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적 오류의 발견은 새로운 통찰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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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0-09-0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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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무엇이나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을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의 지적 호기심은 선천적인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유를 호기심 충족 욕구에서 찾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놀라움’에서 학문이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 자신이 그것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바른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서 지식을 추구하기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놀라움’을 주려고 평생을 애썼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어떤 것에 대한 개념적 오류를 발견하고 ‘놀라움’이라는 새로운 통찰의 창문을 열어주려고 할 때 그 놀라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것의 개념적 오류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새로운 통찰의 창문으로 삼는 사람들은 플라톤과 같은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들이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혹해 하지만 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동굴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듯이, 사람이 무지로부터 벗어나 지식에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찾으려 노력하지도 않고 그 길을 찾거나 제시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선지자들의 말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겼습니다. 때로는 선지자를 원망하기도 하였고 극단적으로는 자신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선지자를 미워한 나머지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자신들을 애굽의 고역에서 해방시켜 준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확신의 근거로 생각했던 지식과 어떤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는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사람이 성숙하게 되는 것은 지식과 개념의 오류를 발견하고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며 진리를 향한 새로운 통찰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지를 깨달았지만 바른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번거롭고 힘들어 무지를 깨우쳐 주는 사람을 비난하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삐뚤어진 자기 정당화를 플라톤은 그의 『국가』에서 무지를 깨우쳐 주는 선생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강도대신 의로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에게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확신하는바 진리에 관한한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 타협은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의 타협이기에 앞서 자신과의 타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번거롭고 괴롭고 힘들어도 잘못된 개념과 지식은 고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싫 어하고 괴로워하고 심지어 미워하더라도 끝까지 사랑으로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타협하지 말아야 하지만 또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하며, 자신의 지식을 고치고 다듬어가야 합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발전합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싫어하는 교수는 5년 전이나 10년 전에 사용했던 강의노트를 그대로 사용하는 교수입니다. 학문이란 이전에 바른 지식으로 여겨졌던 것이 더 이상 바른 지식이 아니거나,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오류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선생이 되려면 성실한 연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은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 사람은 목사 되는 것을 깊이 심사숙고 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주시지만 목사는 그 진리를 성실히 연구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성실히 연구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때 은사이신 박윤선 목사님이 하신 인상 깊은 말씀이 기억납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놀래나야 한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새로운 깨달음 얻게 될 때 마음에 따끔하도록 깜짝 놀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읽어도 그저 덤덤하게 아무 느낌도 없다면 그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것이고 또한 성도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놀래나야 한다.”고 하실 때 오른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가 갑자기 손을 가슴에서 뗌과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뜨시면서 하시던 그 말씀이 깊은 인상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전도사 시절부터 설교를 하기 시작하여 35년을 설교해 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대할수록 그 깊이와 폭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성경 본문을 대할 때마다 전에 잘못 알고 있었던 것과 새롭게 깊이를 더해가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약간은 놀래나는 편입니다. 해가 더할수록 성경을 보는 관점과 관심의 주제도 다양해지고 이해도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사용하는 용어와 습관과 생각들 중에 많은 것이 잘못 된 것들임을 발견하고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수용하고 받아들였던 것들 중에 이것은 아니다 싶어 포기한 것들도 많습니다. 한 때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심취하기도 했고, 사회구원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철학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오류와 모순의 발견은 성경 진리의 새로운 통찰의 창문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실수와 오류와 모순을 통해서도 진리에 다가가게 하십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1-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놀라움’을 주려고 평생을 애썼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어떤 것에 대한 개념적 오류를 발견하고 ‘놀라움’이라는 새로운 통찰의 창문을 열어주려고 할 때 그 놀라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것의 개념적 오류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새로운 통찰의 창문으로 삼는 사람들은 플라톤과 같은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들이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혹해 하지만 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동굴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듯이, 사람이 무지로부터 벗어나 지식에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찾으려 노력하지도 않고 그 길을 찾거나 제시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선지자들의 말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겼습니다. 때로는 선지자를 원망하기도 하였고 극단적으로는 자신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선지자를 미워한 나머지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자신들을 애굽의 고역에서 해방시켜 준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확신의 근거로 생각했던 지식과 어떤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는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사람이 성숙하게 되는 것은 지식과 개념의 오류를 발견하고 자신의 무지를 반성하며 진리를 향한 새로운 통찰에 눈을 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지를 깨달았지만 바른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번거롭고 힘들어 무지를 깨우쳐 주는 사람을 비난하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삐뚤어진 자기 정당화를 플라톤은 그의 『국가』에서 무지를 깨우쳐 주는 선생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마음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강도대신 의로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에게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확신하는바 진리에 관한한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그 타협은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의 타협이기에 앞서 자신과의 타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번거롭고 괴롭고 힘들어도 잘못된 개념과 지식은 고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싫 어하고 괴로워하고 심지어 미워하더라도 끝까지 사랑으로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은 타협하지 말아야 하지만 또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하며, 자신의 지식을 고치고 다듬어가야 합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발전합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싫어하는 교수는 5년 전이나 10년 전에 사용했던 강의노트를 그대로 사용하는 교수입니다. 학문이란 이전에 바른 지식으로 여겨졌던 것이 더 이상 바른 지식이 아니거나,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오류를 발견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선생이 되려면 성실한 연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은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없는 사람은 목사 되는 것을 깊이 심사숙고 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주시지만 목사는 그 진리를 성실히 연구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성실히 연구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주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때 은사이신 박윤선 목사님이 하신 인상 깊은 말씀이 기억납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놀래나야 한다.”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새로운 깨달음 얻게 될 때 마음에 따끔하도록 깜짝 놀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읽어도 그저 덤덤하게 아무 느낌도 없다면 그 자신이 영적으로 죽은 것이고 또한 성도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놀래나야 한다.”고 하실 때 오른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가 갑자기 손을 가슴에서 뗌과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뜨시면서 하시던 그 말씀이 깊은 인상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전도사 시절부터 설교를 하기 시작하여 35년을 설교해 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대할수록 그 깊이와 폭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성경 본문을 대할 때마다 전에 잘못 알고 있었던 것과 새롭게 깊이를 더해가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약간은 놀래나는 편입니다. 해가 더할수록 성경을 보는 관점과 관심의 주제도 다양해지고 이해도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사용하는 용어와 습관과 생각들 중에 많은 것이 잘못 된 것들임을 발견하고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수용하고 받아들였던 것들 중에 이것은 아니다 싶어 포기한 것들도 많습니다. 한 때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심취하기도 했고, 사회구원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철학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오류와 모순의 발견은 성경 진리의 새로운 통찰의 창문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실수와 오류와 모순을 통해서도 진리에 다가가게 하십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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