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비판주의 비판
페이지 정보
황상하ㆍ2008-07-19관련링크
본문
이 글의 제목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청년 헤겔학파인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를 비판적 비판주의라고 하여 비판한 책 제목의 일부입니다. 책의 전체 제목은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를 논박한다」입니다. 신성가족이란 바우어 형제와 그들의 추종자들에 대한 풍자적 별칭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우어 형제와 청년헤겔학파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헤겔의 관념론 철학을 비판했습니다. 바우어와 그의 추종자들을 비판적 비판주의라고 한 것은 그들이 철학을 빌어서 현실을 희극으로 왜곡시켰다고 하여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책을 저술할 무렵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사상을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그리고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변화시켰습니다. 전투적 유물론의 견지에서 청년헤겔학파와 주관주의적 제 관점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헤겔 변증법의 합리적인 요소들은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의 신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하였습니다. 1845년 4월, 마르크스는 청년헤겔학파 중 가장 훌륭하게 평가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며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썼습니다. 그 글은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의 「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이라는 책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11번째 테제가 바로 그 유명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인데 이 선언이야말로 마르크스가 그의 공산주의 이론 엔진에 시동을 거는 것과 같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언제나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제도와 사상과 철학들이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역부족적 상황에 직면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의 명쾌한 사회과학적 설명은 많은 지식인들과 대중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이론의 이상이야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환상적인 꿈을 꾸게 하였습니다. 서구인들은 거의가 이론과 논리와 과학에 길들여져 있어서 과학적 설명에 쉽게 설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어도 19세기 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성은 종전의 권위를 상실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모든 것이 상대화 되고 말았습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과 가치까지 상대화하고 나아가서는 종교의 신앙의 영역에까지 상대화의 담론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절대 가치와 절대 권위를 해체시킨 현대정신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인 공산주의 이론이라는 병의 후유증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사회과학입니다. 마르크스는 그가 비판한 헤겔의 정반합의 이론을 그의 공산주의 경제이론에 응용하여 자본주의 이전은 자본주의보다 더 나아서 ‘정’이고 자본주의는 ‘반’이며 그 보나 나은 것은 ‘합’인 공산주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과학에는 정답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정답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제 문제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든 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추구합니다. 공산주의는 과학의 한계를 몰랐고 무엇보다 인간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오늘날도 지나치게 진보적인 사람들은 과학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무지 때문에 스스로 속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속는 경우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진보는 과학적 미신(scientific superstition)에 쉽게 빠지고 지나친 보수는 정통적 우상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쇠고기 협상이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신뢰 문제를 두고 편 가르기를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계까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 같아 실망입니다. 누구를 비판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를 상실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는지, 지금의 제도와 지도자를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지, 여중생들의 행동의 순수성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지, 민심이 천심이라는 믿음(?)이 성경적인지, 무분별한 맹목적 친미를 비판적 친미로 바꿀 수는 없는지...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무조건 수구꼴통이라고 부르는 보수주의자들을 차분히 설득하려는 노력을 행동과 말로서 보여주어야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걸핏하면 진보주의자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저돌성향도 지양(止揚)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나 보수가 극단으로 치우치면 비판적 비판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청년헤겔학파인 바우어와 그의 추종자들을 비판적 비판주의라고 비판한 것에 전폭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또한 어떤 사상에도 비판의 여지는 있고 진정한 비판은 비판될 수 없는 절대기준에 의한 비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아무도 교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아둔해서인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이 공산화 될 가능성도, 그렇다고 유신 때와 같은 공안정국으로 회귀(回歸)할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될 위험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려 국민이 선택한 것에 대해 국민이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고 잘 못 선택하였으면 그 아픔도 감수하고 문제 해결의 합법적 절차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발언과 행동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고 또한 비판적 비판주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가 돌아보고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아프고 호된 자기비판으로 겸손에까지 나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갈 6:1-3절
이 책을 저술할 무렵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사상을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그리고 혁명적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변화시켰습니다. 전투적 유물론의 견지에서 청년헤겔학파와 주관주의적 제 관점에 대해 철저한 비판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헤겔 변증법의 합리적인 요소들은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의 신비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비판하였습니다. 1845년 4월, 마르크스는 청년헤겔학파 중 가장 훌륭하게 평가했던 포이에르바하를 비판하며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을 썼습니다. 그 글은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의 「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이라는 책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11번째 테제가 바로 그 유명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인데 이 선언이야말로 마르크스가 그의 공산주의 이론 엔진에 시동을 거는 것과 같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언제나 인간 스스로가 발명한 제도와 사상과 철학들이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역부족적 상황에 직면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의 명쾌한 사회과학적 설명은 많은 지식인들과 대중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이론의 이상이야 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토피아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환상적인 꿈을 꾸게 하였습니다. 서구인들은 거의가 이론과 논리와 과학에 길들여져 있어서 과학적 설명에 쉽게 설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어도 19세기 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이성은 종전의 권위를 상실하였고 현대에 와서는 모든 것이 상대화 되고 말았습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과 가치까지 상대화하고 나아가서는 종교의 신앙의 영역에까지 상대화의 담론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절대 가치와 절대 권위를 해체시킨 현대정신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인 공산주의 이론이라는 병의 후유증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사회과학입니다. 마르크스는 그가 비판한 헤겔의 정반합의 이론을 그의 공산주의 경제이론에 응용하여 자본주의 이전은 자본주의보다 더 나아서 ‘정’이고 자본주의는 ‘반’이며 그 보나 나은 것은 ‘합’인 공산주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과학에는 정답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정답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제 문제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든 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추구합니다. 공산주의는 과학의 한계를 몰랐고 무엇보다 인간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오늘날도 지나치게 진보적인 사람들은 과학과 인간의 한계에 대한 무지 때문에 스스로 속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속는 경우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진보는 과학적 미신(scientific superstition)에 쉽게 빠지고 지나친 보수는 정통적 우상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쇠고기 협상이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신뢰 문제를 두고 편 가르기를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종교계까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 같아 실망입니다. 누구를 비판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를 상실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는지, 지금의 제도와 지도자를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지, 여중생들의 행동의 순수성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지, 민심이 천심이라는 믿음(?)이 성경적인지, 무분별한 맹목적 친미를 비판적 친미로 바꿀 수는 없는지...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무조건 수구꼴통이라고 부르는 보수주의자들을 차분히 설득하려는 노력을 행동과 말로서 보여주어야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걸핏하면 진보주의자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저돌성향도 지양(止揚)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나 보수가 극단으로 치우치면 비판적 비판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청년헤겔학파인 바우어와 그의 추종자들을 비판적 비판주의라고 비판한 것에 전폭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또한 어떤 사상에도 비판의 여지는 있고 진정한 비판은 비판될 수 없는 절대기준에 의한 비판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아무도 교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아둔해서인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이 공산화 될 가능성도, 그렇다고 유신 때와 같은 공안정국으로 회귀(回歸)할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될 위험을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려 국민이 선택한 것에 대해 국민이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고 잘 못 선택하였으면 그 아픔도 감수하고 문제 해결의 합법적 절차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발언과 행동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고 또한 비판적 비판주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성향이 있는가 돌아보고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통하여 아프고 호된 자기비판으로 겸손에까지 나아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갈 6:1-3절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