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능력 아닌 성품을 요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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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1-01-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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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을 좇으려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뜻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란 자기 부정이며 자기희생을 의미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으로서만이 주님을 좇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 든 예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과 반대되는 교훈으로 오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즉 망대를 세우려할 때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충분할는지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해 보는 것과, 전쟁을 하러 갈 때는 먼저 아군과 적군의 군사력을 비교해 능히 적을 이길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시면서 “이와 같이”주님을 따르려 하는 자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즉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과 자기의 가진 것을 계산해 보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교훈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제자들도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능력을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품을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능력에 못 미치는 것에는 예민하게 안타까워하면서도 성품에 못 미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합니다. 주님께서 드신 두 예는 주님을 좇는 것의 참 의미를 바르게 알고 거기에 따른 희생을 각오하고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모든 신자들은 자신이 신자였다가 아니었다가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도 “신자였다가”일 때보다는 “아니었다가”의 때가 지배적으로 많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느낌과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주로 자신이 능력을 요구 받고 있다는 의식과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담 때문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지배적 가치관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신양명은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뜻합니다.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날리는 목적은 부모나 가문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입신양명은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성품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가치관에 무의식적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인이나 교회도 주님을 위한 업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영적 입신양명”에 천착(穿鑿)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잘 믿어 큰 복을 받아 이름을 내고 그 결과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지배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을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문제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한 번도 능력이나 업적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임의로 이해하고 생각하여 만들어 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한 성품이요 바른 태도입니다.
70년대 초만 해도 새해나 명절이 다가오면 목욕탕엘 갔었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보내는 시간은 남자는 3-4시간, 여자들에게는 4-6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목욕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태리 타월(이태리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지 모르지만)로 한 벌 가죽을 벗기다시피 때를 밀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매일 목욕을 할 수 없어서 한꺼번에 묶은 때를 다 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의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부흥회나 금요철야집회 같은 때에 한꺼번에 믿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때로는 철야기도나 산 기도나 금식기도나 특별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으로 믿음을 증명하거나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고 열매를 나타내야 하는 곳은 일상의 현장입니다.
신자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일은 하나님의 자녀 되고 신자 된 자들의 성품이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될 때 나타나는 결과로서의 일이어야 하고 성품에 우선하는 일이 되면 안 됩니다. 일을 목적으로 하면 능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목회자를 청빙할 때 요구하는 자격을 보면 성품이 아니라 업적과 일을 위한 능력을 요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교회들이 그것의 반복되는 부작용으로 인하여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바른 대안(代案)에 대한 안목이 어둡습니다.
진정 지도자와 신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지, 알면서도 대세를 거스를 용기가 없는지, 아무튼 이러한 상황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자가 이 시대에 많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주님을 좇는다는 이들이 처음부터 자기를 부인할 의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을 의사도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주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도 내일을 위해 대비하는데 빛의 자녀들은 내일에 대한 대비가 없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자녀교육열이 특별한 것은 세계인들이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저력이고 장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자녀 교육의 목적은 일반인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하지만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자녀 교육은, 좋은 학교를 나와야 예수를 믿어도 구역장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의 수준입니다. 실제로 좋은 학벌은 구역장 하는데도, 장로가 되는데도, 무엇보다 목사가 되는데도 얼마나 요긴한지 모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성품의 신자나 지도자를 요구하지 않고 능력과 학벌과 많은 물질을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비방하고 무고하지 말라, 용납하고 서로 받으라, 용서하고 사랑하라..., 이 같은 요구는 소홀히 하고 큰 예배당을 짓고 많은 수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것으로 주를 위해 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한 소모품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으로 지어져 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으로 지어져 가도록 하는 데 동원되어야지 일을 위해 신앙을 동원하는 것은 영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단이 기독교에 늘 따라 붙는 것은 외로움과 아픔과 고달픔을 안고 가는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단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교묘하게 십자가를 비껴가려는 사단의 술수입니다. 이단은 절대로 자기를 부인하거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신비로운 능력과 이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신자와 지도자는 외로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도자의 공통된 짐은 외로움입니다. 목사도 그런 부류에 속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대중들의 이해를 받으면 그것은 이미 지도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는 아무리 설명해도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앞서감이 있어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이들의 환영과 칭찬과 격려 가운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과 아픔과 슬픔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지도자가 세상을 고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고칠 수 없습니다. 지도자가 거룩한 성품으로 자기를 훈련해 갈 때 주님이 그를 통해 세상과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다른 사람을 고치려 듭니다. 특히 고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고치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못하는 사람을 고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보다 더 나쁜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태도일수가 있습니다. 대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를 고치려는 마음보다 나는 그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곡한 뜻은 우리가 서로 용납하는 것인데 그것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성품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고전 6:7 -
자기 십자가를 지고, 즉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과 자기의 가진 것을 계산해 보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교훈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제자들도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능력을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품을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능력에 못 미치는 것에는 예민하게 안타까워하면서도 성품에 못 미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둔감합니다. 주님께서 드신 두 예는 주님을 좇는 것의 참 의미를 바르게 알고 거기에 따른 희생을 각오하고 결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모든 신자들은 자신이 신자였다가 아니었다가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도 “신자였다가”일 때보다는 “아니었다가”의 때가 지배적으로 많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느낌과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주로 자신이 능력을 요구 받고 있다는 의식과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담 때문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지배적 가치관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신양명은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뜻합니다.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날리는 목적은 부모나 가문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입신양명은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성품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가치관에 무의식적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인이나 교회도 주님을 위한 업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영적 입신양명”에 천착(穿鑿)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잘 믿어 큰 복을 받아 이름을 내고 그 결과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지배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을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의아해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문제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한 번도 능력이나 업적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임의로 이해하고 생각하여 만들어 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거룩한 성품이요 바른 태도입니다.
70년대 초만 해도 새해나 명절이 다가오면 목욕탕엘 갔었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보내는 시간은 남자는 3-4시간, 여자들에게는 4-6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랜만에 하는 목욕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태리 타월(이태리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지 모르지만)로 한 벌 가죽을 벗기다시피 때를 밀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매일 목욕을 할 수 없어서 한꺼번에 묶은 때를 다 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의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부흥회나 금요철야집회 같은 때에 한꺼번에 믿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그렇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때로는 철야기도나 산 기도나 금식기도나 특별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것으로 믿음을 증명하거나 확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고 열매를 나타내야 하는 곳은 일상의 현장입니다.
신자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일은 하나님의 자녀 되고 신자 된 자들의 성품이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될 때 나타나는 결과로서의 일이어야 하고 성품에 우선하는 일이 되면 안 됩니다. 일을 목적으로 하면 능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목회자를 청빙할 때 요구하는 자격을 보면 성품이 아니라 업적과 일을 위한 능력을 요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교회들이 그것의 반복되는 부작용으로 인하여 많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바른 대안(代案)에 대한 안목이 어둡습니다.
진정 지도자와 신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지, 알면서도 대세를 거스를 용기가 없는지, 아무튼 이러한 상황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자가 이 시대에 많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주님을 좇는다는 이들이 처음부터 자기를 부인할 의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을 의사도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주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도 내일을 위해 대비하는데 빛의 자녀들은 내일에 대한 대비가 없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자녀교육열이 특별한 것은 세계인들이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저력이고 장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자녀 교육의 목적은 일반인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하지만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자녀 교육은, 좋은 학교를 나와야 예수를 믿어도 구역장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의 수준입니다. 실제로 좋은 학벌은 구역장 하는데도, 장로가 되는데도, 무엇보다 목사가 되는데도 얼마나 요긴한지 모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성품의 신자나 지도자를 요구하지 않고 능력과 학벌과 많은 물질을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비방하고 무고하지 말라, 용납하고 서로 받으라, 용서하고 사랑하라..., 이 같은 요구는 소홀히 하고 큰 예배당을 짓고 많은 수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것으로 주를 위해 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한 소모품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으로 지어져 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으로 지어져 가도록 하는 데 동원되어야지 일을 위해 신앙을 동원하는 것은 영적 질서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단이 기독교에 늘 따라 붙는 것은 외로움과 아픔과 고달픔을 안고 가는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단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교묘하게 십자가를 비껴가려는 사단의 술수입니다. 이단은 절대로 자기를 부인하거나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신비로운 능력과 이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신자와 지도자는 외로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도자의 공통된 짐은 외로움입니다. 목사도 그런 부류에 속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대중들의 이해를 받으면 그것은 이미 지도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는 아무리 설명해도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앞서감이 있어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이들의 환영과 칭찬과 격려 가운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과 아픔과 슬픔을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지도자가 세상을 고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고칠 수 없습니다. 지도자가 거룩한 성품으로 자기를 훈련해 갈 때 주님이 그를 통해 세상과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다른 사람을 고치려 듭니다. 특히 고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고치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못하는 사람을 고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보다 더 나쁜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태도일수가 있습니다. 대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를 고치려는 마음보다 나는 그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곡한 뜻은 우리가 서로 용납하는 것인데 그것은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성품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고전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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