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너무나 값진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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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1-04-1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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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이와테현 오오후타토시를 덮친 쓰나미의 높이가 29.6m였다고 합니다. 쓰나미의 높이가 몇 차례 수정되어 발표되다가 마지막으로 거의 30m에 육박한 29.6m라고 하였습니다. 파도를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방파제가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카메라에 잡힌 쓰나미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실제로 덮쳐오는 쓰나미를 피해 달아나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시커먼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진 사람과 자동차가 부지기수입니다. 구사일생으로 큰 건물 안으로 피하여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사람과 동물과 집과 자동차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시커먼 바닷물에 휩쓸려가고 말았습니다. 몇 명의 사람이 죽었는지, 피해는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집계를 하기조차 불가능합니다.
파괴된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역에는 수 천구의 시체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수습을 할 수 없어 그대로 방치해둔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태가 수습 국면으로 가지 않고 부서진 원자력 발전소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기, 물, 땅, 채소, 생선 등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방사능에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저께는 또 7.4의 여진이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앞바다에서 일어났습니다. 자꾸만 여진이 계속됩니다. 지진을 이야기 할 때 전진 본진 여진으로 나눕니다. 전진은 본진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는 지진이고 본진은 제일 강력한 지진이고 여진은 본진 다음에 오는 지진을 말합니다. 아마도 지진을 전진 본진 여진으로 구분하는 것은 제일 강도가 높은 지진을 본진으로 하여 앞에 것은 전진 뒤에 것은 여진으로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난 번 본진보다 더 강력한 지진이 앞으로 일어나게 된다면 지난번 본진이 전진이 되는 것입니다. Nobody knows it.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상 대재앙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런 재앙을 당할 때마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인간적인 의문을 제기하려면 끝이 없지만 이런 엄청난 재난 앞에 인간은 정확한 원인도 해결책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처절하게 경험할 뿐입니다. 특히 원전 사태에 대해서 미국과 프랑스는 일본이 초기 대응을 잘못했기 때문에 화를 키웠다고 하지만 이러한 재난이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면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구약의 욥기를 보면 욥이 당한 재난과 고통에 대하여 욥의 세 친구와 욥이 변론을 하지만 그 누구의 주장도 옳고 바른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의 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셨고 욥도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는 욥만큼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셨고, 욥에게는 네가 뭘 안다고 말을 많이 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때 욥은 아차 싶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것이 욥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향해서 “당신은 틀렸어!”라고 할 때 자신은 의인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성경적이지 못하고 이원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합니다. 자신은 선이고 세상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선이고 공산주의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유색인종들보다 나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서방국가들은 선이고 이슬람 국가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정말 끔찍한 실수는 마녀사냥이었습니다. 당시 민간요법으로 치료행위를 하던 미망인들을 마녀로 몰아 극형에 처하였습니다. 별의별 이유가 다 마녀로 정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판단하는 이원론은 교회를 타락시켰습니다. 오늘날도 이원론에 영향을 받는 신자들은 복음성가는 선이고 유행가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선이고 정치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선이고 문화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라기보다 이원론적 관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독교에 가장 악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이원론입니다. 가관인 것은 이원론적 태도가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원론적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 이원론적 관점은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재난을 당한 국가나 개인을 향해서 하나님을 안 믿고 죄를 많이 지어 벌 받았다고 하는 태도는 이원론적 관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돔성이 심판에 직면했을 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입니다. 불신자가 물에 빠져도 우리는 구해주어야 합니다.
노아 홍수가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노아 홍수로 죽은 자들이 모두 악해서 벌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노아 홍수가 악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노아홍수에 대한 모든 설명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이 다 악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소돔 성이 멸망할 때 그 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악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곳에 있는 몇 명의 의인을 인하여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할 때 50명, 45명, 30명, 20명, 마지막으로 10명까지 내려갑니다. 하나님은 의인 열 명이 있어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지만, 문자적으로 해석을 한다고 하여도 그곳에 의인 아홉 명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뿐 아니라 니느웨 성처럼 소돔 성에도 앞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노아 홍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노아 때 홍수로 죽은 사람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인과응보의 관점으로 노아 홍수 사건을 다 설명하는 것은 세상적 관점입니다. 인류 역사상에 일어났던 대재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인과응보였습니다. 그런 끔직한 재앙을 인과응보가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재난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그 재난과 싸우기 위해서 연대하는 것입니다.
지금 원전과 씨름하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면서 지구상에 안전한 곳이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재앙은 앞으로 또 올 것입니다. 그것이 “The Day After”라는 영화에서처럼 기후의 변화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고, “Fallout3”에서처럼 핵전쟁으로 인해 올 수도 있고, “The Road”에서처럼 핵전쟁과 기후에 의한 재난이 겹친 재난일 수도 있습니다. 큰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영화들은 인간이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대재앙에 대비하여 영화 “Fallout3”에서는 볼트라는 특수 피난처를 만들어 그곳으로 피합니다. 하지만 소수만이 그곳으로 피합니다. 대다수의 인류는 재앙을 피하지 못하고 멸절합니다. 인간이 씨도 없이 멸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주에 피난처를 만들기도 하고 지하에 특수 피난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의 효능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직한 재앙은 노아 홍수입니다. 홍수 후 노아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또 다시 닥칠지도 모르는 홍수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게 하셔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그 같은 재앙이 또 닥친다면 얼마 되지 않는 인류는 그야말로 멸절되고 맙니다. 그것이 노아가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는 인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 멸절의 대재앙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대재앙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고 확실한 것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앞으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무지개 언약입니다. 대재앙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것이 무지개 언약입니다. 인간이 직면한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교훈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 창 9:11 -
파괴된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역에는 수 천구의 시체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수습을 할 수 없어 그대로 방치해둔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태가 수습 국면으로 가지 않고 부서진 원자력 발전소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기, 물, 땅, 채소, 생선 등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방사능에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저께는 또 7.4의 여진이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앞바다에서 일어났습니다. 자꾸만 여진이 계속됩니다. 지진을 이야기 할 때 전진 본진 여진으로 나눕니다. 전진은 본진이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는 지진이고 본진은 제일 강력한 지진이고 여진은 본진 다음에 오는 지진을 말합니다. 아마도 지진을 전진 본진 여진으로 구분하는 것은 제일 강도가 높은 지진을 본진으로 하여 앞에 것은 전진 뒤에 것은 여진으로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난 번 본진보다 더 강력한 지진이 앞으로 일어나게 된다면 지난번 본진이 전진이 되는 것입니다. Nobody knows it. 그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상 대재앙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런 재앙을 당할 때마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인간적인 의문을 제기하려면 끝이 없지만 이런 엄청난 재난 앞에 인간은 정확한 원인도 해결책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처절하게 경험할 뿐입니다. 특히 원전 사태에 대해서 미국과 프랑스는 일본이 초기 대응을 잘못했기 때문에 화를 키웠다고 하지만 이러한 재난이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면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구약의 욥기를 보면 욥이 당한 재난과 고통에 대하여 욥의 세 친구와 욥이 변론을 하지만 그 누구의 주장도 옳고 바른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의 주장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셨고 욥도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는 욥만큼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셨고, 욥에게는 네가 뭘 안다고 말을 많이 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 때 욥은 아차 싶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것이 욥기가 주는 교훈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향해서 “당신은 틀렸어!”라고 할 때 자신은 의인이 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성경적이지 못하고 이원론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합니다. 자신은 선이고 세상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선이고 공산주의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유색인종들보다 나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서방국가들은 선이고 이슬람 국가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정말 끔찍한 실수는 마녀사냥이었습니다. 당시 민간요법으로 치료행위를 하던 미망인들을 마녀로 몰아 극형에 처하였습니다. 별의별 이유가 다 마녀로 정죄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판단하는 이원론은 교회를 타락시켰습니다. 오늘날도 이원론에 영향을 받는 신자들은 복음성가는 선이고 유행가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선이고 정치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선이고 문화는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라기보다 이원론적 관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독교에 가장 악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이원론입니다. 가관인 것은 이원론적 태도가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원론적 사고를 하는 이들에게 이원론적 관점은 신앙이 좋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재난을 당한 국가나 개인을 향해서 하나님을 안 믿고 죄를 많이 지어 벌 받았다고 하는 태도는 이원론적 관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돔성이 심판에 직면했을 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입니다. 불신자가 물에 빠져도 우리는 구해주어야 합니다.
노아 홍수가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노아 홍수로 죽은 자들이 모두 악해서 벌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노아 홍수가 악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노아홍수에 대한 모든 설명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이 다 악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소돔 성이 멸망할 때 그 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악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곳에 있는 몇 명의 의인을 인하여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할 때 50명, 45명, 30명, 20명, 마지막으로 10명까지 내려갑니다. 하나님은 의인 열 명이 있어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지만, 문자적으로 해석을 한다고 하여도 그곳에 의인 아홉 명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뿐 아니라 니느웨 성처럼 소돔 성에도 앞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노아 홍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노아 때 홍수로 죽은 사람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인과응보의 관점으로 노아 홍수 사건을 다 설명하는 것은 세상적 관점입니다. 인류 역사상에 일어났던 대재앙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인과응보였습니다. 그런 끔직한 재앙을 인과응보가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재난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그 재난과 싸우기 위해서 연대하는 것입니다.
지금 원전과 씨름하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면서 지구상에 안전한 곳이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재앙은 앞으로 또 올 것입니다. 그것이 “The Day After”라는 영화에서처럼 기후의 변화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고, “Fallout3”에서처럼 핵전쟁으로 인해 올 수도 있고, “The Road”에서처럼 핵전쟁과 기후에 의한 재난이 겹친 재난일 수도 있습니다. 큰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영화들은 인간이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대재앙에 대비하여 영화 “Fallout3”에서는 볼트라는 특수 피난처를 만들어 그곳으로 피합니다. 하지만 소수만이 그곳으로 피합니다. 대다수의 인류는 재앙을 피하지 못하고 멸절합니다. 인간이 씨도 없이 멸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주에 피난처를 만들기도 하고 지하에 특수 피난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의 효능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직한 재앙은 노아 홍수입니다. 홍수 후 노아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또 다시 닥칠지도 모르는 홍수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게 하셔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그 같은 재앙이 또 닥친다면 얼마 되지 않는 인류는 그야말로 멸절되고 맙니다. 그것이 노아가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노아홍수 이야기는 인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인간 멸절의 대재앙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대재앙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고 확실한 것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앞으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무지개 언약입니다. 대재앙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약속하신 것이 무지개 언약입니다. 인간이 직면한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교훈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 창 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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