서 부하 직원을 성희롱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인들 중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사는 것인가를 모르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단이 아닌 이상 교리적으로 잘못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기적인 것 때문에 비윤리적이 되고 신앙은 이중적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는 복만 사랑합니다. 신자는 거룩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그 거룩함은 곧 고도의 윤리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거룩함을 향한 절제가 없으면 겸손도 없고 온유도 없고 그것은 결국 사랑이 없는 것이며 사랑이 없다는 것은 곧 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한다는 것은 곳 사랑에 대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구원의 목표입니다. 행복이 구원의 목표가 아닙니다. 거룩함이 없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행복만을 추구하고 거룩함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비윤리적이 되어도 내가 행복하게만 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됩니다. 병만 낫게 해 준다면 아무 곳에나 가고, 사업에 이익이 되면 점쟁이라도 찾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현실 교회와 신자들이 내가 잘되고, 내가 행복하게 된다는 보장이 있고서야 하나님 믿는 것도 교회를 섬기는 것도 고려해 볼 문제로 취급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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