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의 하나님 중심적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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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7-09-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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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동이란 개인에게는 해로운 것이지만 그 사회와 국가에는 유익한 것이 있고, 반대로 사회와 국가에는 해롭지만 개인에게는 유익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혹은 어떤 행동 기준을 따를 것인가로 고민하게 됩니다. 윤리의 체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윤리와 도덕의 목적이 다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도덕이나 윤리적 행동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이론을 따르는 자들을 공리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윤리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윤리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입니다. 즉 하나님, 그분의 성품, 그분의 뜻, 그분의 하신 일과 관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윤리는 그 기원과 역사와 내용과 동기 면에서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한국인의 가치 기준을 살펴보면 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얼굴, 즉 체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체면도 개인의 체면보다 가문의 체면을 더 중요시하였습니다. 어떤 양반 집 딸이 봄에 나물 캐러 산에 갔다가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을 지나가는 남자가 보았습니다. 그 처녀는 그것을 자신과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가문을 위해서 자살을 한 예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가정이라는 집단에 매몰되어 버립니다. 집 구조만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집은 본래 대문만 견고하고 안에 들어가면 이쪽 방 저쪽 방의 구별이란 형식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서양의 집 구조를 보면 대문은 있으나 마나한 정도이나 집에 들어가면 방마다 자물쇠가 있어 철저히 개인주의적이 됩니다. 한 집에 살아도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면 다른 사람의 접근을 통제할 수가 있는 구조입니다. 이런 집 구조는 가문이라도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없다는 문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 윤리의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개인도 중요시하고 집단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가정을 중요시 합니다.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중요하게 취급하는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의 출발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사랑으로 먼저 구속하시고 그 다음에 도덕적 요구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적 윤리는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반응과 감사의 차원에서 출발합니다.
출애굽의 역사적 순서를 보면 이 같은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먼저 주시고 그것을 잘 지키면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먼저 해방시켜주시고 그 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순종의 응답으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의 서문도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1-4장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의 역사가 나오고 5장에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약에서도 동일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나오고, 인간의 반응이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해 그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탄생하도록 하신 기원이시고, 그의 백성의 삶을 통치하시기 위해 주어진 율법의 기원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윤리적 기준은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로운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차원에서 행할 때 개인과 집단의 진정한 유익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 15:12).
한국인의 가치 기준을 살펴보면 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얼굴, 즉 체면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체면도 개인의 체면보다 가문의 체면을 더 중요시하였습니다. 어떤 양반 집 딸이 봄에 나물 캐러 산에 갔다가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을 지나가는 남자가 보았습니다. 그 처녀는 그것을 자신과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가문을 위해서 자살을 한 예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가정이라는 집단에 매몰되어 버립니다. 집 구조만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집은 본래 대문만 견고하고 안에 들어가면 이쪽 방 저쪽 방의 구별이란 형식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서양의 집 구조를 보면 대문은 있으나 마나한 정도이나 집에 들어가면 방마다 자물쇠가 있어 철저히 개인주의적이 됩니다. 한 집에 살아도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면 다른 사람의 접근을 통제할 수가 있는 구조입니다. 이런 집 구조는 가문이라도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없다는 문화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 윤리의 출발점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개인도 중요시하고 집단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가정을 중요시 합니다. 개인과 사회를 동시에 중요하게 취급하는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의 출발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사랑으로 먼저 구속하시고 그 다음에 도덕적 요구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적 윤리는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반응과 감사의 차원에서 출발합니다.
출애굽의 역사적 순서를 보면 이 같은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먼저 주시고 그것을 잘 지키면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먼저 해방시켜주시고 그 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순종의 응답으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의 서문도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도 1-4장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의 역사가 나오고 5장에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약에서도 동일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나오고, 인간의 반응이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해 그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탄생하도록 하신 기원이시고, 그의 백성의 삶을 통치하시기 위해 주어진 율법의 기원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윤리적 기준은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로운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차원에서 행할 때 개인과 집단의 진정한 유익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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