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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치운동의 관심이 진리가 아닌 실리이면 경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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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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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에서 진리는 많은 사람이 좇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소수의 사람만이 좇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진리 운동에 대규모의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듯싶습니다. 진리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 된다는 것은 더 없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진리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일치운동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참 된 일치운동의 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마태복음 7장 13절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 오늘날 세상과 심지어 교회들까지 추구하는 대규모 일치운동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88 올림픽 주제가 가사는 모든 사람의 가슴을 뭉클 하게 하는 내용의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하늘높이 솟는 불/ 우리들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 되자/ 손잡고~”

이런 노래 가사가 주는 메시지에 사람들은 쉽게 공감합니다. 정치인도 학자도 경제인도 노동자도 종교인도, 나아가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주는 메시지에 함정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는 것은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진리 안에서 바르게 사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의 실리를 충족시켜 주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의 실리를 충족시켜 줄 세상은 실현 불가능합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해도 경제적으로 아무리 부요하게 되어도 모두의 실리를 충족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종과 문화와 성과 빈부의 차별의 벽을 철폐하고 모두가 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인간이 절대로 평등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악한 존재임을 계산하지 못한 공산주의와 같이 나이브한 발상입니다.

일치라는 이념 자체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일치는 진리 안에서 일치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벗어난 일치는 개인에게도 인류에게도 재앙이 될 뿐입니다. 진리로 일치를 평가해야지 일치라는 이념으로 진리를 해석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리를 벗어난 일치의 불가함과 위험을 성경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5-16)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했던 고전적 인류의 일치운동은 바벨탑을 쌓는 사건이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된”(눅 23:12) 일은 인간의 일치운동이 실리 추구 때문임을 잘 말해 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게 된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자기들의 임금 삼으려 했던 것도 실리 추구를 위한 일치운동의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칠병이어의 기적 사건 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힐난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일도 실리 추구를 위해 손을 잡는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를 실리 추구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표적이나 능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강력한 이스라엘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군중은 군중대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각자 자기들이 추구하는 실리를 위해서 이념과 사상과 신앙까지도 포기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지금 교회가 이러한 실리 추구의 수단으로서의 일치운동을 분별하지 못하고 단순히 일치라는 이념을 메시지화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보수적인 사람들이고 사두개인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입니다. 군중들은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실망하여 냉소적이 된 반면 이적이나 표적이나 예언 같은 것을 분별없이 추종하는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그들은 진리인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배우는 것을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와 메시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당장 병이나 고쳐주고 배불리 먹게만 해 준다면 당신(예수님)이 우리 임금이 되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군중들의 생각을 위험한 생각이라고 여기시고 오병이어 사건 후에는 제자들을 군중과 서둘러 격리시키셨고, 칠병이어 사건 후에는 서둘러 무리를 흩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무리들을 어떤 세력으로 규합하여 이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물리적인 힘이 커지면 그 힘을 교회나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오해가 실리적 일치운동을 도모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한 이들에게 이러한 일치운동은 대단한 호소력을 지닌 메시지가 됩니다.

오늘날 실리적 일치운동을 바르게 평가하고 거부할 만큼 진리에 깨어 있는 이들이 많지 못합니다. 인간의 일치운동은 이기적 실리 추구이기에 모두를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정치인도 학자도 종교인도 민중도 결국에는 실리를 추구하는 면에서 같이 만나게 되기 때문에 실리적 일치운동이 범세계적이고 종교와 세속까지 함께 아우르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모든 이들이 손에 손을 잡았는데 그들을 손잡게 한 것은 바로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었고 그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사는 것보다 더 어필하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관념적이고 이념적이고, 이데올로기나 사상이나 종교나 문화나 모든 것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것은 잘 살게 된다는 실리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서기관들도 사두개인들도 군중들도 실리를 추구하는 일에는 손을 잡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부 활도 천사도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과 손을 잡은 것은 실리 때문입니다. 종교인들의 형식주의와 정치인들의 권모술수에 치를 떨던 군중들도 결국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일에 손을 잡은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실리를 추구하는 일치운동은 경계해야 하고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딤후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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