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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종교개혁(改革), 그 시금석(試金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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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2-12-06

본문

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고, 궤도를 벗어나 끝없이 추락하는 행성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2000여 년 전, 아기 예수가 오시기 전의 그때 그 시대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지금 현 세상이나 캄캄한 암흑기에 진입한 것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목소리 드높아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퇴색되어 그 빛을 잃고 캄캄하여진 지 이미 오래다.
 
사람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BC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 (필자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히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주님께서 두 번 오시기 전에 일어날 한 징조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으라면, 무엇보다도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현대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맘몬 신에게 절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십일조가 무슨 축복의 바로미터라도 되는 듯, 앞에서 풍월치는 그들의 욕심은 바벨탑만큼이나 높아가더니 결국 ‘십일조 폐지 운동이 곧 개혁이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오늘 이 지경까지 몰고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인가? 절제되지 못한 명예욕, 성욕, 인간의 본능으로 유혹하는 사단의 덫에 걸려서 사정없이 넘어진 목회자들이 홍수처럼 쓸려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뒤흔들어 댄다. 또한 근세에 일어난 ‘자유주의 사상’ (자유주의 사상: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고,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도 이성에 맞지 않는다면 거부하는 사상이다.)

다음은, 생의 바퀴를 돌리며 고달픈 삶을 영위하느라고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여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 헛점을 노려서 깊이 파고 드는 이단사설이 고달프고 굳세지 못한 이들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어리석은 영혼을 유혹하고 사냥질 해간다.

이렇게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삯군 목회자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어느 성도님은 몇몇 자신을 따르는 성도들을 이끌고 교회를 뛰쳐나와 ‘평신도 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 자신이 지도자, 목자가 되어 어두운 개신교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외친다. 교계 지도자들이, 신학교가, 신학생이 모두 다 변질되었으니, 변질되지 않은 내가 어지러운 기성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토는 잘못된 개신교의 시스템(system)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우는 새로운 물결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지만, 놀랍게도, 현 교계의 지도자들에게 상처받은 수많은 지성인 성도들의 동의를 얻는 것 같고, 이 운동은 꽤 설득력을 지닌 듯, 여기저기 활화산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현실이 그러한 것을…

변질하여가는 현 교계의 문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며, 목회자, 성도들의 들어나는 비리는 암덩이처럼 퍼지고 누룩처럼 번져 모든 교계를 잠식시킬 것만 같은데, 말씀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대안이라고 여기 저기서 내어놓는 안건들이란 미흡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교계의 분열만 획책하기 딱 알맞은, 아주 조잡한 것들 뿐이다.

또 자유주의, 인본주의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교계가 재앙을 만나게 된 원흉을 “십일조”에 두고 “개혁’이란 미명하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거나 혹은 난도질하며 폄훼하기도 한다. 이대로 더 나가다가는 우리 기독교의 밝은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말 어떤 큰 재앙이 몰아닥쳐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고 두려운 현실이다.
"기독교 이대로 가다가는 안된다. 기독교계는 개혁되어야 한다”, 의식 있는 성도들의 거센 목소리가 질풍처럼, 성난 물결, 우는 파도소리처럼 이곳저곳에서 거세게 불어친다. 다 옳은 말이다, 동의한다. 아무렴, 우리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안되고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며 함께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는 교계 지도자들의 자질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다음은 내가 개혁하자. 너와 나 우리 모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자.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 방법론이 문제다.

개혁(改革, reformation)을 먼저 알아야
“제도나 기구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침” 이것이 개혁의 사전적 의미이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 잘못된 종교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에서 개혁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은 무엇이며 우리 기독교 안에서 잘못된 제도나 기구는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 주먹 구구식의 개혁, 말만의 개혁은 분란만 일으킬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껏 우리가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어오던 성경, 우리 신앙생활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옷을 재단하는 재단사는 옷을 재단하기 전, 먼저 ‘패턴’이 있어야 하고, 건축가는 빌딩을 짓기 전 ‘조감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세상 물질 세계에서도 무엇인가 하려고 하면 그에 합당한 ‘패턴’이나 ‘조감도 (architecture)’가 필요하다. 하물며 사람의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자고 호소하는데 그만한 ‘조감도’ 나 ‘잣대(Cannon)’가 없이 개혁하자고 목소리만 높인다고 되겠는가? 이런 말이다.

게다가 완전무결하다고 할만한 ‘척도’요 ‘잣대’(Cannon)이며, 인생이 나가야 할 여정의 지도(map)며, ‘조감도(architecture)를 훼손시키고서야 어떻게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일까? 변질과 개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현 교계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제도, 시스템(system)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개혁교회는 거의 완벽한 수준이다. 우리 개혁교는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무수한 믿음의 선조들의 피흘린 발자취 위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면서 정과 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이 멋진 교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기를 두고 흘러넘치는 아름답과 완벽한 생명을 소유한, 자랑스런 종교라면 종교인 것이다. (실상,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산 생명 그 자체가 아니던가!)

성도의 삶이 변화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지, 그 맛이 변질하면 안되는 것이건만, 성도의 삶이, 종교지도자의 신앙인격이 타락하고 변질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몇 구절을 변개시키고 잘라낸다고 해서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변화다.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개혁이다!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야 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누가(who)?= 내가. 무엇이(what)? = 나의 삶, 나의 인성이, 어떻게(how)? =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러기에, 성도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불리우지 않았던가? 프론티어(the frontier), 앞서가는 개척자 선구자라고 불리우지 않던가? 우리는 앞서가는 개척자의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으로 변화된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삶의 표증이며 열매다. 열매없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울 것 뿐이다. 교계 지도자들, 성도라 허울뿐인 이름을 지닌 변질한 우리들의 추한 모습, 무서운 일이다. 죄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탓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종교 개혁, 그 시금석(試金石)
“1517년 어느 쌀쌀한 가을날 오후, 성경을 연구하던 어떤 작달막한 수도사가 교회의 문 앞(지역 게시판)에 학문적인 토론을 위한 일련의 논제를 못으로 박아 내걸었습니다. 그는 장차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알려질 이 사건을 널리 퍼트릴 사람들이 학자가 아닌 일반 대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이 수도사(신부)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입니다.

루터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중요한 문제는 면죄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판매했던 당시 로마 교회의 모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기독교권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었던 로마 베드로 성당의 준공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교황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용서를 성당 완공을 위한 건축 분담금과 맞바꿔 버렸습니다. 교황의 통치 아래 있던 사람들 가운데 도미니칸 설교자였던 테첼(John Tezel, 1455-1519)이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가장 교활했습니다. 심지어 테첼이 여행 중에 불렀던 사중주곡조차도, '동전이 금고 안에서 원을 그리며 땡그랑 소리낼 때, 한 영혼이 연옥으로 부터 튕겨져 나온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는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자신의 취향대로 '동전이 금고 안에서 소리를 낼 때, 교황은 더욱 부유해진다' 등과 같은 유사한 곡들을 남겼습니다.- JuNick님의 댓글 중

루터가 종교를 개혁했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안다. 루터의 개혁은 완벽하리만큼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일게다. 그렇다면 그 루터가 외친 소리를 한 번 들어보자. 그는 개혁이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루터의 종교 개혁 5대 원칙(原則)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다.
3) 오직 은총(Sola Gratia)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구속의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다음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特徵)이다. 그 또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

1)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2) 성경중심(Bible-centered)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3) 교회중심(Church-centered)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개혁주의마을

개혁주의의 (튤립)이라고도 하는 5대 교리 역시 하나님 중심 사상을 기본 원리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특정 단체나 교리를 지지하자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란 무엇인가? 개혁을 바로 알자는 취지에서 쓰는 글이기에, 칼빈의 5대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튤립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우리가 개혁을 부르짖기 전, 개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하고 어떤 부분을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언젠가도 한 번 말한 기억이 있지만, 재론하건데, 어떤 단체건 개인이건 뛰어 넘어야만 할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이 있고, 또 인간이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어떤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란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으로 정해진 틀이 어렵기는 해도, 모두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짜여진 것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까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은 다른 그 누구의 것보다 높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사회가, 교회가, 성도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다. 그럼에도, 정작 많은 종교지도자가 이런 우리 모두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인간이라면 결코 넘어서 안 될 도덕적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외눈 하나 까딱 않고 넘어서기도 잘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란 듯 당당하기도 하다. 들켜도 회개함 없이 “나는 용서함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라.” 가히 협박성(?) 망발을 일삼는 것을 보면서 그 파렴치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도의 신앙양심마저 마비된 것인가, 화인맞은 것인가? 더욱 큰 문제는 오늘날 일부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그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교만이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수많은 목사님이 자신의 인기와 유익을 위해서라면 성경 말씀을 뛰어넘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기는 세상이 된 것 같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은 기록한 말씀을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 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고전 4: 6 중반 절) 바울 사도가 간곡히 권하고 있다. 

우리(성도)가 개혁을 하되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개혁해야 한다. 인간 자신이, 내가 개혁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거나 가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생의 잣대가 되고, 천국가는 길의 약도가 되며, 안내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훼손시키고서야 어떤 개혁을 하고자 한들 그 개혁이 올바를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불변의 진리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을 가감하려고 시도하지 마라. 십일조 낼 형편이나 믿음이 되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된다. 구원과 십일조 상관관계 없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변질시키거나 빼거나 더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정한 개혁은 내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찌들리고 파묻혀서 진리를 외면하고 있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개혁의 시금석을 저버리고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인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의 시금석이 되는 성경 말씀이 우리 손에 있음에도 그 성경을 입맛대로 풀이하거나 가감하는 자유주의신학으로 말씀을 호도하는 것이 개혁이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개혁가들을 위한 사랑의 권면:
1. 십일조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2. 십일조가 축복의 바로미터라고 떠벌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3. 내게 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바꾸자고 하여 말씀을 가감(加減)하거나 재단하여 잘라내는 자유주의 신학은 더욱 위험하다. 결코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더 큰 재앙으로 그대를 이끄리니....
 
지구가 궤도를 벗어날 수 없고, 양복 재단사가 '패턴'없이 좋은 옷을 만들 수 없고, 성도에게 훼손된 말씀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쓸모 없는 휴지로 만들고서야 어찌 그분의 낯을 뵈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 그 흘린 피의 발자취 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근간이요, 우리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자리는 더욱 위헙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성도가 진정한 개혁을 논할 수 있는 자격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힘들지라도 성경 말씀에 내가 순종하며,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개혁이요, 성경이 개혁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진리는 사수되어야 한다!!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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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람데오 
2012-12-06 06:53
 70.xxx.174
  글 잘 읽었습니다.

어설프게 부르짖는 교회개혁에 대한 하나의 지침서라 할 수 있고,
성경의 십일조를 폐지하라는 자들에게 주는 하나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고
 진짜 "교회개혁의 지침서"라 할만 합니다. 

교회와 삶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전혀 지지 않고, 행동은 전혀 없이, 입으로만 나불내는 안티성교회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이 반다시 한번은 이 글을 읽고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시원^ 시원한~~  글을 마니 마니 써 주시옵기를 당부하옵니다.
님의 글을 copy 하여 우리교회의 교인들에게도 널리 널리 파도처럼 번져나가게 하겠고,
저 쪽 교회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알리겠습니당.

God Bless you.....

thomas 
2012-12-15 11:58
 69.xxx.113
 김성훈님께 영감 받고 별똥별님의 재가 아래, 종교개혁과 연관하여 정치/경제/문화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Hilaire Belloc이 쓴 How the Reformation happened라는 책이 있습니다. 프랑스인으로서 영국에서 활약한 카톨릭 신자인데, 루터/칼빈의 종교개혁을 경제적 이권추구에 따른 권력재편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의 근본이 오직 은혜/믿음...등으로 대변되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세 로마교황에 속한 토지와 무역을 둘러싼 경제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정치투쟁이었다는 논지입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카톨릭을 포함한 서구의 지성인들 사이에 가장 설득력 있는 反개신교 논증가로서 추앙받는 사람입니다. 소위 "개혁"이라며 십일조가 어쩌구 칼빈/알미니안이 저쩌구 떠드는 천박한 주장과는 차원이 다른 사실/논리를 제시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Belloc이 갑자기 떠오른건 어제 한국대통령선거 윤여준 찬조연설자 동영상을 본 때문인 듯 합니다. 우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 자랑스런 한국민임이 분명한데, 그분은 민주화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혜택만을 누린걸 사죄합니다. 그렇지만 산업화/민주화 와중에 생긴 부작용/부조리를 근본적으로 구조조정하고 개혁해야할 마지막 기회임도 자각하면서 현실적인 선택을 권유하는거 같았습니다. 부드럽고 진솔하게 펼치는 그분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고 진실된 보수주의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Belloc은 이단에 대해서도 책을 썼습니다.
http://www.cs.cmu.edu/~spok/metabook/heresies.html

 The Great Heresies라는 책인데, 거기 이슬람 창시자인 모하메드에 관한 얘기도 있고 종교개혁에 대한 장도 있습니다.

이사람의 논리는 앞에 언급한 책과 동일합니다. 요즘 소위 범신론/다원론적인 통합논의 근저에 흐르는 논리와 흡사합니다. 이슬람이 왜 생겨서 발흥했는가 그 원인을 부패한 암흑시대 기독교 정권들에서 찾는게 주류 역사가들의 말입니다. 그때 부패란 주로 경제활동을 둘러싼 권력투쟁과 관련 있습니다. 그러니 Belloc의 논리는 잘 맞아떨어지겠지요?

Belloc은 프랑스 사람입니다. 역사가들은 만일 칼빈과 동문이었던 예수회 창시자 로욜라가 아니었으면 스페인 외에는 전유럽이 개혁교회에 의해 장악되었을거라 하지요?

스페인은 이슬람제국에 오랫동안 지배를 받았습니다. Bloch라는 사회주의 역사가는 프랑스에 유혈혁명이 많았지만  영국에는 왕정이 유지되며 개혁에 따른 진보가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에 농민이 많아서 부모가 농사지으러 집비운 사이 자식을 노인이 교육했기때문에 프랑스사회가 보수적으로 되었고, 따라서 이 아그들에게 버럭하고 욱하는 성질이 길러져서 청년/성인이 된 후에 억눌릴때 폭탄같이 터졌다...뭐 그랬다는 걸로 기억합니다.ㅎㅎ

Belloc은 프랑스인 카톨릭으로 영국에 살면서 종교개혁을 경제논리로밖에 못본거죠? 오직 성경/은총/믿음 이라는 성령님의 조명 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義가 없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경제생활을 알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무당 영성을 "성령"으로 착각하며, 이세상의 물질"번영"이 "삼박자구원"이라고 왜곡하는 비성서적인 기독교 종교인들이 한국인 중에 특히 많습니다. 차라리 Belloc처럼 합리적인 경제인으로 사는게 낫습니다.

한민족도 독립국가라 할 수 있는 면도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중국의 지배를 받는 듯한 정치구조를 가졌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당하면서부터는 <삶의 가치>가 우리와 이질적인 일본魂에 의해 민족정기도 파멸되어 갔습니다. 일본군국주의 첨병이었던 일제 군관으로서 제나라의 독립군을 잡겠다고 혈서쓰고 천황에게 맹세했다는 박정희씨 딸이 대통령 후보로 설친다는건 암흑시대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의 종으로 돌려보내라고 모세에게 땡깡쓰는 짓보다 더 악한 일입니다.

왜 오직 그리스도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의 죄와 하나님의 의가 만천하에 명명백백히 드러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출발점은 회개 아닙니까? 예전에 나쁜 짓을 했더라도 그걸 반성하고 참회하는 고백이 예수믿는 근본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불법으로 후려다가 "죄"를 덮어씌우려 고문을 일삼고, 뇌물과 정경유착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재물을 도적질한 자들이 작물 대물림하며 참회하지 않으면서 계속 권력을 휘두르게 할수 없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이런 양심에 화인맞은 자들의 꾀를 좇고 같은 자리에 앉고 같은 길에 서서 훤화하는 일처럼 망할 행실이 없습니다.

Belloc의 책에는 칼빈에 대한 장이 있습니다. 칼빈은 그시대의 대단한 진보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니 Belloc의 구미에 당기겠죠? 그런데 칼빈은 이세상에 진보적으로 살면서도 이세상에 속하지 않고 물들지 아니하려고 노력한 주님의 종입니다. Belloc은 그게 경제적인 논리로 이해되고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칼빈의 신학적 동기를 비하하려 했습니다.

어제 코네티컷의 한 초등학교에서 유치원생 20여명을 살해한 "미친"자가 있었지요? 후기 구조주의의 스타 철학가인 푸코가 쓴 광기의 역사를 보면 칼빈의 종교개혁 얘기가 나옵니다.

원래 중세 카톨릭교회의 "관상기도"적 수도원 "영성" 종교행태에는 지금으로 치면 몸을 떨고 이상한 소리("방언")지르며 신들린 듯한 몸짓을 하면서 "직통계시"받았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높이 쳐줬답니다.

종교개혁 이후 이들의 비성서적 관상-영성 종교행태를 금지시키며 이런 정신분열자들을 "미친"사람이라고 단체수용한게 일반 감옥의 시작이랍니다. 그러니 푸코같은 포스트모더니즘/deconstruction 선구자에게는 그것도 하나의 <부조리>이지요? 푸코는 "방언" 같은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심리/정신 현상을 높게 평가합니다.

하영조 목사가 예배라며 도입하여 한국교회에 유행시킨 "연예的 영성 타령"은 빈야드운동이 원조이죠? IHOP이니 신사도니 하는 날라리 양아치들에게서 배운겁니다. 그때 프랑스인 푸코가 켈리포니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영성과 야릇한 性을 표방하며 각종 향정신작용제에 의한 뿅가기를 즐겼습니다. 연기피우고 무드잡고 나른하게 아른거리는 영성을 무당굿에 접목한게 한국인교회의 각종 종교형태 아니겠습니까?

얘기가 삼천포로 빠진듯 하지만, 우쨋든...메디찌 가문 중에 20살도 안돼 추기경한 놈이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10세입니다.

아래 그 메디찌 유튜브 밑에 보니까 2년전부터 PBS에서 방영되는 영국 드라마 Downton Abbey 선전이 있군요.
http://www.youtube.com/show/downtonabbey
이게 지난 수년來 제가 본 영화/드라마 중에 가장 감명깊었던 드라마입니다. 영국 귀족들과 그들의 城에서 일하는 시종들과의 생활 얘긴데, 귀족들과 시종들이 어떻게 상호존경하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인간으로서 사는가...하는걸 잘 보여주어서 정말 재밌었습니다.

영국은 헨리 8세가 이혼/결혼 많이 할라꼬 카톨릭과 손을 끊었다고 하죠?^^ 딸 중 하나인 개혁신앙敎人 엘리자베스 여왕의 얘기도 여간 흥미로운게 아닙니다.

건강하고 유익한 성탄과 새해를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교제 
토마스님의 글의 주제,취지는 글의 중심에 명백하게
두어져 앞 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오직 그리스도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의 죄와
하나님의 의가 만천하에 명명백백히 드러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출발점은 회개 아닙니까?
예전에 나쁜 짓을 했더라도 그걸 반성하고 참회하는
고백이 예수믿는 근본입니다.
 12/29 17:57
 24.xxx.86 
 교제 
무고한 사람을 불법으로 후려다가 "죄"를 덮어
씌우려 고문을 일삼고, 뇌물과 정경유착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재물을 도적질한 자들이
작물 대물림하며 참회하지 않으면서 계속 권력을
휘두르게 할수 없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이 이런
양심에 화인맞은 자들의 꾀를 좇고 같은 자리에
앉고 같은 길에 서서 훤화하는 일처럼 망할 행실이
없습니다.]
 12/29 17:59
 24.xxx.86
 
thomas
2012-12-13 12:41
 69.xxx.113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어 걸었을 때 중세교회의 부패/악이 극에 달했습니다. 한국의 조용기목사 일족이 교회 십일조를 유용한 혐의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는 뉴스는 현대판 교회부패의 한 단편이겠죠.

요즘 한국에는 선거 굿판이 벌어져서 현대 한국사회 최악의 부패정권 원조 일가를 좇아 대대로 사악한 정권에 빌붙어 그들의 굿판에 올렸던 우상제물, 돈(콩)고물 줏어먹으며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등쳐먹어서 자기배 불린 저질인간들의 최후 발악 굿판이 진행 중입니다. 

이 악하고 오만한 자들은 그걸 "형통"이라며 "번영" "삼박자구원" 굿판에 머리를 조아리고 몸팔고 spirit팔아 祭器를 떨고 뒤로자빠지며 power랍시고 휘둘고 다니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열받게 할 뻔 했다는게 예나 지금이나 사실 아니겠습니까?^^

개혁을 가로막으려는 부패한 세력은 동서고금(한국-유럽/중세-현대) 막론하고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가 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편 73장)

루터를 정죄했던 교황 레오 10세는 중세의 아주 유명한 Medici 가문 출신입니다. Medici 가문은 중세 르네상스(문예부흥)에 대단한 공헌을 하는데, 미켈란젤로 다빈치 갈릴레오 등을 비롯한 최고의 예술가/과학자들을 후원했습니다.

여기 PBS에서 만든 메디찌 가문에 관한 4부작은 재밌고 참으로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게 1편이니 2~4편까지 꼭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channel/SW7JPZboRLQjc

거기 처음에 덩치 큰 아그가 나중에 레오 10세 교황이 되는 자입니다. 그땐 20세도 안된 놈을 정략적으로 추기경 시켜주고 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교권을 세습하고, 세금 떼먹고 무위도식 하는 자들 주변에 얼쩡거리며 콩고물 줏어먹고 사는 인간들이 많은거 같습니다.
 
  잠긴동산
2012-12-13 08:03
 67.xxx.142
 @왜 신자가 십일조 - 자신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지역 교회에 드리는 것 - 를 드리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기독교인이 십분의 일보다 적게 드리면서도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 것이 보장될 수 있습니까?

십일조, 혹은 10 퍼센트, 뿐만 아니라 나머지 90 퍼센트도 하나님께 속합니다. 하나님은 90 퍼센트에 대해서 우리를 청지기로 만드셨으며, 그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그저 우리들이 즐겨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신자들은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이유들 가운데 몇 가지를 들었거나 또는 사용했을 수 있습니다.
 (1) 십일조는 구약 성경의 시행이다. (2) 하나님은 가정을 위한 음식, 의복, 그리고 거할 처소를 마련할 충분한 돈이 없을 때 그에게서 십일조를 기대하지 않는다. (3) 십일조는 우리들이 부채가 없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보장을 하지 않는다. (4)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나의 헌금이 순전히 의무에 의해서 좌우될 때에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보시며 나의 부정직함을 심판하실 것이다.

구약 성경의 십일조에 대한 계명은 신약의 은혜의 언약에 의해 말살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십일조의 원리를 끝내려 하셨다면, 더 이상 십일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언급하는 구체적인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발견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17)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23에서 십일조에 관하여 다시 언급했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그들이 십일조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대신에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십일조를 폐지하는 대신에 예수님은 십일조가 신자의 믿음의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봉금이 기본 청구서를 완전히 지불할 만큼 넉넉하지 못할 때 성실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한 훈련입니다. 십일조가 우리의 빡빡한 예산에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이 이해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인간의 논리와 이성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들의 방법과 다르며, 하나님은 우리들의 예산을 맞추는 것 이상을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보라]” (말라기 3:10).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그러나 이러한 축복을 받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물론 90 퍼센트에 대한 부주의한 청지기 직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놓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축복의 수문(水門)은 언제나 돈과 연관된 것만은 아닌데, 왜냐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가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남아 돌아가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도 휠씬 더한 만족을 줄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와 우양의**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명기 28:1-4).

십일조는 보장이나 혹은 연장된 보증이 아닙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합리적인 부채를 갖고 있습니다. 주일에 첫 번째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금요일에 빚이 없을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열 것을 약속하시지만 (말라기 3:10), 그러나 그의 축복은 하나님의 완전한 시간에 옵니다. 우리들은 돈으로 하나님을 매수할 수 없으며, 즉시 몇 갑절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 전에 우리들은 십일조에 대한 우리들의 행위가 불변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와 하나님에게 증명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그 때에도, 하나님의 축복은 금전적으로 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그것은 돈보다도 위험으로부터 우리들의 자녀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시는 것, 혹은 다툼이 없는 가정을 갖는 것과 같은, 휠씬 더 값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축복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축복은 단순히 가정과 소유물을 유지하는 면으로 혹은 공급 물자를 당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늘려서 쓸 수 있는 면으로 베풀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물을 갚아 주시고 증가시키는 것에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당신은 의무적으로 내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즐겨 내는 자는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 . . 즐겨 내는 자를 사랑” (고린도후서 9:7) 하십니다. 바울이 즐겨내는 마음에 대해서 언급한 이 말씀은 십일조 이상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목적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으로 진정으로 생각하는 신자들은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데 있어서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 [십일조 이상으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후서 9:6-9)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을 하시며, 우리들의 유익함을 위하여 우리들이 우리들의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올 때에 마치 우리들이 휴가를 가려고 하는 것이나 혹은 심지어 공공 요금을 내려고 할 때와 같이 즐거운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그에게 기쁨으로 순종하기를 즐겨하는 마음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잠긴동산 
십일조는 돈을 모으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약속에 대한 영적 훈련 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축복의 기회”입니다. 목사님이 십일조와 헌금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 “아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십일조와 헌금이 풍부한 축복을 주시는 기회를 열기 때문에 천국은 기뻐합니다. 십일조의 사용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지도자의 책임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개 교회의 지도자들이 십일조와 헌금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것은 여덟 번째 질문에서 다룰 것입니다.  12/13 08:04
 67.xxx.142
 
 잠긴동산  관심사:
어떤 사람들은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적절하게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십일조의 훈련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는 것)의 말씀이 십일조 이상의 헌금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십일조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재정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원망하고 십일조를 드리기를 거절합니다.
새 신자들과 어린이들에게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초기에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야 하는 것을 성경이 요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가르쳐야만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매월 용돈을 주기 시작하면서 바로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했습니다. 12/13 08:06
 67.xxx.142
 
 잠긴동산  그 용돈은 겨우 2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은 각각 네 개의 봉투를 받았습니다.
첫 번째 봉투는 “십일조”라고 쓰여 있었으며, 10퍼센트 혹은 20센트가 그 봉투에 넣어졌습니다.
두번 째 봉투는 “선교”라고 쓰여 있었으며, 5퍼센트 혹은 10센트를 넣어졌습니다.
세번 째 봉투는 “저축”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15 퍼센트 (30 센트)가 할당되었습니다.
네번 째 봉투는 자녀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서70 퍼센트 (1불 40센트)가 “용돈”으로 주어졌습니다.
.
평생 지속될 습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얼마나 훌륭한 방법인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그 용돈은 늘어났지만,
.
그러나 십일조와 헌금의 퍼센트는 항상 같았습니다.
 12/13 08:07
 67.xxx.142
순례자 
2012-12-09 07:55
 64.xxx.188
  원글님의 글도 좋구요, 또 하나의 좋은 글이 저기 아래에 있어서 여기에 올려 봅니다. peter님의 글인데 함께 읽고 격려해주셨으면 하구요. 오늘 주일인데
 모두들 행복하셔요 *_*;:

-- peter님의 글 --

저는 십계명과 십일조를 사랑합니다.

첫째, 십계명을 좋아하는 이유

 십계명 1조부터 4조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세를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는가를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십계명 5조부터 10조까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성, 즉 이웃사랑이 어떠해야함을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이처럼 십계명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들어있고,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기에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십계명을 사랑합니다.


둘째, 십일조를 좋아하는 이유

 십일조 역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기에 아주 좋아합니다.
십일조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인정해 드리는 요소가 들어있고, 동시에 이웃을 도우며 살라는 이웃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들어있기에 저는 십일조를 좋아하며 사랑합니다.

십계명을 볼 때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생각해볼 수가 있어 좋고,
십일조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생각할 수 있기에
 저는 십계명과 십일조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고 주의 종들을 돌보라는 의미가 있기에 십일조를 좋아합니다.

십계명으로 구원 받지 못하고, 십일조로 구원받지 못하지만, 그러한 두(2) 가지 요소가 있기에 십계명과 십일조를 버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십일조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나쁩니다.
십일조를 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나쁩니다.
십일조를 안하면 강도요 도둑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도 나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인 십일조를 받아 도둑질 하고 나쁜데 사용하고
 하나님의 십일조 정신에 어긋나게 사용하는 사람이 나쁘고 문제인 것이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올려드리는 봉헌 자체는 절대로 나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일조 잘못 사용하는 교회나 목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살아계십니다.

십일조 해도 좋고, 안해도 좋습니다. 부담이 된다면 조금만 해도 됩니다.
하고 싶은 만큼만 해도 됩니다.
십일조의 그 의미와 정신을 알면서 올려드리면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담고 있기에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하고픈 분들은 자유롭게, 자기분수껏, 부담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쳤던 십일조,
야곱이 바쳤던 십일조,
이웃사랑을 위한 하나님의 십일조
 하나님의교회와 주의종들을 돕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십일조,

십일조에는 이처럼 중요한 의미들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십일조란 봉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만물이 주께로 나왔고,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만물이 주께로 돌아가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

교회의 십일조 개혁이란 십일조를 도둑질하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들을 고치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계몽하고 회개시켜 바른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을 빌미로 십일조 자체를 없애려는 우는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doremi 
2012-12-08 15:41
 64.xxx.52
 beautiful sentence
 looks like Martin Luther :))~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
 
  JuNick 
2012-12-07 22:11
 69.xxx.95
 만일 당신이 요즈음 한국교계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신물이 난 사람이라면, 종교개혁의 세계로 여행해야할 필요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세계로 가는 여행은 호눌룰루로 가는 비행기 여행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흔히 있는 업무상 출장이겠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달콤한 신혼여행이기도 할 것입니다. 별똥별님이 위의 글로 종교개혁 여행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시 유럽을 뒤흔들고 교회와 사회를 혼란의 소용돌이로 내몰았던 혁명적인 종교개혁 사상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여러가지 것들이 포함됩니다.

슬로건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관점을 빨리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실제로 다른 사람의 차에 붙어 있는 광고 스티커를 읽기만 해도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역시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을 나타내는 나름대로의 슬로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별똥별님이 제시하여 주신 것처럼 종교개혁의 첫번째 슬로건은 '오직 성경' 이라는 의미의 sola scriptura 입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슬로건은 일반 성도들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로 성경을 사용할 수 있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성도들이 다른 교회 구성원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순종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긴 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만일 일반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타당하게 분별하는' 가르침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익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신앙과 실천의 문제에 대해 성경을 기록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교회 사이의 기본적 입장 차이는 성경이 교회를 설립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가 성경을 기록한 것인지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몸소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셨고, 사람들을 부르셨으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항상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언제나 초월적이고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수정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님, 반갑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생각하였던 언약의 개념을 요약 설명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똥별님, 종교개혁을 계승한 사람들은 조그만 견해 차이로 서로 배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여름 동안 뜸하였던 많은 분들을 다시 보게되어 좋습니다. :D
 
 
교제
2012-12-07 01:51
 24.xxx.86
 이제서야 시간이 나서 사모님의 역량이 느껴지는
 이 글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개혁의 시작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우리 자신으로부터이고 그 방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과 

인본적인 개혁이 아닌 하나님 중심,성경중심,
교회 중심의 정신을 승계한 개혁이 필요함을
 알리는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쟁이 
2012-12-06 22:23
 68.xxx.254
 오늘날 교회를 떠나고 십일조가 거부되는 것은
 교회가 교회가 되지 못 하였고
 믿음이 믿음이 되지 못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드릴 것이며
 이러한 헛되고 소모적인 논쟁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 때보다
 한 시라도 바삐 복음이 땅끝까지
 주님의 보혈이, 생명이 전해져야 할
 마지막 때인 오늘날 더욱 더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들이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종교개혁, 그 시금석"이라 제목을 붙이셨는데
 이상한 해석과 궤술과 세상풍조의 바람을 끌고 들어와
 이 시금석을 뻬버리려고 애쓰는 어리석은 자들이 너무나 많은 이 때에
 별똥별님의 시의적절한 이 글이 더욱 빛이 납니다.

     
  초생달 
2012-12-06 22:12
 211.xxx.23
 별똥별님께서말씀하신 오늘의 이 칼럼 높이 평가합니다.
꾀뚜러보시는 지금의 교계 는 한심하다못해 유감스럽고도 위험한듯합니다마는
[성부 성자 성령]의 진실은  살아있는것이아닌지요,또 슬며시 사단의 손이
 님의 위대한 이 글에게 손을 뻗어오는듯 랍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자들의 기은 멸망이아니겠씁니까/

곧 하나님이 오실것을 믿는자들은 별똥별님과 동행하고있씁니다.
별똥별님 부족한 초생달의 답을 알아주십시오.
너무 감동을받은 초생달은 [추천10] 을 꽝 했씁니다.
너무 훌륭하신  칼럼 글인고로 100% 소화를 시키지못하는 초생달을
 용서해주싶시오.
 
    peter 
2012-12-06 18:53
 67.xxx.187
 저는 십계명과 십일조를 사랑합니다.

첫째, 십계명을 좋아하는 이유

 십계명 1조부터 4조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세를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는가를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십계명 5조부터 10조까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성, 즉 이웃사랑이 어떠해야함을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이처럼 십계명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들어있고,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기에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십계명을 사랑합니다.


둘째, 십일조를 좋아하는 이유

 십일조 역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들어있기에 아주 좋아합니다.
십일조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인정해 드리는 요소가 들어있고, 동시에 이웃을 도우며 살라는 이웃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들어있기에 저는 십일조를 좋아하며 사랑합니다.

십계명을 볼 때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생각해볼 수가 있어 좋고,
십일조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생각할 수 있기에
 저는 십계명과 십일조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고 주의 종들을 돌보라는 의미가 있기에 십일조를 좋아합니다.

십계명으로 구원 받지 못하고, 십일조로 구원받지 못하지만, 그러한 두(2) 가지 요소가 있기에 십계명과 십일조를 버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십일조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나쁩니다.
십일조를 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나쁩니다.
십일조를 안하면 강도요 도둑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도 나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헌물인 십일조를 받아 도둑질 하고 나쁜데 사용하고
 하나님의 십일조 정신에 어긋나게 사용하는 사람이 나쁘고 문제인 것이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올려드리는 봉헌 자체는 절대로 나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일조 잘못 사용하는 교회나 목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살아계십니다.

십일조 해도 좋고, 안해도 좋습니다. 부담이 된다면 조금만 해도 됩니다.
하고 싶은 만큼만 해도 됩니다.
십일조의 그 의미와 정신을 알면서 올려드리면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담고 있기에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하고픈 분들은 자유롭게, 자기분수껏, 부담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쳤던 십일조,
야곱이 바쳤던 십일조,
이웃사랑을 위한 하나님의 십일조
 하나님의교회와 주의종들을 돕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십일조,

십일조에는 이처럼 중요한 의미들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십일조란 봉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만물이 주께로 나왔고,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만물이 주께로 돌아가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

교회의 십일조 개혁이란 십일조를 도둑질하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사람들을 고치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계몽하고 회개시켜 바른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을 빌미로 십일조 자체를 없애려는 우는 범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장쟁이 
peter님의 고백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12/6 22:07
 68.xxx.254
 
 jesusnim  문제는 십일조를 잘못 사용하는 목회자들을 제재하려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입니다.
.
심지어는 교계 기관도 서로 비난과 정죄는 할 수 있지만 견제는 못하는 실정이구요.
.
교단에서도 잘못을 따지려 하면 교단 나와서 개교회 만들면 되지 라고 하기에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
큰 자산을 가진 교회가 자신의 교단에서 없어지면 경제적 타격 때문에 할 수가 없죠.
.
목회 세습에 대한 것도 감리교도 피터지게 싸워서 심지어는 회의 끝나고 경찰에게 에스코트를 받지 않으면 집에 가지 못할 정도의 위협을 이겨내고 바꾸었고 다른 교단은 아직 꿈도 못꾸는 실정이지요.
.
그러기에 이렇게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고 일반성도들이 비판하는 것입니다.
.
세습이 그정도 인데 십일조는 그것이 잘못 사용되어 있어도 못고칩니다.  12/6 23:26
 72.xxx.181
 
 바두기 
 peter님의 이 글은 제가 지금까지 읽은 십일조에 대한 모든 글 중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12/7 10:35
 173.xxx.74
 
   
  jesusnim  7년까지는 아닙니다. 그리고 글을 매번 찾아 읽은 것도 아니구요..
제가 여기 오기 시작한 것이 길게 잡아야 3년 정도죠...
님의 글은 제가 읽기에 조금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과인 저로서는 학술적 문체가 아닌 이러한 문학적 문체에 많이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많이 공감할 수 없음으로 많은 글을 읽지 않은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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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느낀바 님의 글은 많은 것을 알고 쓰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의 구조와 논리의 전개로 꽤 준수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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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도 시작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갑자기 계혁도 목회자들에게 맡겨야지 일반 성도들이 하면 다 망할 것이라는 위협적인 생각을 읽게 되었고 그에 대한 반작용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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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 23:10
 72.xxx.181
 
 
 jesusnim  그렇게 편향적이지 않다면 님의 글은 일부러 찾아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는 글이라는 생각입니다.
.
적어도 글을 허투루 쓰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또 글의 내용도 상당한 인사이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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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관련인으로 보이는 시각이 이번에 좀 사실 거슬리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는 상당한 공감을 이끌어 내시는 좋은 글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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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좋은 한해 마무리 하시기 기도합니다.
 12/6 23:39
 72.xxx.181
     
  바두기 
왜 십일조가 무거운 짐인지 모르겠습니다. 무거운 짐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짊어지셨습니다.
어쨌거나 야곱님은 십일조를 안하시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나 본인을 위해서 좋을 것 같습니다. 12/6 13:20
 173.xxx.74
       
  star 
2012-12-06 10:04
 64.xxx.46
 아멘으로 받습니다.
빈대, 이, 늑대 몇 마리를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려는 요상한 교회개혁은 반대함다. 이상한 교회개혁을 외치는 자들의 자기자신이 먼저 성경으로 변화되는 진정한 교회개혁이라 봄.
 
     
  요나 
2012-12-06 09:53
 69.xxx.50
 "개혁가들을 위한 사랑의 권면:
1. 십일조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2. 십일조가 축복의 바로미터라고 떠벌리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런 목사들에게서 돌아서야 한다.
3. 내게 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바꾸자고 하여 말씀을 가감(加減)하거나 재단하여 잘라내는 자유주의 신학은 더욱 위험하다. 결코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더 큰 재앙으로 그대를 이끄리니...."
아멘! 강추! 어지러운 세상에 귀한 말씀 감사 합니다. 사모님의 귀한뜻을 독자들이 아전인수 하지 마시기를...
 
  코람데오 
2012-12-06 06:53
 70.xxx.174
  글 잘 읽었습니다.

어설프게 부르짖는 교회개혁에 대한 하나의 지침서라 할 수 있고,
성경의 십일조를 폐지하라는 자들에게 주는 하나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고
 진짜 "교회개혁의 지침서"라 할만 합니다. 

교회와 삶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전혀 지지 않고, 행동은 전혀 없이, 입으로만 나불내는 안티성교회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이 반다시 한번은 이 글을 읽고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시원^ 시원한~~  글을 마니 마니 써 주시옵기를 당부하옵니다.
님의 글을 copy 하여 우리교회의 교인들에게도 널리 널리 파도처럼 번져나가게 하겠고,
저 쪽 교회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알리겠습니당.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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