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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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07-10-2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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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정치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역사적 사건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고 그 역사적 사건의 의미 또한 하나님께서 그 사건에다 붙박이로 넣어두신 것이지 시간이 지난 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것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넣어두신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사건 앞에 겸손해야 하고 그 의미가 드러나고 이해될 때가지 우리의 입장발표를 보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가 불의한 정부와 타락한 교회의 권력의 기득권을 보호 유지시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느낌이고 생각이지 단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들의 주장과 입장에 대한 하나님의 묵인과 인내를 용납과 인정으로 생각하고 신앙이 없는 불신자에게까지 신앙인의 의무를 부과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폴레옹을 독재자라고 하는 것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 계시록에 나오는 괴물, 즉 적그리스도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성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영국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을 “의로운 싸움”이라고 한 것도 당시 영국의 교회 강단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교회가 전쟁에 대한 자기네 정부의 거짓된 선전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영국 교회가 비난했지만 영국교회 역시 제한 된 정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전쟁 중에 교회는 부상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에 따뜻한 손길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의견이 상충되는 문제에 관해 교회가 성급하게 성명서를 발표하므로 교회의 본질과 현안 문제를 혼동하고 하나님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어 긴장과 충돌의 위험을 고조시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만약 오늘날도 그러한 사람들에게 나라의 정치가 맡겨진다면 지금보다 상황은 더 나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무엇인가 공헌하리라고 생각하고 뛰어드는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경계심만 더 심화시킬 뿐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를 상식(common sense)으로 변장하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요즘 교회들 중에는 교인들의 수와 재력과 지도자의 인기를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가 손을 잡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여러 종류의 행사와 연합체를 만들고 또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능력과 경제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자원이고 정치와 문화 역시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이지만 물리적 힘의 규합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서 극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이 힘을 모으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보다 바벨탑을 쌓을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체든지 규모가 비대해지고 기구가 많아지면 정치력이 신장되어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명분만으로 남고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인간의 이기심이 난무하여 파당과 분쟁과 권모와 술수가 지배적이 되고 맙니다. 세를 규합하는 것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결국은 세속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걸맞은 바른 정치는 물리적 힘을 쌓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입니다. 세와 힘을 규합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세상에 편만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물리적인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은과 금이 없어도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행 3:6절-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사건 앞에 겸손해야 하고 그 의미가 드러나고 이해될 때가지 우리의 입장발표를 보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가 불의한 정부와 타락한 교회의 권력의 기득권을 보호 유지시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느낌이고 생각이지 단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들의 주장과 입장에 대한 하나님의 묵인과 인내를 용납과 인정으로 생각하고 신앙이 없는 불신자에게까지 신앙인의 의무를 부과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폴레옹을 독재자라고 하는 것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 계시록에 나오는 괴물, 즉 적그리스도라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성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영국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을 “의로운 싸움”이라고 한 것도 당시 영국의 교회 강단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교회가 전쟁에 대한 자기네 정부의 거짓된 선전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고 영국 교회가 비난했지만 영국교회 역시 제한 된 정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전쟁 중에 교회는 부상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일에 따뜻한 손길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의견이 상충되는 문제에 관해 교회가 성급하게 성명서를 발표하므로 교회의 본질과 현안 문제를 혼동하고 하나님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분이라는 인상을 주어 긴장과 충돌의 위험을 고조시켜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만약 오늘날도 그러한 사람들에게 나라의 정치가 맡겨진다면 지금보다 상황은 더 나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치에 무엇인가 공헌하리라고 생각하고 뛰어드는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경계심만 더 심화시킬 뿐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를 상식(common sense)으로 변장하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요즘 교회들 중에는 교인들의 수와 재력과 지도자의 인기를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가 손을 잡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발상으로 여러 종류의 행사와 연합체를 만들고 또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능력과 경제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자원이고 정치와 문화 역시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이지만 물리적 힘의 규합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서 극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이 힘을 모으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보다 바벨탑을 쌓을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체든지 규모가 비대해지고 기구가 많아지면 정치력이 신장되어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명분만으로 남고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인간의 이기심이 난무하여 파당과 분쟁과 권모와 술수가 지배적이 되고 맙니다. 세를 규합하는 것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결국은 세속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걸맞은 바른 정치는 물리적 힘을 쌓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것입니다. 세와 힘을 규합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세상에 편만해 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물리적인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은과 금이 없어도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행 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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