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가 선교의 문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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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07-03-1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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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조선에 들어간 이후에 몇몇 큼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후일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게 된 평양이 복음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66년 제너럴 셔먼(The General Sherman)호를 타고 평양에 간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가 희생되는 사건부터였습니다.
그 때 토마스 선교사가 가지고 간 한문 성경과 전도지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 후 만주에서 선교하던 로스(John Ross) 목사와 맥킨타이어(John Macintire) 목사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조선에 전파되어 기독교 신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1887년에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Appenzeller)가 평양을 방문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가 평양, 의주 등지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2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 봄에 조선정부는‘포교금지령’을 내려 선교활동을 막았습니다. 1894년 2월 17일에 의료선교를 하던 홀(Hall) 선교사의 집에 그 동리 김낙구라는 사람이 마을 사람 20여명을 데리고 찾아가 성황제를 지낼 비용을 거두러왔으니 수렴을 많이 하여 달라고 하면서 협조하지 않으면 좋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홀 선교사는 우상에게 제사하는 일에 협조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때 통역을 맡았던 노병선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가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이들의 집요한 방해와 뇌물과 공작으로 평양감사 민병석은 1894년 5월 10일 목요일 새벽닭이 두 번 울 때 신자들이 함께 잠자던 예배당 숙사를 기습하여 어명이라고 사칭하며 신자들을 포승줄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명부를 빼앗아 신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던 중 체포당시 자기는 불신자라고 하던 송서린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난타 하였습니다. 이것이 조선에서 개신교가 관에 의해 박해를 받은 최초의 사건입니다.
그 때 언더우드, 마펫(Samuel Austin Moffett), 스크렌톤 선교사들이 영.미 공사에 진정하여 영국 총영사 Gardner와 미국 공사 Sill이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사건 발생 이틀만인 5월 11일에 잡혀갔던 신자들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관리들은 체포 구금하였던 신자들에게 일일이 배교를 강요하여 석방하였는데, 체포당시 가장 많은 수난을 당했던 김창식의 메모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예방비장 신덕균씨가 분부하되 너희들을 죽일터이로되 내 용서하고 물어볼 말이 있노라 너희가 이제라도 나아가서 도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욕하면 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고 하나씩 물을새 처음 김세호에게 물은대 하나님을 욕하고 또 홍종대에게 물은대 하나님을 욕하고 또 한석지에게 물은대 하나님을 욕하고 그 다음 내게 왔노니 내 마음이 대단히 분하고 원통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욕할 수 없다 하니 그 놈들이 좌우에서 대단 때리며 욕하라 하며 무수히 난타하매 신덕균씨가 내보내라 하니 문 밖으로 끌고 나오매 마침 교우의 도움으로 도망하여 왔소.”
이렇게 하여 신자들이 석방 된 후에 영.미 공사에서는 조선 정부 기관에 강력히 항의 하여 이 사건에 대한 해명과 배상을 요구하여 500불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였고, 이 사건에 관련 된 평양 감사 민병석 휘하의 몇몇 관리들도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어떤 역사 기록은 국왕 고종의 어명에 의해서 체포되었던 자들이 석방되었다고 하지만 그 같은 기록은 과장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발생과 해결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상황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선교사들이나 영.미 공사들의 고압적 외교자세, 둘째 조선 외아문(지금의 외무부)의 굴욕적 대응태도, 셋째 조선 관리들의 부패성, 넷째 민중들의 외국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의식 등은 반성하고 교훈삼아야 할 점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으로 조선 선교에 대단히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조선에 들어간 기독교가 최초로 관에 의한 박해를 받은 이 사건은 나라 법에 의해 굳게 닫혀 있던 복음의 문을 슬그머니 열어 놓는 효과를 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실정법으로는 선교와 외국인의 조선 내의 거주가 불가능하였지만 이 사건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와 외국 선교사의 조선 내 거주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그 박해 사건 이후에는 관리들에 의해 묵인되어 포교와 선교사들의 조선 내 거주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하심은 박해를 통하여 굳게 닫힌 선교의 문을 여시고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심게 하셨고 그 씨가 자라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
그 때 토마스 선교사가 가지고 간 한문 성경과 전도지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 후 만주에서 선교하던 로스(John Ross) 목사와 맥킨타이어(John Macintire) 목사의 전도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조선에 전파되어 기독교 신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1887년에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Appenzeller)가 평양을 방문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가 평양, 의주 등지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2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 봄에 조선정부는‘포교금지령’을 내려 선교활동을 막았습니다. 1894년 2월 17일에 의료선교를 하던 홀(Hall) 선교사의 집에 그 동리 김낙구라는 사람이 마을 사람 20여명을 데리고 찾아가 성황제를 지낼 비용을 거두러왔으니 수렴을 많이 하여 달라고 하면서 협조하지 않으면 좋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홀 선교사는 우상에게 제사하는 일에 협조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 때 통역을 맡았던 노병선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가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이들의 집요한 방해와 뇌물과 공작으로 평양감사 민병석은 1894년 5월 10일 목요일 새벽닭이 두 번 울 때 신자들이 함께 잠자던 예배당 숙사를 기습하여 어명이라고 사칭하며 신자들을 포승줄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명부를 빼앗아 신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던 중 체포당시 자기는 불신자라고 하던 송서린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그를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난타 하였습니다. 이것이 조선에서 개신교가 관에 의해 박해를 받은 최초의 사건입니다.
그 때 언더우드, 마펫(Samuel Austin Moffett), 스크렌톤 선교사들이 영.미 공사에 진정하여 영국 총영사 Gardner와 미국 공사 Sill이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사건 발생 이틀만인 5월 11일에 잡혀갔던 신자들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관리들은 체포 구금하였던 신자들에게 일일이 배교를 강요하여 석방하였는데, 체포당시 가장 많은 수난을 당했던 김창식의 메모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예방비장 신덕균씨가 분부하되 너희들을 죽일터이로되 내 용서하고 물어볼 말이 있노라 너희가 이제라도 나아가서 도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욕하면 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고 하나씩 물을새 처음 김세호에게 물은대 하나님을 욕하고 또 홍종대에게 물은대 하나님을 욕하고 또 한석지에게 물은대 하나님을 욕하고 그 다음 내게 왔노니 내 마음이 대단히 분하고 원통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욕할 수 없다 하니 그 놈들이 좌우에서 대단 때리며 욕하라 하며 무수히 난타하매 신덕균씨가 내보내라 하니 문 밖으로 끌고 나오매 마침 교우의 도움으로 도망하여 왔소.”
이렇게 하여 신자들이 석방 된 후에 영.미 공사에서는 조선 정부 기관에 강력히 항의 하여 이 사건에 대한 해명과 배상을 요구하여 500불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하였고, 이 사건에 관련 된 평양 감사 민병석 휘하의 몇몇 관리들도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어떤 역사 기록은 국왕 고종의 어명에 의해서 체포되었던 자들이 석방되었다고 하지만 그 같은 기록은 과장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발생과 해결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상황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선교사들이나 영.미 공사들의 고압적 외교자세, 둘째 조선 외아문(지금의 외무부)의 굴욕적 대응태도, 셋째 조선 관리들의 부패성, 넷째 민중들의 외국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의식 등은 반성하고 교훈삼아야 할 점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으로 조선 선교에 대단히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조선에 들어간 기독교가 최초로 관에 의한 박해를 받은 이 사건은 나라 법에 의해 굳게 닫혀 있던 복음의 문을 슬그머니 열어 놓는 효과를 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실정법으로는 선교와 외국인의 조선 내의 거주가 불가능하였지만 이 사건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와 외국 선교사의 조선 내 거주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그 박해 사건 이후에는 관리들에 의해 묵인되어 포교와 선교사들의 조선 내 거주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하심은 박해를 통하여 굳게 닫힌 선교의 문을 여시고 조선 땅에 복음의 씨를 심게 하셨고 그 씨가 자라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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