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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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0-12-0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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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사실일 가능성도 있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실제로 위험한 길이고 가끔 강도가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일이 일어났던 곳이라고 합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하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율법이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예사로운 통찰이 아닙니다. 지금도 율법이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신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모르면 엉터리 사랑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율법사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것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든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라든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 등이 율법의 정신이라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율법사는 그것까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자기가 지킬 수 있는 율법의 한계를 정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 즉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시지 않으시고 “내가 어떻게 하면 이웃이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질문에 빗나간 대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은 상당히 의도적인 대답입니다. 율법사 스스로 답을 말하도록 하신 질문입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강도만나 죽게 된 사람의 이웃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피할 수 없이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즉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제쳐 놓고 사마리아인이 “선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가치와 통념을 완전히 뒤엎는 충격적인 것이 발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직접 사마리아인이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선하다고 말씀하셨다면 그 발언을 문제 삼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 스스로 대답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도 상당히 지혜로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처럼 인종차별적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있고 율법사의 관심은 예수님을 책잡는데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영생 얻는데 관심이 있는 것처럼 처신했습니다. 윤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고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보다 윤리가 먼저인 것은 윤리는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이지만 자칫 퍼주기 식 사랑은 사람을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국가가 시행하는 복지 정책은 대게 퍼주기 식 방식입니다. 이것은 베푸는 자 위주의 사랑인데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퍼주기 식 사랑은 주는 사람의 기분에 의해 좌우되기 쉬운데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 위에 군림하게 되고 받는 사람은 비굴하게 될 뿐 아니라 자수성가할 능력까지 상실하게 됩니다.
교회들이 선교하는 것과 노숙자들을 돌보는 일도 베푸는 자 위주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 인디언들을 돕는 정책은 그들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할 필요도 공부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예의도 인간다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아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베푸는 자의 명분을 위한 사랑은 사랑 받는 자에게 독이 되는 것입니다. 퍼주기 식 선교의 부작용과 폐해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됩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모든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가져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는 평생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많아진 오늘날은 신자가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는 일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합니다.
좋은 제도와 환경을 만드는 것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몫이고, 그러기 위해서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것과 투표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몫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 된 일이 아니라도 어떤 사람이 피해를 당하게 될 일이라면 막는 것이 오늘날의 선한사마리아인의 일일 것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눅 10:36-37 -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잘하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율법이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예사로운 통찰이 아닙니다. 지금도 율법이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신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이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모르면 엉터리 사랑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율법사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물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것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든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 간음이라든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 등이 율법의 정신이라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율법사는 그것까지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자기가 지킬 수 있는 율법의 한계를 정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 즉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시지 않으시고 “내가 어떻게 하면 이웃이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질문에 빗나간 대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은 상당히 의도적인 대답입니다. 율법사 스스로 답을 말하도록 하신 질문입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중에 누가 강도만나 죽게 된 사람의 이웃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피할 수 없이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즉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제쳐 놓고 사마리아인이 “선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가치와 통념을 완전히 뒤엎는 충격적인 것이 발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직접 사마리아인이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선하다고 말씀하셨다면 그 발언을 문제 삼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사 스스로 대답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도 상당히 지혜로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처럼 인종차별적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있고 율법사의 관심은 예수님을 책잡는데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영생 얻는데 관심이 있는 것처럼 처신했습니다. 윤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고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보다 윤리가 먼저인 것은 윤리는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이지만 자칫 퍼주기 식 사랑은 사람을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국가가 시행하는 복지 정책은 대게 퍼주기 식 방식입니다. 이것은 베푸는 자 위주의 사랑인데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퍼주기 식 사랑은 주는 사람의 기분에 의해 좌우되기 쉬운데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 위에 군림하게 되고 받는 사람은 비굴하게 될 뿐 아니라 자수성가할 능력까지 상실하게 됩니다.
교회들이 선교하는 것과 노숙자들을 돌보는 일도 베푸는 자 위주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 인디언들을 돕는 정책은 그들을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할 필요도 공부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예의도 인간다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아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베푸는 자의 명분을 위한 사랑은 사랑 받는 자에게 독이 되는 것입니다. 퍼주기 식 선교의 부작용과 폐해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됩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가지 모든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가져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는 평생 한 번도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많아진 오늘날은 신자가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는 일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합니다.
좋은 제도와 환경을 만드는 것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몫이고, 그러기 위해서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것과 투표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것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몫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 된 일이 아니라도 어떤 사람이 피해를 당하게 될 일이라면 막는 것이 오늘날의 선한사마리아인의 일일 것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눅 10:3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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