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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면류관, (성도여, 꼼수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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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2-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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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필자가 아주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기점으로 연날리기가 성행했었다. 다른 都보다 경상남도에서 연날리기 대회가 유독 활기를 띄게 된 것은, 그 유래가 신라가 근원지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한국 연의 역사를 문헌에서 잠시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300여 년 전 신라 진덕여왕 元年(西紀 647年) 비담(琵曇)과 염종(廉宗)의 반란 때 김유신 장군이 연을 사용했다는 기록(三國史記列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47년 신라 진덕여왕을 반대하는 일부 대신이 반란을 일으켜 김유신(金庾信)이 토벌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성안에 큰 별똥이 하나 떨어졌고, 별은 왕을 상징하는 것, 별똥이 떨어진 것은 곧 왕이 떨어진 것이라 하여 군사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사기가 떨어질 대로 다 떨어졌다.

이것을 본 명장 김유신이 꾀를 내어 불을 붙인 허수아비를 연에 달아 하늘로 띄워올렸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어제저녁에 떨어진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갔으니 진덕여왕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소문을 내어 싸움에서 이겼다는 재미난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연 날리기 대회는 그 시작부터가 상대를 속이고 아군마저도 속이기 위한 권모술수에서 비롯되었다고나 할까?(ㅠㅠ)

연날리기 대회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연날리기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민속놀이,그저 재미로 연을 하늘에 띄우고 높이높이 날리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가 않다. 동네 연날리기 대회 하나에서도 규칙이 있고 정해진 규칙은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반칙이나 꼼수나 술수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많은 꼼수와 술수가 빈번한 것이 또 이 연날리기 대회였다니, 기막히지 않을 수 없다. 지략이라 일컫는 김유신 장군의 꼼수를 이어받은 것인지...ㅋㅋ

연날리기 대회의 최고 압권이라 할 수 있고, 가장 재밌는 볼거리라면, 역시, 방패연으로(쉽게 말하면 일명 싸움 연이다) 상대의 연을 감아서 떨어트리거나 줄을 끊어 먹는 것인데, 이 연 시합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며칠 전서부터 연줄에 풀을 먹이고 젖은 실을 햇볕에 말리고, 마르면 다시 또 풀을 먹이고, 여간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나쁜 심성을 가진 사람은 풀에다 유릿가루를 섞기도 했다고 한다. 유릿가루를 몰래 섞는 것은 상대의 줄을 끊어내기 위한 꼼수요, 술수였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동네 어른들은 모여서 연날리기 대회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의 연줄을 철저하게 검사한다고는 하지만, 그런 사이에도 승부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느 한 곳에다 몰래 유릿가루를 감추어 상대를 꺾으려 하는 일도 비일비재, 심심찮게 들려오던 후문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들통이 나게 되면 승리는커녕 혼줄나기가 십상이나 여전히 그런 악습은 알게 모르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지금은 아예, 모든 연줄에 유릿가루를 묻히도록 허락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조건을 가지고 정정당당하게 싸워 이기란 뜻일 게다.

동네 어른들이 심판으로 뽑히기에 웬만하면 봐줄 법도 하건만 연날리기 대회를 맡아보는 동안만은 아저씨도 없고 삼촌도 없고 오직 당당한 심판만 거기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단체전은 규칙이 있고 그 규칙대로 싸우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연이 멀리 그리고 높이 올라간다고 해도 무조건 탈락이다. 또 가장 나중까지 남아 있는 연을 가진 팀이 이긴 팀이요,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경기에서 승자가 되려고 하면, 노력과 기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꼭 기억해야 할 말은 “규칙 준수”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일 것이다. 단체전이라면 "협동"도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어떤가? 무조건 이겨놓고 보자는 심산인지 정치계도 종교계도 온갖 술수와 꼼수가 난무하여 어지럽고 혼탁하기 그지없다.

지금 우리 아멘넷 뿐아니라, 기독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Hot Issue가 무엇인가? 그것은 처음 잘 달려가던 사람들이 변질하여 정도(正道)를 버리고 꼼수를 부리고 무리수를 두다가 그런 사실이 발각되었는데도 인정하지 못하고 더욱더 교묘하고 공교한 말로서 이치를 흐리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이 있다!

성도가 걸어야 할 길,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의(義)로운 길이다. 그렇다면 의로운 길은 또 무엇인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의(義)로움의 주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 앞에서 걸어나가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 주 앞에서 사는 사람에게 꼼수나 권모술수가 통하겠는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절 말씀).” 이 말씀은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에 이미 마음에 천국이 임해야 하며, 천국이 임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성도가 간과해 버리기 쉬운 말씀이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말씀이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론 다음으로 기억해야할 중요한 말씀이다. 구원론이 미래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것은 현재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현재 천국이 미래 천국으로 연결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들, 성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이, 이 세상에서 죄악과 더불어 짝하고 살면서 “나는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 기막히고 어이없는 삶을 연출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위성이 없다. 어느 독자님이 고백한 대로, 지금은 율법 시대가 아니고 은혜 시대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그 다음에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과 의로운 행위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내 삶에서 먼저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울한 일을 당한다. 그럴 때도 잠잠히 그분을 바라보며 침묵할 수 있는가? 또 내가 어떤 기념비적인 일, 선한 일, 혹은 용감한 일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누군가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내가 받아야 할 칭찬과 상급을 나대신 그 누군가가 찬탈했다면?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일을 만나면, 우리는 무척 화가 나거나 깊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다스릴 수 있는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말을 곧이 듣고 불법임을 알면서도 그 불법을 행동에 옮기려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 그 말씀을 더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겠는가? 이 부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내 삶에서 주인되심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시금석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롬 8: 5, 13-14절 참조)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렇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성령에 굴복하며 자신의 의지와 욕심을 죽이고 주님과 함께 청결하고 정직한 삶,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걷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죽음의 강을 건널 때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하늘의 공급하시는 새 힘으로 채워주시고 그런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강도가 훨씬 다르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에 꼭 그런 단어는 없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말씀도 있다.

또 순교자도 주께서 힘을 주셔야 순교할 수 있는 것이지,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순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입증된다. 스데반 집사가 돌무더기 속에서 죽어갈 때를 보라. 죽음 직전에, 그의 영안이 열리고 주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6절 말씀).” 그렇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평생을 두고 사랑하며 섬기던 그 주님, 평소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자기의 사랑받는 종, 스데반이 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셨다. 그리고 스데반을 응원의 눈길로 바라보신다. 이쯤 되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내가 평생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흘린 눈물을 기억해 주시고 내가 오는 것을 환영해 주시려고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신 주님이 보인다면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나 십자가 강도의 죽음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다. 사단이 그의 영과 혼과 육을 갈기갈기 찢으며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고통 중에서 주님께 구원을 요청하려면 글자 그대로 필사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구원받았다 하여, 나 또한 그런 특혜를 누릴 수 있다고 너무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백성 되기로 마음에 작정한 그날부터 성도는 그분의 통치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이 계속돼야 하고, 이런 훈련이 계속된 사람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1 5:18절 말씀)

다시 말하지만,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행위나 내 의지와 상관관계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주님을 입술만으로가 아닌 가슴과 행동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자가 됨을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서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일, 그분을 십자가에 현저히 두 번 못박는 일을 계속하겠다 고집 할 수 없을 것이다.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인 우리도 싫어한다. 하물며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그분 앞에서 내 사랑을, 내 순전을 어찌 속일 수 있다는 것일까……그런고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그분 앞에서 살아야 한다.

성도여, 꼼수를 버려라, 저기 저 앞에 영광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경기장에서 다름박질하는 선수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우리가 평생을 사모하며 그리던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구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고전 12-13 참조) 삶의 결승전, 그 자리에서 나는 벌거벗은 구원자로 판정, 사랑하는 그분과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야 하는 현실 앞에서 가슴을 치며 영원한 후회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오늘 잠시 누릴 세상 부귀영화, 꼼수와 술수로 아성을 쌓은들 그게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 2: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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