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의 도덕성 > 지난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이곳은 2017년 이전에 올려진 아멘넷 오피니언 칼럼 글입니다. 이름으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황상하 | 김동욱 | 최송연 | 허경조 | 이수일 | 송흥용 | 김정국

지난 오피니언

쉼의 도덕성

페이지 정보

황상하 2007-08-27

본문

어떤 백수가 돌연사를 했습니다. 사인은 과로였습니다. 백수가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하여 과로로 죽게 되었을까 궁금하여 그 원인을 자세히 조사를 해보았더니 쉬지 않고 놀기만 해서 과로를 했던 것입니다. 놀다가 쉬다가 놀다가 쉬다가 해야 되는데 쉬지는 않고 놀기만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변을 당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노는 것도 사실 피곤합니다. 일은 일주일 내내 해도 견딜만하지만 노는 것은 하루만 놀아도 피곤합니다. 휴가란 쉬는 것인데 휴가를 다녀오면 며칠 동안 몸이 피곤합니다. 노인들 중에는 여행을 다녀와서 그 여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따라서 쉬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신나게 노는 것은 10-20대 젊은이들에게는 문제가 없겠지만 50대를 넘어서면 쉬는 것과 노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고 노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냥 쉬는 것이 심심하니까 놀면서 쉬려고 하는데 체력에 맞게 놀아야 합니다.

휴가 문화도 미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휴가를 위해 일한다고 할 만큼 휴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이 바쁘고 힘들수록 철저하게 휴가를 갑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일이 바쁘지 않아야 휴가에 시간을 할애합니다.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은 일이 많고 바쁘고 힘들어서 휴가를 가고 한국 사람들은 일이 한가하고 바쁘지 않아야 휴가를 갑니다.

레저는 전에 없던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노동 집약적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고, 노동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하던 일들을 컴퓨터와 중장비가 대신하면서 생산은 극대화 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일손은 점점 필요 없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량 실업사태가 불가피 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시간이 많이 남게 되자 사람들은 레저를 위해 새로운 사업과 문화를 만들어 내게 되었고 그 결과 현대인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레저 사업과 문화는 그것이 단순하지 않고 윤리와 도덕과 가치관과 신앙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건전한 놀이가 있는가 하면 도박과 같은 사행성 놀이가 있고 음란하고 퇴폐한 놀이가 있습니다. 퇴폐한 레저 문화로 인하여 건전한 가정이 파탄에 이르고 청소년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나쁜 것을 접할 기회가 많아져서 비행청소년들이 늘어나게 되어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사회가 퇴폐문화가 만들어 낸 사회적 문제의 뒤치다꺼리에 엄청난 시간과 재원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일찍이 그 누구도 여가 문제, 즉 쉬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여가를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지만 그들은 육체노동으로부터 쉬는 것을 여가라고 하지 않고 사물에 대하여 깊이 몰두하여 생각하는 것을 여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육체노동을 일체 하지 않았던 철학자들이 사물의 의미를 비롯한 철학적 물음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는 것을 여가라고 하였으니까 그들의 삶은 전체가 여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을 가장 고상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영어에서 학교를 school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여가를 의미하는 희랍어 스콜레(scole)에서 온 말입니다. 라틴어에서 레저란 스콜라(scola)인데 이 단어는 ‘자유스러워지다.’(to be free) 또는 ‘허락되다.’(to be permitted)는 뜻을 지닌 리께레(licere)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레저의 의미에는 자유와 학습이라는 두 가지 개념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는 여가를 즐기는 것 자체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여가를 어떻게 즐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 드러납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즐기지만 모두가 다 같은 휴가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호화 여객선을 타고 지중해 연안 덥지도 춥지도 않은 별장에서 우리의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감미로운 휴가를 즐기는 부자들이 있습니다. 기껏해야 자장면이나 순두부나 냉면 한 그릇으로 외식을 하는 사람과 한 끼에 몇 천불을 호가하는 디너를 즐기는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다릅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타고 어디를 가느냐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 드러납니다. 이런 여가에는 윤리와 도덕 같은 것은 잠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음란과 퇴폐가 화려한 고급화에 가려지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못합니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여가나 현대인들이 즐기는 여가란 성경이 말하는 쉼과는 그 의미가 매우 다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 창조와 더불어 쉼의 문제를 계명으로 명령하였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은 아무도 일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명하였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안식일에는 쉬라고 하였고 집에 잠시 찾아온 나그네까지 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짐승까지 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종교나 철학에서도 쉼의 문제를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 안식일은 워낙 독특한 것이라서 안식을 지키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을 삼으셨던 것입니다. 부모 공경하는 것이나 윤리 도덕적인 것이나 사회적 정의를 행하는 것으로 표징을 삼는다고 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징을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살인하지 말라든가, 부모를 공경하라든가, 착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라든가, 도적질 하지 말라든가 이런 종류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 즉 쉼의 문제를 계명으로 이렇게 엄하게 가르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물론 일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늘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주일은 월화수목금토일인데 월화수목금금금인 사람도 있고 월화수목금토토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쉼은 일의 능률을 오르게 할 뿐 아니라 일의 즐거움도 느끼게 합니다. 영어 속담에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텅구리가 된다(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성실한 과학도가 열심히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를 지도하던 교수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어제는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가?’ ‘실험을 했습니다.’ ‘밤에는 무엇을 했는가?’ ‘예, 밤에도 실험을 했습니다.’ 이 성실한 과학도는 칭찬을 들을 줄 알고 자부심을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담당 교수는 그 제자의 대답에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럼 자네는 생각은 언제하나?’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쉰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면 쉬는 것이고,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던 사람이 수영을 하면 쉬는 것이고, 과학도가 음악을 들으면 쉬는 것입니다. 물론 축구 선수가 축구를 하는 것이나 수영 선수가 수영을 하는 것이나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이 음악을 듣는 것은 노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쉬셨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쉬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하루를 쉬신 것이 아니고 하루를 안식 하는 날로 정하시고 모든 피조물까지 쉬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부탁이나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안식일에는 반드시 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엄한 명령으로 쉴 것을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제정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은 노동에 지친 사람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안식이 필요 없지만 인간에게는 안식이 필요합니다. 힘든 노동으로부터 쉰다는 것은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이나 노예가 힘든 노동으로부터 쉰다는 것은 요즘 근로자들이 쉰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일한 노예는 하루 종일 놀다가 온 주인을 위해서 저녁밥을 짓고 시중을 들고 설거지를 하고 주인의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주인이 잠들기까지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그런 종에게 쉬는 것이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고대의 노예는 짐승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의 백인들 중에는 흑인노예에게는 영혼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요즘 근로자들도 일이 고되고 피곤한데 이런 노예들은 피곤하다는 말 자체도 사치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노예에게도 안식일에는 쉬게 하셨습니다. 일에 지친 사람에게 안식일은 얼마나 복된 날인지 모릅니다. 일하는 인간에게 쉬는 것은 복입니다. 노동은 고통을 주지만 쉼은 행복을 줍니다.

육체노동으로부터 쉬는 것도 쉬는 것이지만 인간은 육체노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노동도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육체와 정신은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육신을 상하게 하고 육체적 과로는 정신까지 망가뜨립니다. 이것은 육체와 정신의 상호 역기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상호 순기능으로 보면 정신이 건강하면 몸도 건강하게 되고 또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아 건강한 몸은 정신건강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쉬는 것도 잘 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쉼에는 윤리성이 있고 도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가 문화의 퇴폐성이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쉬는 것의 윤리성과 도덕성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그냥 안식하는 날로 정하지 않으시고 거룩한 날로 정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쉬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쉬는 것에 윤리와 도덕성이 없고 경건성이 없으면 그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노동이고 스트레스가 될 뿐입니다. 안식일은 오늘날 퇴폐한 레저 문화처럼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안식일로 지켜 참 쉼을 얻도록 한 것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과 육체를 쉬게 합니다. 거룩함이 없는 곳에는 참 안식도 없습니다. 쉬는 것의 윤리성과 도덕성 그리고 무엇보다 경건성을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노름과 다름없는 내기 바둑, 내기 골프 같은 것은 쉬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합니다. 그런 스트레스는 건강을 상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놀이 문화에 도덕성과 윤리성이 결여되어 사회가 망하게 된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쉬는 것의 윤리성과 도덕성이 개인과 사회에 이렇게 중요하고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계명으로 명하시되 가장 중요한 계명 중의 하나로 명하시고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아주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니까 “안 지키면 너에게 손해다.”라고 하여 지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안 지키면 반드시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며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을 하라고 하시고 나쁜 것을 하지 못하도록 엄한 벌로서 경계하시고 다스리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둘째는 쉬는 것의 윤리성 때문인데 즉 쉬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윤리라는 것은 본래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윤리의 뿌리를 하나님의 거룩성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사람은 윤리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피곤함을 아시고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바쁜 와중인데도 잠간 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바쁘면 쉬지 못합니다. 주님은 바쁠 때 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쉬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안 쉬면 자녀들도 못 쉬고, 집에서 기르는 소도 못 쉬고, 말도 못 쉬고, 손님도 못 쉬고, 내 집에 유하는 나그네도 못 쉬고, 종업원도 못 쉽니다. 쉬는 것은 개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쉬어야 합니다. 짐승도 쉬어야 합니다. 소도 일이 고되면 여물을 먹지 못합니다. 혓바늘이 돋고 입맛을 잃고 맙니다.

한창 바쁜 농번기에는 사람도 피곤하지만 소는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어릴 때 나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아무리 바쁜 농번기에도 주일이 되면 모든 일을 중단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예배드리러 교회에 갔었습니다. 예배당에 갈 때 나는 우리 집 배나무 나무 밑에 누워 있는 소를 보면서 어린 마음에 ‘주일이라서 너도 쉬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주일이 되면 내가 쉬어서 좋기도 하지만 소가 쉬는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소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일이 없으면 소가 어떡할 뻔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안 믿는 이웃집에서 주일에 소를 빌러달라고 하면 절대 안 빌러주지만 소가 불쌍하여 빌러달라고 하는 이웃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피곤하니까 “잠간 쉬어라”는 말씀은 매우 단순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말씀 가운데 인간 복지의 핵심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 삶은 피곤합니다. 누구나 피곤합니다. 범죄 한 인간은 고통스러운 노동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죄는 인간을 피곤하게 하고 두렵게 하고 긴장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쌓이게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이 범죄하자 땅이 저주를 받아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엉겅퀴는 소위 잡초의 대명사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잡초는 원수 같은 존재입니다.

요즘은 제초제로 잡초를 제거하지만 옛날에는 일일이 김을 매주었습니다. 깨밭 매기, 서숙(조) 밭 매기, 이맘때쯤 늦더위에 벼논에서 김매기 하는 것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농촌 일이 너무 힘들어 농사짓는 사람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농사꾼을 힘들게 하는 잡초는 논밭에 나지만 인간을 힘들게 하는 엉겅퀴는 어디든지 돋아납니다. 직장에도 사업장에도 배움터에도 가정에도 심지어 교회도도 엉겅퀴는 돋아나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엉겅퀴는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쉬어야 합니다. 쉬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과로는 만성살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쉼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서 뿐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쉬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쉼에 대한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차원 높은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쉼은 맛보기 쉼입니다. 그야말로 잠간 쉬는 쉼입니다. 하지만 진짜 쉼은 영원한 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은 육체노동으로부터 쉬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쉼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는 노동으로부터 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약속합니다. 다시는 고통스러운 노동에 시달릴 필요가 없는 하늘나라의 안식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는 자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참 쉼과 안식은 주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만이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한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산을 지고 가는 듯이 인생을 삽니다. 주님은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안식일 정신의 계승으로 영원한 안식을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힘들고 피곤한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안식일 정신을 좇아 주일에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그 자신이 불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하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11절-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