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환경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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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8-04-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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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로마서 8: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이란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을 가리키는데 그 창조물인 자연이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연이 고통을 당하고 신음하고 있는 것은 자연 그 자체 때문이 아니고 인간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환경보호론 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연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하등(何等)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태풍과 파도와 폭우와 폭설, 심지어 지진이나 자연발화의 산불까지도 자연에게 이롭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사람에 의하지 않고는 자연은 자연에게 고통을 주거나 신음하게 하는 일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주장을 100%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원을 따지자면 자연의 고통이 인간의 죄 때문인 것은 사실이지만 저주 아래 있게 된 자연은 자연 상태에서도 서로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더 잘 관리하고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있게 된 자연은 스스로 엉겅퀴와 가시넝쿨을 내어 창조 본래의 모습이 아닌 무절서와 고통의 요인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을 이야기 한 것은 이러한 상태를 말한 것이고 그것을 예로 영적으로 저주 아래 있는 인간 상황의 안타까움을 각성시키려 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환경오염이나 파괴가 오늘날과 같지 않았고 그것이 인류에게 위협이 될 만큼 심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문제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인간 범죄로 인하여 저주 아래 놓이게 된 연장선에서 피조물들의 그 신음과 고통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개발로 인하여 더욱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또한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은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고통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알레스카의 자원개발이나 한국의 대운하 프로젝트 같은 것이 환경운동가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주춤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장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주장임을 말해줍니다. 환경보호론 자들은 지속 가능한 개발 즉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지만 인간의 욕망이 절제되지 않고는 그 어떤 방안도 묘책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21세기를 맞아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생태계 파괴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유엔은 물론이고 선진국들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그런 문제에 대하여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뒷짐 지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의 문제는 삶의 질에 관한 문제이기에 앞서 존재와 생명의 문제이며 생존 그 자체의 문제이고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문제입니다. 땅으로 대표되는 물질에 대한 바른 인식과 의무를 저버릴 때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일체의 하나님의 보호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으로 성경은 가르칩니다. 가인은 무기를 들어 동생을 처 죽이므로 살인을 저질렀으나 오늘날은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므로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는 인간과 동물, 식물의 삶을 구성하는 생명 공간을 지칭합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고, 수많은 별들을 가진 우주의 수(數)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아직까지 생명체가 있는 지구와 같은 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물뿐만 아니라 주변의 환경과 상호의존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물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건강한 생명을 이어갑니다. 생명체 사이의 역동적 상호 작용은 세균, 곰팡이 등과 같은 단순한 생명체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복잡한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란 바로 각 생명체 사이의 상호작용과 질서가 깨어진 것을 말합니다. 자연과학과 생명공학은 각 생명체 사이의 창조적인 질서를 인위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또한 파괴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자연 환경은 생명체의 존속에 위험이 될 정도로 오염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인 땅, 공기, 하늘, 바다, 물, 도시, 농촌, 식물, 심지어 무생물까지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예전의 공기가 아니고, 우리가 먹는 밥이나 과일이나 야채도 옛 것이 아니고, 고기나 생선도 창조 질서대로 생산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생태계 파괴는 인류의 종말이 인간 스스로의 욕심에 의해서 자초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을 하게 합니다. 인간이 제조한 핵무기는 인류를 몇 번이고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비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생태계의 파괴는 이미 인류에게 치명적이고 가공할 재앙으로 진행되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탄식이 인간의 죄 때문이고 생태계의 파괴가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면 환경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책임져야할 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19-21절-
하지만 나는 그런 주장을 100%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원을 따지자면 자연의 고통이 인간의 죄 때문인 것은 사실이지만 저주 아래 있게 된 자연은 자연 상태에서도 서로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더 잘 관리하고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있게 된 자연은 스스로 엉겅퀴와 가시넝쿨을 내어 창조 본래의 모습이 아닌 무절서와 고통의 요인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을 이야기 한 것은 이러한 상태를 말한 것이고 그것을 예로 영적으로 저주 아래 있는 인간 상황의 안타까움을 각성시키려 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환경오염이나 파괴가 오늘날과 같지 않았고 그것이 인류에게 위협이 될 만큼 심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문제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인간 범죄로 인하여 저주 아래 놓이게 된 연장선에서 피조물들의 그 신음과 고통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개발로 인하여 더욱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또한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은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고통으로 되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알레스카의 자원개발이나 한국의 대운하 프로젝트 같은 것이 환경운동가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주춤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장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주장임을 말해줍니다. 환경보호론 자들은 지속 가능한 개발 즉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지만 인간의 욕망이 절제되지 않고는 그 어떤 방안도 묘책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21세기를 맞아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생태계 파괴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유엔은 물론이고 선진국들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같이 하고 있는데 교회는 여전히 그런 문제에 대하여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뒷짐 지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의 문제는 삶의 질에 관한 문제이기에 앞서 존재와 생명의 문제이며 생존 그 자체의 문제이고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문제입니다. 땅으로 대표되는 물질에 대한 바른 인식과 의무를 저버릴 때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일체의 하나님의 보호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으로 성경은 가르칩니다. 가인은 무기를 들어 동생을 처 죽이므로 살인을 저질렀으나 오늘날은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므로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는 인간과 동물, 식물의 삶을 구성하는 생명 공간을 지칭합니다.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고, 수많은 별들을 가진 우주의 수(數)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아직까지 생명체가 있는 지구와 같은 별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물뿐만 아니라 주변의 환경과 상호의존하면서 살아갑니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물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건강한 생명을 이어갑니다. 생명체 사이의 역동적 상호 작용은 세균, 곰팡이 등과 같은 단순한 생명체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복잡한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란 바로 각 생명체 사이의 상호작용과 질서가 깨어진 것을 말합니다. 자연과학과 생명공학은 각 생명체 사이의 창조적인 질서를 인위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또한 파괴하였습니다. 거의 모든 자연 환경은 생명체의 존속에 위험이 될 정도로 오염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인 땅, 공기, 하늘, 바다, 물, 도시, 농촌, 식물, 심지어 무생물까지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는 예전의 공기가 아니고, 우리가 먹는 밥이나 과일이나 야채도 옛 것이 아니고, 고기나 생선도 창조 질서대로 생산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생태계 파괴는 인류의 종말이 인간 스스로의 욕심에 의해서 자초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측을 하게 합니다. 인간이 제조한 핵무기는 인류를 몇 번이고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비축되어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생태계의 파괴는 이미 인류에게 치명적이고 가공할 재앙으로 진행되고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한 것입니다. 피조물의 탄식이 인간의 죄 때문이고 생태계의 파괴가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면 환경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책임져야할 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19-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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