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골짜기에 생명 역사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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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1-04-2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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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선지자 에스겔은 유다의 참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선지자이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절망하고 있을 때 마른 뼈들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 환상은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 있는 정황에 대한 환상입니다. 그는 유다가 영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몰락해가는 역사적 현장에 있었고, 유다가 강대국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줄다리기 외교 정책을 펴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다. 에스겔은 그 과정에서 유다의 왕들이 얼마나 무모하고 또 무기력했는지를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서 나라 전체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과정을 분통 터지고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이유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답답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많지만 지금은 죄를 지적하기 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너무나 기막히고 참담하고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그 누구도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선지자는 이런 때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것이야 어쩌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상태일 때가 있습니다. 대 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가지만 그들과 싸워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갈 데도 없고 도와 줄 사람도 나라도 없고 모든 치욕과 고통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원인이 있을 수도 있겠고, 의미와 목적이야 분명히 있겠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이티 지진처럼, 일본의 지진처럼, 리비아의 사태처럼 나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도 감당 못할 일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인간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고, 몹쓸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자신에게나 우리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미국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났고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그런 일은 많았습니다. 일제식민 체제와 지금의 분단체제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형편은 그런대로 문제가 없지만 영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이 황폐한 상황일 때도 있습니다. 과학의 수재들만 간다는 카이스트에서 금년 들어 네 명이 자살을 하였고 존경 받던 교수까지 자살을 하였다는 것은 카이스트도 정신적으로 황폐화 된 사람에게는 에스겔 골짜기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매스컴은 카이스트의 학생들과 교수가 자살한 사건을 이슈화시켜 보도하였습니다. 이 보도를 접하고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질문은“카이스트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을 하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카이스트라고 해서 자살안전지대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서 잇따른 자살이 일어났다는 것은 어디든지 정신적으로 아골 골짜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도 의욕도 잃고 자살을 하는 일은 어디서든지 일어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통령도 재벌 총수도 대학교수도 목사도 신부도 자살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늙고 병들어 자녀와 사회에 짐이 될 뿐이라고 자살을 하는 노인도 있고, 금방 결혼한 젊은이가 자살을 하기도 하고, 나이 어린 아이들도 자살을 하고... 자살을 하는 계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유명인이나 저명인사나 인기 탤런트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종교인이 자살을 하는 것은 사회적 문제라고 야단이지만 수많은 무명인들의 자살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삶의 의미나 의욕을 상실하여 자살을 하기도 하고, 사회적 편견과 오해를 감당하지 못하여 자살을 하기도 하고, 자기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지나친 기대치가 부담되어 자살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능한 그런 원인들과 사회적 환경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한 것이고 고의적으로 그런 원인이나 환경을 만들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이 황폐한 상황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누구의 도움에 의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절망과 무력감의 늪에 점점 침전하기만 하는 상황에 누구나 처할 수가 있습니다.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당사자 개인이 최종적 책임자이고 주변 사람들과 국가와 사회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그 책임을 완벽하게 감당할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는 책임 소재를 따지기 전에 고통당한 자를 위로하고 사태를 수습하고 신중하게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불행한 일이 누구의 범죄 때문이라면 마땅히 책임을 물어 처벌을 해야겠지만 고의성이 없는 실수나 도의적 책임의 문제를 지나치게 추궁하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못합니다. 어떤 일에 실수를 한 사람보다 앞으로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반성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이 그의 「자살론」에서 “자살은 없다. 사회적 타살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는데, 사회가 복잡하게 될수록 개인윤리 뿐 아니라 사회윤리도 강조되어야 하지만 사회윤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의 책임성을 소홀히 하게 되어 어떤 문제에서든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그 인격에 있고 인격이 고귀한 것은 책임적 기능 때문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자살 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지만 교회가 그 사실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다고 합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현상이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아골 골짜기처럼 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살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살리는 생명역사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행동입니다. 신자와 교회에서 믿음이 살아 있다는 생명의 역사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신자가 자살을 하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은 영적으로 황폐한 정황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때는 신자의 입술에 감사가 없고 마음에 기쁨이 없고 생활에 보람이 없어 살 의욕도 재미도 없게 됩니다.
앞에서 사회문제를 이야기 할 때는 사회윤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을 우려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 문제에서는 사회윤리를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교회와 가장 가난한 교회가 동시에 많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비유에서 부자는 부유한 대형교회이고 거지 나사로는 가난한 교회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입에 담기조차 싫은 한기총의 돈 선거는 사실 거의 모든 교단 총회장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그것은 곧 탐욕이 지배하여 영적으로 황폐화 된 영적 에스겔 골짜기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생명 역사를 이루시지만 사탄은 탐욕으로 영혼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하나님은 사랑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겨서 하게 하십니다. 이번 부활절에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그 생명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영적 또는 정신적으로 황폐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겔 37:3 -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해서 나라 전체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과정을 분통 터지고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이유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답답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많지만 지금은 죄를 지적하기 보다는 위로가 필요한 때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너무나 기막히고 참담하고 불가항력적인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사실 그 누구도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선지자는 이런 때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죄를 지적하는 것이야 어쩌면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때로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상태일 때가 있습니다. 대 제국 바벨론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가지만 그들과 싸워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망갈 데도 없고 도와 줄 사람도 나라도 없고 모든 치욕과 고통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원인이 있을 수도 있겠고, 의미와 목적이야 분명히 있겠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이티 지진처럼, 일본의 지진처럼, 리비아의 사태처럼 나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도 감당 못할 일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인간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고, 몹쓸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자신에게나 우리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미국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났고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그런 일은 많았습니다. 일제식민 체제와 지금의 분단체제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형편은 그런대로 문제가 없지만 영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이 황폐한 상황일 때도 있습니다. 과학의 수재들만 간다는 카이스트에서 금년 들어 네 명이 자살을 하였고 존경 받던 교수까지 자살을 하였다는 것은 카이스트도 정신적으로 황폐화 된 사람에게는 에스겔 골짜기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매스컴은 카이스트의 학생들과 교수가 자살한 사건을 이슈화시켜 보도하였습니다. 이 보도를 접하고 나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질문은“카이스트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단 말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을 하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카이스트라고 해서 자살안전지대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서 잇따른 자살이 일어났다는 것은 어디든지 정신적으로 아골 골짜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도 의욕도 잃고 자살을 하는 일은 어디서든지 일어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통령도 재벌 총수도 대학교수도 목사도 신부도 자살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늙고 병들어 자녀와 사회에 짐이 될 뿐이라고 자살을 하는 노인도 있고, 금방 결혼한 젊은이가 자살을 하기도 하고, 나이 어린 아이들도 자살을 하고... 자살을 하는 계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유명인이나 저명인사나 인기 탤런트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종교인이 자살을 하는 것은 사회적 문제라고 야단이지만 수많은 무명인들의 자살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삶의 의미나 의욕을 상실하여 자살을 하기도 하고, 사회적 편견과 오해를 감당하지 못하여 자살을 하기도 하고, 자기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지나친 기대치가 부담되어 자살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능한 그런 원인들과 사회적 환경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한 것이고 고의적으로 그런 원인이나 환경을 만들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이 황폐한 상황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누구의 도움에 의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절망과 무력감의 늪에 점점 침전하기만 하는 상황에 누구나 처할 수가 있습니다.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당사자 개인이 최종적 책임자이고 주변 사람들과 국가와 사회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그 책임을 완벽하게 감당할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는 책임 소재를 따지기 전에 고통당한 자를 위로하고 사태를 수습하고 신중하게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불행한 일이 누구의 범죄 때문이라면 마땅히 책임을 물어 처벌을 해야겠지만 고의성이 없는 실수나 도의적 책임의 문제를 지나치게 추궁하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못합니다. 어떤 일에 실수를 한 사람보다 앞으로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반성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이 그의 「자살론」에서 “자살은 없다. 사회적 타살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는데, 사회가 복잡하게 될수록 개인윤리 뿐 아니라 사회윤리도 강조되어야 하지만 사회윤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의 책임성을 소홀히 하게 되어 어떤 문제에서든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고귀함은 그 인격에 있고 인격이 고귀한 것은 책임적 기능 때문입니다.
교인들 중에도 자살 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지만 교회가 그 사실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없다고 합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현상이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아골 골짜기처럼 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살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살리는 생명역사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행동입니다. 신자와 교회에서 믿음이 살아 있다는 생명의 역사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신자가 자살을 하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것은 영적으로 황폐한 정황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때는 신자의 입술에 감사가 없고 마음에 기쁨이 없고 생활에 보람이 없어 살 의욕도 재미도 없게 됩니다.
앞에서 사회문제를 이야기 할 때는 사회윤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을 우려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 문제에서는 사회윤리를 강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교회와 가장 가난한 교회가 동시에 많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비유에서 부자는 부유한 대형교회이고 거지 나사로는 가난한 교회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입에 담기조차 싫은 한기총의 돈 선거는 사실 거의 모든 교단 총회장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이고 그것은 곧 탐욕이 지배하여 영적으로 황폐화 된 영적 에스겔 골짜기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생명 역사를 이루시지만 사탄은 탐욕으로 영혼과 정신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사람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하나님은 사랑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그 일을 맡겨서 하게 하십니다. 이번 부활절에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그 생명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경험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영적 또는 정신적으로 황폐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겔 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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