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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가 무용지물이 된 자동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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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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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되지 않는 성장

언젠가 TV “Maury Show”를 방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나왔었습니다. 한 여성은 남편의 폭력에 대하여 문제를 토로했고, 한 어머니는 어린 두 아들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특이한 증세를 호소하였고, 마지막 한 어머니는 13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키가 멈추지 않고 계속 자라는 것을 고민하였습니다. 지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13살의 아이의 키가 2m가 훨씬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나이로 봐서 아직 7-8년은 키가 더 자랄 것이라고 하면서 고민을 토로하였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의 키를 자라게 하기 위해 약을 먹이기도 하는데 이 어머니는 아들의 자라는 키가 멈추지 않는 것이 심각한 고민거리였습니다.

달리는 자동차는 속도를 줄여야 할 때 브레이크를 밟습니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경우나 브레이크 고장이 아니더라도 길이 미끄러워 자동차를 멈추게 할 수 없는 난감한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어느 늦가을 이른 새벽에 강릉에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탔습니다. 노면은 젖은 상태였지만 운전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긴 오르막길이 끝나고 내리막길이 시작되어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차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노면이 얼어 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브레이크도 핸들도 제멋대로였습니다. 지역적으로 북쪽이고 산속 길이라 노면이 얼어 있었습니다.중앙분리대가 없는 고속도로에서 차는 중앙선을 넘어 제멋대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이라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없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스키를 타듯 동체 컨추럴로 위기를 모면했었지만 몹시도 당황스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성장은 브레이크가 무용지물이 된 자동차처럼 되었습니다. 경제는 성장을 해야 하지만 이제는 그 성장이 통제되지 않는 성장이 되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성장이라기보다 죽음의 질주를 계속하는 자동차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타락한 상태에서 인간의 탐욕과 불만은 경제성장을 병적 집착으로 만들어버렸고 경제학은 자원에 대한 투쟁과 노동을 타락시켰습니다. 땅과 자원은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의 공동의 그리고 공평한 접근보다는 투쟁과 전쟁을 일으키는 최대의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자원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비축되고 정작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의 접근은 거부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오일 값 상승과 모든 물가의 상승도 그런 원인 때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가스 값이나 모든 물가가 폭등할 물리적인 요인이 갑자기 발생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물가가 천정부지(天井不知)로 상승하는 것은 자원을 컨추럴 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못된 장난질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합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주할 집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사치와 낭비를 위해 부도덕한 행위와 일에 집착합니다. 땀 흘리는 고역의 노동이 비록 타락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는 즐거움도 있는데 자본주의는 노동을 일하는 사람에 대한 보살핌이나 책임감이 거의 없는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타락시켰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와 그 경제가 추구하는 성장의 열매에 탐닉하는 정치도 성장을 하지 않는 것은 곧 자멸이라도 되는 듯 두려워합니다. 두발 자전거가 달리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듯이 경제도 이제는 끝없이 성장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말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이 통제되지 않는 성장으로 말미암아 노동은 탐욕의 노예가 되었고, 압제의 도구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인간 자신의 야망으로 대체시키는 수단이 되게 하였습니다. 노동이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비록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즐거운 것인데 이기적인 부의 추구와 그것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때는 우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동은 이기적인 성장에 집착하고 이기적인 성장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켰습니다.

성장 자체가 목적이 된 사람들은 더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폭력을 생산합니다. 바울이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한 것은 열 번 째 계명을 어기는 것은 첫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나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복이 늘어나게 될 때, 그 복 자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위험에 대해 성경은 수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전도서는 부가 그토록 불안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더 많은 부를 갖고 싶어 하는 끝없는 갈망의 허무를 주목하게 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자들도 많아지나니 그 소유주들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도서 5: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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