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 무신론보다 무서운 실천적 무신론
페이지 정보
황상하 ㆍ2007-10-08관련링크
본문
성경은 영적 전투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칩니다.
영적 전투라고 했을 때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단입니다. 사단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교회를 공격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단은 정치와 문화와 경제와 학문과 사상 같은 것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칫 오해하면 사단과 싸우지 않고 단순히 사단이 수단으로 삼는 정치나 경제나 학문 같은 것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과녁을 빗나가는 화살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자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이론 같은 것은 쳐부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모든 이론을 다 적대시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을 대적합니다. 영적 전투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적만 보고 공격에만 정신을 팔다가 내 안에 있는 적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전투가 그렇듯이 적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술수와 꽤가 탁월하여 정면 대결로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계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우리 안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따라서 쳐부술 대상에 언제나 우리 자신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멀리 있는 적은 덜 위험합니다. 가까이 있는 적이 위험합니다. 내 안에 있는 적이 나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론적인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철학자, 하나님을 부인하는 정치인, 하나님을 부인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부인하는 신학자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인정은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보여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복음으로 바꾸어 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복음, 소위 수요에 부응하는 복음으로 바꾸어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외부의 적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실패의 원인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도록 집요하게 유혹한 것은 바알 우상이었습니다. 바알은 물질의 신이요 풍요를 약속하는 신입니다. 바알이 우상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풍요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복음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좋아하여 환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은 인간본성이 싫어하는 것만 요구합니다. 싫은 것을 하라고 명령 할 뿐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은 금하고 또한 절제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합리화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극도로 타락하였을 때에는 바알과 하나님에 대한 구별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이스라엘의 그 때와 닮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실천적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 무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복음을 믿습니다. 교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의 욕심을 관철시키며 살아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론적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우리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죄가 우리 안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우리를 실천적 무신론자로 만들고 맙니다. 거짓말 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난하고, 폄론하고, 당을 짓고, 교만한 것이 바로 우리가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증거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사단은 교묘하게 이론적 무신론에 대하여 화를 내게 하면서도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게 합니다. 바울 자신도 이러한 내부의 적과 피를 말리는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롬 7:19, cf.17-25.)
영적 전투라고 했을 때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단입니다. 사단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교회를 공격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단은 정치와 문화와 경제와 학문과 사상 같은 것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칫 오해하면 사단과 싸우지 않고 단순히 사단이 수단으로 삼는 정치나 경제나 학문 같은 것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실수는 과녁을 빗나가는 화살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자명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이론 같은 것은 쳐부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모든 이론을 다 적대시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을 대적합니다. 영적 전투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적만 보고 공격에만 정신을 팔다가 내 안에 있는 적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전투가 그렇듯이 적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술수와 꽤가 탁월하여 정면 대결로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계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우리 안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따라서 쳐부술 대상에 언제나 우리 자신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멀리 있는 적은 덜 위험합니다. 가까이 있는 적이 위험합니다. 내 안에 있는 적이 나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론적인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철학자, 하나님을 부인하는 정치인, 하나님을 부인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부인하는 신학자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인정은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보여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복음으로 바꾸어 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복음, 소위 수요에 부응하는 복음으로 바꾸어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외부의 적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심각하고 치명적인 실패의 원인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도록 집요하게 유혹한 것은 바알 우상이었습니다. 바알은 물질의 신이요 풍요를 약속하는 신입니다. 바알이 우상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풍요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복음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좋아하여 환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은 인간본성이 싫어하는 것만 요구합니다. 싫은 것을 하라고 명령 할 뿐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은 금하고 또한 절제하라고 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합리화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극도로 타락하였을 때에는 바알과 하나님에 대한 구별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이스라엘의 그 때와 닮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실천적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 무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복음을 믿습니다. 교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의 욕심을 관철시키며 살아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론적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우리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죄가 우리 안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우리를 실천적 무신론자로 만들고 맙니다. 거짓말 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난하고, 폄론하고, 당을 짓고, 교만한 것이 바로 우리가 실천적 무신론자라는 증거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사단은 교묘하게 이론적 무신론에 대하여 화를 내게 하면서도 실천적 무신론자가 되게 합니다. 바울 자신도 이러한 내부의 적과 피를 말리는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롬 7:19, cf.17-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