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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예배 회복’등의 주장 신뢰 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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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1-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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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외치는 이들 중에는 대개 초대교회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예배를 회복하자!”라고 하는 이들의 “회복 된 예배”는 바른 예배의 개념을 오해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초대교회가 사도들이 살아 있던 시기의 교회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초대교회는 아직 매우 어리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교회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서부터 점점 자라가는 과정이 있듯이 교회도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에서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아이는 아직 미숙하고 불완전 하지만 어린아이의 어떤 면은 어른이 되어서도 유지하면 좋은 점이 있어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점은 미숙하고 유치하고 감정적이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시기적으로 유아기의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구약의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아직 몰랐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안식일을 계속 지켜야 하는지, 할례를 행해야 하는지, 복음이 희랍의 철학과는 어떻게 다른지, 영지주의와는 어떻게 다른지 몰랐습니다. 초대교회는 아직 장성하지 못한 어린 수준이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혼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속사도 시대와 교부들의 시대에는 탁월한 교회 지도자들까지 기독교를 변증한다면서 기독교의 가르침도 희랍의 철학 못지않다는 차원에서 기독교를 변증했었습니다.

초대교회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까지 자라왔습니다. 물론 유형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바른 교회로만 성장하지 못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를 세상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한 점이 많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자라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자라갈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불완전한 유형교회를 통해서 보편교회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정의나 윤리적 정당성으로 존재의 의의(意義)를 가름할 수 없고 길 잃은 자를 찾으시는 목자의 사랑과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 나에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주장이 그렇게 바람직한 주장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또한 자칫 잘못하면 “옛날이 좋았다.”는 순환적 시간관이 만들어 낸 과거지향적 가치관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이방 종교와 철학은 순환적 시간관으로 인하여 과거지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무엇을 개선하고 고치려는 일을 게을리 하게 합니다. 그것은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가치관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역사와 사상과 철학을 분석하지 못하면 “옛날이 좋았다.”는 비성경적인 가치관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요즈음에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아마도 오늘날 교회들이 드리는 예배가 지나치게 경직되고 형식화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바른 예배를 드리자는 뜻에서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여러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결국은 그들이 전제하는 것은 지금의 많은 교회들이 드리는 예배는 잘못되었기 때문에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셈입니다.

원칙적인 면에서 그러한 주장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여태까지 그들도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하다가 어떤 계기에 바르게 예배드리는 것을 깨달아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게 되었다면 나름대로 “회복되어야 할 예배의 모범”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가 속한 교단에는 “예배 모범”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예배 모범”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예배의 분위기(설교, 찬양, 기도 하는 방법과 태도 등)를 바꾸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과 예배를 드리는 자의 정성과 태도와 또한 예배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태는 시대마다 달랐고 또한 교회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만약 예배의 대상이나 예배자의 정성과 태도와 예배의 내용이 잘못되어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더욱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주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란 “한 시간, 순서를 따라 드리는 예배”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는 제의적(祭儀的) 차원의 절차와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예배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의 예배는 사람이 보기에 초라하고 형식이 보잘 것 없어도 바른 예배가 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자의 예배는 아무리 화려하고 감동적이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큰 교회들일수록 예배 시에 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업적을 자찬(自讚)하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선교나 교육 등을 위한 프로젝트의 비전(?)을 제시하면 교인들은 자신이 그 일에 동참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자기가 그 큰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또한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예배 자가 지극히 삼가야 할 자세인데 교회들은 자꾸만 그러한 자부심을 부추깁니다.

어떤 교회나 개인이 진정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간절함이 있다면 “예배를 회복하자!”라고 하기보다는 거짓 말 하는 것, 미워하는 것, 부당한 이득을 탐하는 것, 남을 얕보고 업신여기는 것, 자기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 등 수도 없이 많은 우리의 허물들과 정욕적인 죄의 습관들을 회개하고 고쳐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가인의 제사와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드린 제사에서 볼 때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예배 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도 예배는 예배에 앞서 경건한 삶으로 준비되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배 회복을 강조하기 보다는 경건한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이 밑거름이 되어 피어내는 한 송이 꽃이어야 하고 세련된 기획과 의도된 감동과 영적 메가 프로젝트로 사람을 흥분시키고 압도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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