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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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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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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류학자가 밀림에서 앵무새 새끼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미 앵무새가 조류학자의 집까지 새끼를 좇아왔습니다. 어미 앵무새는 조롱 안에 갇혀 있는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조류학자는 편하게 관찰만 하면 되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안 되어 새끼 앵무새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조사를 해보았더니 새끼 앵무새의 위 속에 독이 있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어미가 새끼에게 독이 든 열매를 갔다 먹였습求? 자유를 빼앗기고 조롱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어미 앵무새가 독이 있는 열매를 새끼에게 먹여 죽게 했다는 조류학자의 설명입니다.

설마 어미 앵무새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까 의아하기도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경우를 TV의 Animal Planet이라는 프로를 통해 여러 번 보았습니다. 사자는 부상당한 동료가 하이에나에게 먹힐 지경이 되자 숨통을 물어 죽여주었고, 물소도 사자에게 부상당한 동료를 구해주려고 애를 쓰다가 부상이 심하여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자 죽여주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사람도 전장에서 부상이 심하여 살 가망이 없는 동료를 죽여주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자유가 그렇게도 소중하기에 사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바꿀 만큼 그렇게 소중한 자유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950년대 말쯤에 서울에서 십자매 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십자매를 키우면 돈을 번다고 해서 너도 나도 십자매를 키웠습니다. 어떤 여전도사님도 돈을 번다고 하니까 혼자 사는 방안에서 십자매를 키웠습니다. 번식력이 좋아 십자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을 즈음에 십자매의 값이 요즘 증시처럼 곤두박질쳤습니다. 여전도사님은 새장을 열고 십자매를 날려 보냈습니다. 돈이 될 줄로 알고 십자매를 키웠지만 낭패를 당하자 좋은 일하는 마음으로 십자매에게 새장 문을 열어 어디로든지 마음대로 날아가도록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새장을 떠난 십자매가 집 주위를 한 바퀴 날다가 다시 새장으로 돌아 왔습니다. 십자매는 넓은 세상에서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새장 속에서만 살도록 노예화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캐나다 빅토리아 대학의 교수인 K. R. Bradley 교수가 쓴 “로마 제국의 노예와 주인”(Slaves and Masters in Roman Empire)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로마의 문화를 연구하여 내린 결론은 로마의 문화는 곧 “노예와 주인의 문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다고 합니다. 로마에 있는 엄청난 문화 유적들은 거의가 노예들이 만든 것입니다. 노예가 설계하고 노예가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노예들이 죽었습니다. 따라서 그 많은 문화 유적은 그 노예들의 피와 땀과 희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가 이룩한 업적은 짓밟힌 노예들의 흔적인 셈입니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오직 명령에 따른 충성과 복종뿐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 그런데 당나귀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다.”고 하였습니다. 영화나 그림에서는 보기가 민망하여 노예들에게 간단하게 치부를 가리는 옷을 입히지만 실제로 노예에게는 옷이나 신발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노예들은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듣고 순종하기만 하여 말할 기회가 없었고 또 말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노예들의 희생에 의해서 로마의 화려한 문명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을 잘 안 듣는 노예는 고문하여 길들이고 반항하는 노예는 일벌백계로 길거리에 십자가를 세우고 못 박아 죽였습니다. 노예는 지식도, 건강도, 정조도, 모든 것이 다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노예들에게도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적 차원에서 주어지는 해방이 아니라 보다 더 철저한 충성과 복종을 얻어내기 위해 이루어진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좋은 주인은 노예에게 자유와 유산을 물려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소망을 바라보며 노예들은 더욱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수 십 년, 아니 대를 이어 노예로 살아 길들여진 그들은 해방이 되어도 자립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충성과 복종만 해왔기에 명령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해방 된 노예들 가운데는 옛 주인에게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노예해방이 선포된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올해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 된지 62년이 되는 해입니다. 해방 된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우리가 참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해방된 노예들처럼 자유를 누릴 수 없는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금의 정치계와 기독교계의 극한 대립과 사회적 양극화, 극한 반일과 반공, 지나친 진보, 이 모두가 해방이 되었지만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노예성 질환의 장애만 같아 안타깝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회당에 들어가 두루마리로 된 성경 이사야의 예언 부분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하시고 두루마리 성경을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회당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모인 자들에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고, 감옥에 갇힌 자도 많고, 병든 사람도 부지기수이고, 가난과 억압과 불안과 공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예언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복음이 약속하는 해방과 자유의 초석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직은 가시화 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것으로, 혹은 성취된 것으로 믿고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곧 해방과 자유를 실현하는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이고 해방과 자유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해방과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복음의 해방과 자유가 이웃과 이 사회 안에 구체화할 수 있도록 싸우면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사상, 이념, 대립, 경쟁, 경제, 정치에 대하여 자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해 즉 영적 희년이 도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16-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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