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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생뚱맞은 ‘이미’와 ‘아직’의 성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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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0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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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어릴 때 내가 경험했던 성탄절 경험이 요즘 아이들에게도 있을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 때 성탄 준비는 두 달 전부터 시작되곤 하였습니다. 요절 암송과 무용과 연극과 합창과 독장 병창 등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두 달도 모자랐습니다. 준비된 모든 것들은 성탄일 저녁에 발표하게 되는데 그 때는 교우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 구경하러 모여와 교회는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귀하던 때라 성탄절 발표회는 어른 아이 모두에게 신기하고 경이로운 볼거리였습니다. 그렇게 설레고 업 된 마음으로 맞는 성탄은 그 발표회를 절정으로 끝이 납니다.

성탄일이 지난 다음날부터 한동안 나는 성탄후유증을 앓았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그 허전한 후유증을 생생하게 기억하곤 합니다. 마음의 허전함과 쓸쓸함과 텅 빈 것 같았든 감정은 마치 어떤 병처럼 참기가 힘들었었습니다. 12월 25일이 지나면 잔인하리만치 성탄의 기쁨과 설렘과 즐거움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도 불만이었습니다. 왜 성탄의 기쁨과 즐거움은 12월 25일이 지나면 여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

복음이 무엇인지 몰랐던 어린 시절에는 단순히 성탄절에 맛보는 즐거움이 사라지는 데 불만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차원에서 성탄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교회는 불신자들이 성탄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막상 성탄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 또한 그렇게 바르고 정당하지 못함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2월 25일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바로 그 날이 아니고 옛 로마의 이방종교의 축일을 성탄절로 정하여 지키게 되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교회를 비난하지만 나는 그것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은 어차피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고 ‘나심’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날을 성탄일로 지켰으면 좋겠지만 아무도 그 날을 아는 사람이 없고 또한 12월 25일이 본래는 이방종교의 축제일이었으나 이제는 그 날을 옛 로마 종교의 축일로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또한 지금의 성탄절에 그 이방 종교의 어떤 영향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12월 25일이 지나면 성탄의 의미마저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오늘날의 교회의 복음에 대한 태도의 상징처럼 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나는 성탄일이 지난 시점에서 성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성탄에 대한 그릇된 교회의 태도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생뚱맞은 포즈를 취해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지만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설명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고 그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이미’와 ‘아직’이라는 용어가 너무나 절묘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릴 때 성탄 후유증에 시달리곤 했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낭만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리고 유치하여 성탄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겪었던 일종의 신앙의 병리현상이었습니다. 성탄은 12월 25일 하루를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는데 어린 마음에 그렇게 느끼게 되었으니까 그것은 신앙의 병리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12월 25일이 지나면 그렇게도 빨리 성탄에 대한 모든 기억이 사라지게 하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인 있습니다. 첫째는 성탄 자체보다 날을 기념하는 그릇된 생각과 관습 때문이고, 둘째는 12월 25일이 연말연시에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탄은 일종의 기념행사일 뿐이고 신자들에게도 연말연시는 실제로 중요하기 때문에 성탄에 대한 의미는 그렇게도 쉽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대한 낭만적 기억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도 결국 움켜 쥔 모래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듯이 허전함만 남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삶을 비관적으로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대역전의 노래를 부르며 그 감격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대역전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성탄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탄은 이 땅에 평화가 선포되고 천사들의 찬양이 하늘에 울러 퍼지는 대 우주적 사건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마리아처럼 대역전의 찬송을 부르게 하는 성탄은 그 속에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은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이었지만 십자가는 고통과 인내와 희생과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성탄은 언제나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의미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성탄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그 안에 십자가가 포함된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경망스러운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이 주는 이미지가 너무나 부정적이고 저주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또한 공개적으로 기념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의 십자가의 죽음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수치스럽고 저주의 상징이 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초기에 그를 믿고 추종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은 따가운 시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적 반역자의 후손이나 사상범으로 처형된 천인공노할 죄수의 추종자들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요즘 우리처럼 흥겹게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고, 값진 선물을 주고받으며, 성탄 추리를 하고, 칸타타를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허황된 것으로 생각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풀어 설명하고 자신들의 삶으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사실을 입으로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고 삶으로 증명해 보여야 했습니다.

사실 정직하게 말한다면 요즘도 예수님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메시아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바와 같이 구원자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모든 죄와 악과 질병과 가난과 억매임과 갇힘과 두려움에서 인간을 구원할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란 뜻이 그렇다면 그분이 구원의 주로 오셨을 때 세상은 달라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구세주로 오셨다면 그야말로 대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져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오신 이후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그 후나 사람들은 여전히 병에 걸리고, 장애인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며 잘되고, 죄 없는 사람이 고난을 받고, 악한 자들이 형통합니다. 예수님이오시기 전에도 그랬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 2천년이 넘도록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과 악과 불의와 질병에 시달리며 살다가 늙어서 죽기도 하고 사고로 죽기도 하고 병들어 죽기도 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뿐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도 동일합니다. 예수 믿고 병을 고쳤다는 말도 듣고,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이고 체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만족한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체험이 있고 많은 복을 받았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도 체험이 있고 받은 복을 다 헤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하여 여전히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 중에 예수 믿어서 불로장생(덧말:不老長生)한 사람이 없습니다. 베드로와 친구였던 사람이 예수 믿고 복을 받아 죽지 않고 이직가지 살아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것으로 인하여 불만인지 모릅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주일학생들에게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한 아이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천국에 가보셨어요?” “아니, 못 가봤다.” “그러면 천국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아이의 질문을 받은 전도사님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은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천국에 갔는데 그곳이 싫어서 되돌아온 사람이 없거든, 그것이 바로 천국이 좋다는 증거가 아니겠니.” 아이는 그렇구나 싶어서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아이는 전도사님에게 설득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른 설득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고 또 교인들은 그 설명에 설득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표현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원은 한 편 성취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이미 오셨지만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믿지만 장차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기를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지만 인간과 세상과 우주 전체를 온전히구원 하실 그 날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메시아 예언은 초림의 메시아뿐 아니라 재림하실 주님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지금도 인간과 온 우주에 미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죄의 세력과 활동이 허용되고 있어서 사람들이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그 통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다스림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 나라가 어떻게 자라는지, 어떻게 열매 맺는지, 언제 결실할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많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네팔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는 손건영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생화학과 교수였습니다. 명 강의로 소문난 인기 있는 교수가 의과대학교의 교수직을 버리고 더 보람된 일을 하려고 네팔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거의 10년 동안 그는 네팔 사람들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아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최근 그의 고민을 어느 목사님께 토로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사실 요즘 저는 선교사로서의 동력을 잃고 있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엔진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느낌입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작동되지 않는 게 이런 느낌일는지요. 하드를 다시 포맷하고 새로운 operating system을 깔아야 할 것 같은 느낌... 동력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을 제 나름대로, 제 의식 수준에서 분석해 보면,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물론 일상생횔이지만)해도 제가 속한 네팔의 영역은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개선을 바라고 애썼던 의과대학은 오히려 붕괴되어 가는 듯하고, 마음을 쏟았던 지역교회는 담임목사의 타락으로 안에서 곪고 있고, 아내가 혼신을 쏟았던 마을은 사막에 물 한 양동이 부은 정도이고... 더욱 힘들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과 공동체들도 예수의 이름만 부를 뿐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어떻게 된다고 말해야 할지 메시지를 잃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손가락으로 가르쳐 줄 대상이 없습니다. 네팔의 교회가 그렇고, 선교사를 파송한 한국교회도 그렇고, 그들이 기독교 국가라고 믿고 있는 미국과 영국이 세계에서 저지르고 있는 부당한 처사가 그렇고... 그렇게 가다가 저 자신을 보니 저 자신도 예수 믿고 별로 바뀐바가 없군요. 이런 종류의 고민은 이미 선배 선교사들과 목사님들이 하셨고, 하시고 계실 것이 틀림이 없는데 어떻게 그 유산에 접근해서 해결해야 할지 막연합니다. 노력해도 세상과 자신이 변하지 않는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요... 10년을 가까이 선교에 몸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해야 할 자신의 메시지를 잃어버린 느낌... 참으로 부끄럽고 당황스러워 어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쳤는데 지금 와서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갑자기 불분명해지는 느낌... 열심히 산을 올랐는데 어느 날 느낀 바가 ‘이 산이 아닌가봐...' ”

아무도 이분의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과 예수를 전하는 모든 사역자들의 고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는 자세가 정직하고 진지하여 격려를 보내고 싶고 나에게 공병상련처럼 마음을 아리게 하였습니다. 그분도 알고 있겠지만 이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에게도 은폐되었고 어떤 부분은 주님께조차 은폐된 하나님 나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실하고 충성된 사역자가 막막하고 허무하고 지치고 낙심될 때, 화가 나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원통할 때, 좌절하여 포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 때문입니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가끔 세례 요한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또 증거 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였고,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도 들었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와 회개를 외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조국은 여전히 로마의 압제 하에서 허덕이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활동에서도 그분이 메시아라고 확신할 증거를 찾지 못하였을 때 마음에 회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감옥에서 자기의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오신다고 한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 중요한 질문에도 예수님은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식의 하나님 나라의 은폐성 대답을 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스스로 듣고 보고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보고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자라면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말해주어도 믿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메시아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유대의 예언자들과 예수님 당시의 예언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과 온전한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역사적 어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우리들에게는 성취되었습니다. 구원자가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고통과 불안과 염려와 근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아직’입니다. 온전한 주님의 오심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때에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나라에 순종하여 참여하는 자는 그 나라를 체험하고 그 나라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되고 그렇지 않고 의심하고 그 나라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 나라의 복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 돌아갑니다.

또한 그 나라의 능력과 지혜와 복을 체험하고 누리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개인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과 때를 따라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사역자는 방향만 제시하고 원리만 가르쳐 줄 뿐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개인의 책임이고 또 성령께서 하실 일입니다. 성령님은 개인의 무책임한 자세를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책임을 지게 하시면서도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또한 반드시 이루게 하십니다.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겸손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임한 성탄의 복이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성탄을 믿고 바라는 자에게만 성탄이 의미가 있습니다.

성탄의 의미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더 어렵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려워도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의 수준과 형편을 아시기 때문에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자세이고 마음이고 무엇보다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믿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주님의 오심과 함께 임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누구든지 대역전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임금이신 주님의 뜻을 순종하므로 받으며 깊이 묵상하고 역사적 책임을 잘 감당하면 성령께서 각자가 책임져야 할 일들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각자의 책임은 다릅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 책임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소외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태계를 보호하는 일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잘못된 법과 정치적인 문제를 개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현숙한 아내가 되는 것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실한 믿음의 가장이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세세한 것을 일일이 다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역사상에 오신 예수님, 재림 때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의미와 하나님의 나라의 충만한 복이 모든 믿는 이들의 삶의 현장에 더욱 풍성하게 임하게 되기를 바라고 또한 모든 교회가 연말에 한 해를 뒤돌아보는 것보다 성탄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 더 소중하고 복된 일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빌 2:8; 요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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