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을 무시한 경향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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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08-02-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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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이야기로 한 창 꽃을 피우고 있는데 제사 이야기로 알아듣고 끼어드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글을 인용할 때 조심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글이나 사상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전후 문맥을 살피고 저자의 본래 취지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인용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이나 학문하는 사람이 지켜야할 기본 상식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34:16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라는 말씀을 문맥을 살피지 않고 생각할 경우 말씀의 짝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그 “짝”은 각종 짐승들의 짝을 말씀 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전하는 설교자는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사상이나 뜻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잘못 가르치거나 전하게 되면 그 피해가 치명적입니다.
성경의 맥락을 무시한 성경해석 중에 대표적인 것이 “역사비평”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비평이란 성경을 책 전체로 이해하지 않고 조그만 창문으로만 들여다보고 그 말씀을 보존하고 전승해온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100여년 정도 되는 역사비평의 역사이지만 지금은 역사비평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으로 성경 본문을 분해했지만 그것을 전체적으로 다시 조립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역사비평의 방법으로 성경에 접근했던 사람들은 성경을 해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무시한 태도는 신학 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악용된 예가 허다합니다. 루이 14세는 나에게 한 문장만 준다면 누구든지 반역자로 만들어 처형할 수도 있고 공로자로 만들어 상을 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 소련에서는 정적을 숙청할 때 그가 친필로 쓴 글 단 한 문장만 입수하면 끝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후문맥을 떼어 버리고 그 문장이 미제에게 보낸 것이라고 잡아 족치거나 미국을 찬양한 글이라고 윽박지르면 아무리 변명해도 걸려 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군사 독재 시절에도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지구상에 독재자는 점점 사라지지만 말이나 글의 맥락 이해가 무시되어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경우는 아직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학문과 종교에서도 이런 경향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와 비교종교학은 그런 면에서 맥락을 무시한 기독교이해의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단은 성경의 맥락, 특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맥락을 벗어나서 자의적으로 성경을 인용하는데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종교학자들은 비교종교학이라는 상황에 다른 종교의 경전들과 교리들을 무리하게 집어넣어 혼합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교종교학이란 완전히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종교들을 서로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는 그 종교의 독특한 맥락을 벗어나서 비교하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비교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이 길고 짧다는 것을 알려면 그것을 잴 수 있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것은 철학과 종교를 비교하는 것과 일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자로 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자로 어떤 차이를 발견했다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비평, 다원주의, 비교종교학이라는 잣대의 공정성의 권위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주장이 편협하고 독단적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무지한 독단입니다. 비교종교학의 모든 종교에 진리가 있다는 가정은 비교종교학이 스스로 모든 종교 위에 군림하는 교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에 뿌리를 둔 비교종교학은 표준이 하나가 아니라 많다고 가정하는데 많은 표준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려할 때 겪게 될 혼란과 폐해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럿이라는 주장은 얼핏 생각하면 포용성이 있는 너그러운 태도 같으나 인생을 표류하게 만들뿐입니다. 맥락을 무시한 경향성들은 종교와 정치와 학문의 세계에서 뿐 아니라 넘쳐나는 인터넷 댓글들을 통하여 그 악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11-
예를 들어 이사야 34:16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라는 말씀을 문맥을 살피지 않고 생각할 경우 말씀의 짝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그 “짝”은 각종 짐승들의 짝을 말씀 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전하는 설교자는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사상이나 뜻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잘못 가르치거나 전하게 되면 그 피해가 치명적입니다.
성경의 맥락을 무시한 성경해석 중에 대표적인 것이 “역사비평”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비평이란 성경을 책 전체로 이해하지 않고 조그만 창문으로만 들여다보고 그 말씀을 보존하고 전승해온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100여년 정도 되는 역사비평의 역사이지만 지금은 역사비평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성경해석 방법으로 성경 본문을 분해했지만 그것을 전체적으로 다시 조립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역사비평의 방법으로 성경에 접근했던 사람들은 성경을 해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맥락을 무시한 태도는 신학 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악용된 예가 허다합니다. 루이 14세는 나에게 한 문장만 준다면 누구든지 반역자로 만들어 처형할 수도 있고 공로자로 만들어 상을 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 소련에서는 정적을 숙청할 때 그가 친필로 쓴 글 단 한 문장만 입수하면 끝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후문맥을 떼어 버리고 그 문장이 미제에게 보낸 것이라고 잡아 족치거나 미국을 찬양한 글이라고 윽박지르면 아무리 변명해도 걸려 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군사 독재 시절에도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지구상에 독재자는 점점 사라지지만 말이나 글의 맥락 이해가 무시되어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경우는 아직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학문과 종교에서도 이런 경향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와 비교종교학은 그런 면에서 맥락을 무시한 기독교이해의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것과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단은 성경의 맥락, 특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맥락을 벗어나서 자의적으로 성경을 인용하는데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종교학자들은 비교종교학이라는 상황에 다른 종교의 경전들과 교리들을 무리하게 집어넣어 혼합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교종교학이란 완전히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종교들을 서로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는 그 종교의 독특한 맥락을 벗어나서 비교하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비교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이 길고 짧다는 것을 알려면 그것을 잴 수 있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것은 철학과 종교를 비교하는 것과 일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한 자로 잴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자로 어떤 차이를 발견했다할지라도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비평, 다원주의, 비교종교학이라는 잣대의 공정성의 권위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주장이 편협하고 독단적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무지한 독단입니다. 비교종교학의 모든 종교에 진리가 있다는 가정은 비교종교학이 스스로 모든 종교 위에 군림하는 교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에 뿌리를 둔 비교종교학은 표준이 하나가 아니라 많다고 가정하는데 많은 표준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려할 때 겪게 될 혼란과 폐해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럿이라는 주장은 얼핏 생각하면 포용성이 있는 너그러운 태도 같으나 인생을 표류하게 만들뿐입니다. 맥락을 무시한 경향성들은 종교와 정치와 학문의 세계에서 뿐 아니라 넘쳐나는 인터넷 댓글들을 통하여 그 악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마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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