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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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8-05-1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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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5월 8일이 어머니날이었는데 아버지들이 섭섭할까봐 그랬는지 어버이날이라고 바꾸어 지키게 되었습니다. 미국에는 5월 둘째 주일이 어머니날입니다. 어린이날은 어린이가 어른들의 권위에 눌러 무시되던 시대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어린이를 과보호하는 시대에는 어린이날을 지켜야 할 필요가 옛날처럼 절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 같은 유교문화권에서는 문화 전체가 효도를 강조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어버이날을 따로 지킬 필요가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효도가 소홀히 되기 때문에 어버이날을 지킬 필요가 절실합니다. 하지만 어버이날만 효도하는 그릇된 풍속도가 형성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는 효를 으뜸 되는 도리로 말했습니다.
삼강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도리이고 오륜은 5가지 기본적 실천덕목인데 그 모든 가르침 중 으뜸으로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유교문화권에서처럼 강조되지는 않지만 효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효의 강조라면 굳이 교회에서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도 효도를 소중하게 여겨 강조하여 지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효도는 기본적인 교양과 상식만 있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효는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강조하는 효와는 원리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효도는 혈연적 인간관계 중심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효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 질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에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에게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하신 것을 예수님의 효도하는 모범으로 강조할 수도 있지만 그 원리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효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효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차원에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하였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효의 기준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결코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의 제자가 되려하는 자는 부모와 처자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자기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효와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가치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효가 으뜸의 가치이지만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나라가 으뜸의 가치였습니다.
마가복음 3:20-35절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있을 때 예수님의 가족들, 즉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예수를 붙들어 가려고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귀신들렸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상황이었으니까 예수님의 가족들은 매우 불안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3:31절에 따르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이 들어가 계신 집밖에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아들에 대한 흉한 소문 때문에 염려되어 찾아온 어머니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정상인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가족 관계에서의 책임과 의무도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쳤다고 한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효도의 문제도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이해해야지 상식적이고 이교적인 효 사상과 혼동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녀사랑이나 효도는 인간 사회의 관습이고 그 시대의 가치관이며 도덕입니다. 그런 도덕률과 효도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서는 어디서나 강조되는 것들입니다. 특히 유교적인 가치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효가 더 중요하게 강조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도덕률과 효도를 반대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추종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가 주일예배의 설교로 자녀사랑이나 효도나 나라사랑 같은 것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유치한 것입니다. 설교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남동생이 4명이나 있었고 여동생도 최소한 두 명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한 것은 초기 교회 공동체에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에서의 가족의 위무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나의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보라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예수님의 동생들은 왜 어머니를 모실 수 없었는지, 혹은 모실 수 있었는데도 요한이 모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은 단순한 효도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시고 그의 동생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르면 마리아는 곧 요한의 어머니시기도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마리아는 초기 교회 공동체 모두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효도의 차원에서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 아니라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혈육의 인간관계보다 신앙이 우선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왔을 때 제자들에게 누가 내 동생이며 내 모친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곧 내 모친이요 동생이라고 하신대로입니다.
기독교는 가족 관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부모 자식이나 부부관계를 해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가족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전의 가족 개념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부모, 형제, 처자, 친구를 미워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우선시 하는 새로운 가족개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도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보무에게 효도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하는 기도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효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처럼 가족 개념이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교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합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가족제가 허물어진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가족 개념의 혼란은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혈연관계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수준에서 효도나 가치에 머문다면 현실적 문제를 결코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친교단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세상을 향하여 그 어떤 메시지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 아래 든든히 서야 하고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 안에 확고히 설 때 지나친 혈연중심주의나 또는 가족 해체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비로소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의미의 가족관계가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떠해야하는지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혈연중심의 가족관계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를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차원과 그 원리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 모두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이고 자식들입니다. 진정한 교회로 세워가는 데 실패하는 요인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 관계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족이고 부모 형제임을 배우고 실천해 갈 때 교회가 진정 교회되고 우리 중에 하나님 나라가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가복음 3:32-35)
삼강오륜(三綱五倫)에서는 효를 으뜸 되는 도리로 말했습니다.
삼강은 유교 도덕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 도리이고 오륜은 5가지 기본적 실천덕목인데 그 모든 가르침 중 으뜸으로 자녀가 부모를 섬기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유교문화권에서처럼 강조되지는 않지만 효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효의 강조라면 굳이 교회에서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싶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도 효도를 소중하게 여겨 강조하여 지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효도는 기본적인 교양과 상식만 있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효는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강조하는 효와는 원리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효도는 혈연적 인간관계 중심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효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 질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순간에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에게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하신 것을 예수님의 효도하는 모범으로 강조할 수도 있지만 그 원리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효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효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차원에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하였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효의 기준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결코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의 제자가 되려하는 자는 부모와 처자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자기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 나라는 효와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가치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효가 으뜸의 가치이지만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나라가 으뜸의 가치였습니다.
마가복음 3:20-35절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있을 때 예수님의 가족들, 즉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예수를 붙들어 가려고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귀신들렸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상황이었으니까 예수님의 가족들은 매우 불안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3:31절에 따르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이 들어가 계신 집밖에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아들에 대한 흉한 소문 때문에 염려되어 찾아온 어머니께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정상인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가족 관계에서의 책임과 의무도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쳤다고 한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효도의 문제도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이해해야지 상식적이고 이교적인 효 사상과 혼동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녀사랑이나 효도는 인간 사회의 관습이고 그 시대의 가치관이며 도덕입니다. 그런 도덕률과 효도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서는 어디서나 강조되는 것들입니다. 특히 유교적인 가치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효가 더 중요하게 강조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도덕률과 효도를 반대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추종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가 주일예배의 설교로 자녀사랑이나 효도나 나라사랑 같은 것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유치한 것입니다. 설교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남동생이 4명이나 있었고 여동생도 최소한 두 명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한 것은 초기 교회 공동체에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에서의 가족의 위무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나의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보라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예수님의 동생들은 왜 어머니를 모실 수 없었는지, 혹은 모실 수 있었는데도 요한이 모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은 단순한 효도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시고 그의 동생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르면 마리아는 곧 요한의 어머니시기도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마리아는 초기 교회 공동체 모두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효도의 차원에서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 아니라 이 같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혈육의 인간관계보다 신앙이 우선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왔을 때 제자들에게 누가 내 동생이며 내 모친이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곧 내 모친이요 동생이라고 하신대로입니다.
기독교는 가족 관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부모 자식이나 부부관계를 해체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가족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전의 가족 개념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부모, 형제, 처자, 친구를 미워하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우선시 하는 새로운 가족개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도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보무에게 효도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선하는 기도는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효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처럼 가족 개념이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교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합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가족제가 허물어진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가족 개념의 혼란은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혈연관계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묶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수준에서 효도나 가치에 머문다면 현실적 문제를 결코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친교단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세상을 향하여 그 어떤 메시지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 아래 든든히 서야 하고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 안에 확고히 설 때 지나친 혈연중심주의나 또는 가족 해체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비로소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의미의 가족관계가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떠해야하는지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혈연중심의 가족관계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를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차원과 그 원리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 모두 형제요 자매이며 어머니이고 자식들입니다. 진정한 교회로 세워가는 데 실패하는 요인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 관계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족이고 부모 형제임을 배우고 실천해 갈 때 교회가 진정 교회되고 우리 중에 하나님 나라가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가복음 3: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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