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이름의 비철학적인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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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9-10-2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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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은 성경의 내용을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잘 설명한 좋은 성경교재입니다. 절문을 하고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요리문답은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다음 질문으로 이어갑니다. 즉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대답“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에서 두 번째 질문인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 답은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는 유일한 것이라고 하였고, 그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 답은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여 어떻게 믿을 것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믿으라고 명령하는 그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라고 다음 질문을 하고 또 대답을 합니다.
모든 질문이 다 쉽지 않지만 네 번째 질문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리문답을 만드는 분들이 이 네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느라고 무척 애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요리문답을 만든 분들은 영국의회 상하 의원들과 목사님들인데 그분들이 제4문의 답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토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토론을 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누군가 제안하기를 이 문제를 위해서 함께 기도한 후에 다시 의론하여 결정을 하자고 하여 모두 함께 기도를 하고 그 중 한 목사님이 대표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영이시고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고 무궁하시며 불변하신 아버지 하나님”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하였답니다. 그러자 기도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기도를 제4문의 답으로 채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요리문답 제4문의 답을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대소 요리문답을 잘 가르치지 않는데 나는 아직 이보다 더 탁월한 성경 교재는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에 따른 대소요리 문답은 360여 년 전의 것이지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자에게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바를 매우 충실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만드는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투자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7세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영국의 국교회에도 개혁의 물결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찰스 1세(1625~1649)는 개혁자들과 이를 따르는 청교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오히려 의회의 다수를 차지했고, 찰스 1세의 개혁에 대한 핍박 정책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찰스 1세는 의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했고 의회는 자위대를 구성하여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종교적인 내전 가운데 빠졌습니다. 이러한 내전 상황 가운데서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과 예배와 교회행정 체제를 개혁하여 성경적인 교리, 성경적인 예배, 성경적인 교회정부 형태를 세우기 위해 영국 전역의 목사님들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이도록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인데, 그 총회는 의회가 파송한 상원과 하원 의원 각각 15명과 전국에서 회집된 121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총회는 1643년 7월 1일에 개회하여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6개월 동안 1163번의 회의를 가졌습니다.
총회는 오랜 논의 끝에 개혁주의적 신앙 고백서의 정수라고 불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장년 교육을 위한 [대요리문답], 자녀 교육을 위한 [소요리문답], 예배의 원리를 제시한 [예배모범서]와 교회정치 문제를 다룬 [교회 정부 형태] 등의 표준 문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중 대소요리 문답은 성경 전체적인 가르침을 쉽게 배우도록 만든 신앙 고백과 교리를 포함하는 문답 형식의 성경 교재입니다. 특히 소요리 문답은 교회의 다음 세대들을 교육하는 지침서로서 성경에 충실하면서 우리가 믿는바 신앙 고백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4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답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불변하십니다.”라고 한 대답에서 우리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이라는 것도, 무한, 무궁, 불변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계가 있어야 설명이 가능한데 무한한 것을 유한한 인간이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혹은 저런 분이다.”라고 말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다 혹은 저런 하나니은 아니다.”라고만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것을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 실 모든 학문, 즉 우리가 안다는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는 알 수가 없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알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면 H20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산소 두 분자와 수소 한 분자로 되어 있는 것이 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을 제대로 알려면 산소를 알아야 하고 수소를 알아야 합니다. 산소를 정의하기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산소란 상온 상압의 상태에서는 무색무취의 기체로서 인체의 에너지 대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질로서 대기 중에 20.9%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람은 산소를 사용하므로 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수소란 빛과 냄새와 맛이 없는 기체 원소로서 물질 가운데 가장 가벼우며 타기 쉽고 대기와 동식물의 몸에 수많은 화합물의 성분으로 있으며 산화물의 환원, 기름의 경화, 암모니아나 염산의 합성, 수성가스, 알콜의 합성과 환원제, 산수소불꽃에 의한 쇠붙이의 절단 및 용접하는 데와 기구·비행선의 기낭에 쓰이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물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려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모든 학문에서는 이것을 참조 reference라고 합니다. 아는 것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학과 학문의 차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를 알려면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인간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예흐웨 아쉐르 예흐웨(אהיה אשר אהיה)(출 3:1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매우 철학적입니다. 즉 “나는 나다.”,“나는 있는 그다.”라는 말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의 뜻은 “그다”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말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우리가 믿고 섬길 만큼은 알 수 있다고 전제하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도 하나님을 설명할 때 point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쪽을 가리킨다는 것이 신학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은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자 하나님을 관념화 시켜버렸고, 교회는 존재론적으로 잘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지나치게 상상하며 형상화 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존재의 원인이 존재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어떤 존재가 하나님을 존재하게 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다 이해하기가 사실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설명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설명해야지 존재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설명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성경에 딱 한 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당신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설명을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이들은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관계 가운데서 인간이 어떻게 섬기고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인가를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고백은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찬양과 감격과 영광과 두려움의 반응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말하면서 “찬송하리로다.” 혹은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것은 당신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려 하심이 아니라 당신은 찬송 받으실 분이요. 영광 받으실 분이요. 두려우신 분이요. 만물과 모든 인류를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보살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은 더 이상 더 자세하게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분이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이삭의 하나님으로 야곱의 하나님으로 역사해 오신 분이시고 미래에는 더 분명하게 밝혀질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의 “나는 ..이다.”라고 했을 때 그 “이다”의 용법은 존재하다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인간 세계 안에서 나타나고 역사 안에서 나타나는 활동적 존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이 진술은 매우 철학적인 진술처럼 되어 있지만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뜻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어떤 해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롬 11:33-36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질문이 다 쉽지 않지만 네 번째 질문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리문답을 만드는 분들이 이 네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느라고 무척 애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요리문답을 만든 분들은 영국의회 상하 의원들과 목사님들인데 그분들이 제4문의 답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토론을 하였다고 합니다. 아무리 토론을 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누군가 제안하기를 이 문제를 위해서 함께 기도한 후에 다시 의론하여 결정을 하자고 하여 모두 함께 기도를 하고 그 중 한 목사님이 대표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기도를 하는데 “영이시고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고 무궁하시며 불변하신 아버지 하나님”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를 하였답니다. 그러자 기도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기도를 제4문의 답으로 채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요리문답 제4문의 답을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대소 요리문답을 잘 가르치지 않는데 나는 아직 이보다 더 탁월한 성경 교재는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에 따른 대소요리 문답은 360여 년 전의 것이지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자에게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바를 매우 충실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만드는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투자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7세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영국의 국교회에도 개혁의 물결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찰스 1세(1625~1649)는 개혁자들과 이를 따르는 청교도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오히려 의회의 다수를 차지했고, 찰스 1세의 개혁에 대한 핍박 정책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찰스 1세는 의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고 했고 의회는 자위대를 구성하여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종교적인 내전 가운데 빠졌습니다. 이러한 내전 상황 가운데서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과 예배와 교회행정 체제를 개혁하여 성경적인 교리, 성경적인 예배, 성경적인 교회정부 형태를 세우기 위해 영국 전역의 목사님들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이도록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인데, 그 총회는 의회가 파송한 상원과 하원 의원 각각 15명과 전국에서 회집된 121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 총회는 1643년 7월 1일에 개회하여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6개월 동안 1163번의 회의를 가졌습니다.
총회는 오랜 논의 끝에 개혁주의적 신앙 고백서의 정수라고 불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장년 교육을 위한 [대요리문답], 자녀 교육을 위한 [소요리문답], 예배의 원리를 제시한 [예배모범서]와 교회정치 문제를 다룬 [교회 정부 형태] 등의 표준 문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중 대소요리 문답은 성경 전체적인 가르침을 쉽게 배우도록 만든 신앙 고백과 교리를 포함하는 문답 형식의 성경 교재입니다. 특히 소요리 문답은 교회의 다음 세대들을 교육하는 지침서로서 성경에 충실하면서 우리가 믿는바 신앙 고백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4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답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불변하십니다.”라고 한 대답에서 우리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이라는 것도, 무한, 무궁, 불변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계가 있어야 설명이 가능한데 무한한 것을 유한한 인간이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혹은 저런 분이다.”라고 말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다 혹은 저런 하나니은 아니다.”라고만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것을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 실 모든 학문, 즉 우리가 안다는 모든 것은 그것 자체로는 알 수가 없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서 알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물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면 H20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산소 두 분자와 수소 한 분자로 되어 있는 것이 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을 제대로 알려면 산소를 알아야 하고 수소를 알아야 합니다. 산소를 정의하기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산소란 상온 상압의 상태에서는 무색무취의 기체로서 인체의 에너지 대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질로서 대기 중에 20.9%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람은 산소를 사용하므로 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으로, 수소란 빛과 냄새와 맛이 없는 기체 원소로서 물질 가운데 가장 가벼우며 타기 쉽고 대기와 동식물의 몸에 수많은 화합물의 성분으로 있으며 산화물의 환원, 기름의 경화, 암모니아나 염산의 합성, 수성가스, 알콜의 합성과 환원제, 산수소불꽃에 의한 쇠붙이의 절단 및 용접하는 데와 기구·비행선의 기낭에 쓰이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물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려면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모든 학문에서는 이것을 참조 reference라고 합니다. 아는 것을 근거로 해서 무엇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학과 학문의 차원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를 알려면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인간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예흐웨 아쉐르 예흐웨(אהיה אשר אהיה)(출 3:1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매우 철학적입니다. 즉 “나는 나다.”,“나는 있는 그다.”라는 말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의 뜻은 “그다”입니다. 이처럼 어려운 말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우리가 믿고 섬길 만큼은 알 수 있다고 전제하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도 하나님을 설명할 때 point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 쪽을 가리킨다는 것이 신학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은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자 하나님을 관념화 시켜버렸고, 교회는 존재론적으로 잘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지나치게 상상하며 형상화 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존재의 원인이 존재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어떤 존재가 하나님을 존재하게 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다 이해하기가 사실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설명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설명해야지 존재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설명을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성경에 딱 한 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당신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설명을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이들은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관계 가운데서 인간이 어떻게 섬기고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인가를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고백은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찬양과 감격과 영광과 두려움의 반응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말하면서 “찬송하리로다.” 혹은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것은 당신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려 하심이 아니라 당신은 찬송 받으실 분이요. 영광 받으실 분이요. 두려우신 분이요. 만물과 모든 인류를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보살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은 더 이상 더 자세하게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분이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이삭의 하나님으로 야곱의 하나님으로 역사해 오신 분이시고 미래에는 더 분명하게 밝혀질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의 “나는 ..이다.”라고 했을 때 그 “이다”의 용법은 존재하다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인간 세계 안에서 나타나고 역사 안에서 나타나는 활동적 존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이 진술은 매우 철학적인 진술처럼 되어 있지만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뜻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어떤 해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롬 11:33-36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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