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 스캔들에 빠지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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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1-01-0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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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요초 만발하던 궁정의 꽃들과 나무들이 하나같이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떡갈나무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같이 건강하던 나무가 왜 갑자기 이렇게 시들어 죽어가고 있느냐?”떡갈나무가 대답합니다. “사실 저는 전나무처럼 멋있는 외모를 갖지 못했고 목재로도 소용이 없으니 더 살아서 뭣하겠습니까?” 그런데 떡갈나무가 부러워하는 전나무도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전나무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죽어가고 있느냐?” “저는 허우대만 멀쩡하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저도 포도나무처럼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싶은데 그것은 제가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열매하나 맺지 못하는 제가 살아서 뭣하겠습니까?”
임금님은 포도나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죽어가고 있느냐?”포도나무는 깊은 한숨을 내 쉬며 “임금님, 저도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싫습니다. 저의 평생소원은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워보는 것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궁정에 심긴 모든 꽃들과 나무들이 시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오랑캐꽃은 싱싱한 기운을 뽐내며 자기의 작은 꽃을 앙증맞게 피우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궁정의 모든 나무와 꽃들이 살기를 포기하고 시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너만은 이렇게 활기차게 살아서 꽃을 피우고 있느냐?” 오랑캐꽃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임금님께서 저를 궁정에 심어 주신 것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저의 꽃을 피우라는 뜻인 줄 알고 늘 감사하며 임금님께 보답해야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해서 포도 열매나 장미 꽃 같은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지만 늘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기대에 집착하는 원인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교만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만은 남보다 나아지려는 태도이지만 자기 욕망의 목마름을 심화시키고 결국은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여 스스로 낙심하며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살기를 포기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교만은 문제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탓하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허둥지둥 지나 온 한 해의 끝자락에 후회와 회한과 원망과 절망과 허무 같은 것이 낙엽처럼 쌓여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교만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성취한 데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많이 가지지 못해도 감사할 수 있고 원망과 시비와 비난도 유익한 교훈으로 삼습니다. 아스피린은 아직 그 약효가 다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겸손이야 말로 그 효능을 다 검증할 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한 만병통치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습니다.
온 인류가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지만 교만한 사람은 메시야를 만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머리가 나쁜 사람은 드러내 놓고 교만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교만을 드러내지 않고 숨길 줄 압니다.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자신을 겸손한 사람처럼 보이게도 합니다. 교만의 특징은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메시야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고 보여주시기도 하셨지만 그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상상하고 기대한 메시야는 위대한 초능력으로 로마를 제압하고 모든 원수들을 발아래 무릎 꿇게 할 메시야입니다. 그러한 메시야의 능력과 영광이 실현될 나라에서 누가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욕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까지 그것 때문에 서로 싸웠습니다. 이 모든 요인은 교만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되는 것을 가리켜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한 사람을 소개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소유 자였습니다. 입는 것과 먹는 것을 최소화한 극히 청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사명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았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와 심지어 군인들을 향해서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헤롯왕의 비리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그는 메시야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이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자신에 대해 고백했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한 대로 형장의 이슬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겸손의 참 모습입니다. 그는 헤롯에게 목이 잘려 죽었지만 메시야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복을 세례 요한에게서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구체적인 예로 세례 요한을 제시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참 겸손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분이기도 합니다. 그 겸손으로 그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고 최소한의 의식주로도 만족하였으며 자신이 일생을 바쳐 헌신한 메시야가 자기를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호화롭게 부귀영화를 누리는 어떤 왕보다, 어떤 선지자보다도 위대하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그를 “복된 사람”으로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는데, 크다는 말씀에는 복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눅 7:28
임금님이 전나무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죽어가고 있느냐?” “저는 허우대만 멀쩡하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저도 포도나무처럼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싶은데 그것은 제가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열매하나 맺지 못하는 제가 살아서 뭣하겠습니까?”
임금님은 포도나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죽어가고 있느냐?”포도나무는 깊은 한숨을 내 쉬며 “임금님, 저도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싫습니다. 저의 평생소원은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워보는 것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궁정에 심긴 모든 꽃들과 나무들이 시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오랑캐꽃은 싱싱한 기운을 뽐내며 자기의 작은 꽃을 앙증맞게 피우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궁정의 모든 나무와 꽃들이 살기를 포기하고 시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너만은 이렇게 활기차게 살아서 꽃을 피우고 있느냐?” 오랑캐꽃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임금님께서 저를 궁정에 심어 주신 것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저의 꽃을 피우라는 뜻인 줄 알고 늘 감사하며 임금님께 보답해야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부족해서 포도 열매나 장미 꽃 같은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지만 늘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기대에 집착하는 원인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교만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만은 남보다 나아지려는 태도이지만 자기 욕망의 목마름을 심화시키고 결국은 욕망을 성취하지 못하여 스스로 낙심하며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살기를 포기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교만은 문제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탓하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허둥지둥 지나 온 한 해의 끝자락에 후회와 회한과 원망과 절망과 허무 같은 것이 낙엽처럼 쌓여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교만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성취한 데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많이 가지지 못해도 감사할 수 있고 원망과 시비와 비난도 유익한 교훈으로 삼습니다. 아스피린은 아직 그 약효가 다 검증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겸손이야 말로 그 효능을 다 검증할 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한 만병통치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습니다.
온 인류가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지만 교만한 사람은 메시야를 만날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머리가 나쁜 사람은 드러내 놓고 교만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교만을 드러내지 않고 숨길 줄 압니다.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은 자신을 겸손한 사람처럼 보이게도 합니다. 교만의 특징은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메시야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고 보여주시기도 하셨지만 그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상상하고 기대한 메시야는 위대한 초능력으로 로마를 제압하고 모든 원수들을 발아래 무릎 꿇게 할 메시야입니다. 그러한 메시야의 능력과 영광이 실현될 나라에서 누가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욕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까지 그것 때문에 서로 싸웠습니다. 이 모든 요인은 교만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되는 것을 가리켜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한 사람을 소개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소유 자였습니다. 입는 것과 먹는 것을 최소화한 극히 청빈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사명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는 추상과 같았습니다.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와 심지어 군인들을 향해서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헤롯왕의 비리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그를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그는 메시야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이 메시야이신 예수님과 자신에 대해 고백했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한 대로 형장의 이슬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겸손의 참 모습입니다. 그는 헤롯에게 목이 잘려 죽었지만 메시야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복을 세례 요한에게서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구체적인 예로 세례 요한을 제시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참 겸손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분이기도 합니다. 그 겸손으로 그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고 최소한의 의식주로도 만족하였으며 자신이 일생을 바쳐 헌신한 메시야가 자기를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호화롭게 부귀영화를 누리는 어떤 왕보다, 어떤 선지자보다도 위대하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그를 “복된 사람”으로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는데, 크다는 말씀에는 복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눅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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