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알기 위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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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07-02-1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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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을 크레타 사람이 했기 때문에 논리가 복잡해집니다. 기원전 6세기경에 크레타 사람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가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에피메니데스 자신도 거짓말쟁이고 따라서 그가 한 말도 거짓말일 테니까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에피메니데스가 제기한 “거짓말쟁이가 한 거짓말은 참말이다”라는 논리로 후대에 ‘거짓말쟁이 역설(The Liar Paradox)’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반대 불일치’의 논리라면 에피메니데스의 논리는 ‘반대 일치(coincidence of opposite)’의 논리인 셈입니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논리학, 기하학. 통계학 등 수학의 각 분야에 걸쳐 등장하며 마술사의 묘기와도 같은 오락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패러독스는 명백히 거짓인 것처럼 보이지만 참인 명제가 있고, 그 반대로 명백히 참인 것처럼 보이지만 거짓인 명제가 있는가 하면 전혀 오류가 없지만 나중에 논리적 모순에 봉착하는 추론과 같은 것들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에는 교수형의 패러독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국경을 넘어 온 사람을 붙잡고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느냐?”고 물어서 만일 붙잡힌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교수형에 처해버리는 나라에 동키호테의 종인 산초가 총독으로 등장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국경을 넘어오다 붙잡히자 그는 말하기를 “나는 교수형을 당하러 여기에 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는 바람에 그 나라에서는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면 나라 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야 하고, 그렇다고 그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그가 한 말이 맞는 말이 되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법을 어기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처한 상황에서 “골치 아프니까 풀어 줘라”라는 판결을 내려 그 사람은 석방되었습니다.
논리라는 것은 가끔 이러한 패러독스에 걸려 맥을 못 추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령 어떤 책이 있는데 첫 페이지를 열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마치 에피메니데스가 제기한 “거짓말쟁이 역설”과 같은 것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라는 말도 바로 그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반대의 일치 논리라고 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성경도 이런 패러독스에 속한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바로 그 성경이 “이 책 속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이다.”라고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라는 사실을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말이 안 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내용이 많습니다. 성경은 기초적이고 중요한 내용일수록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라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이나 안셀무스 같은 이들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m)고 하였던 것입니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은 믿으면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인 성경 말씀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후 2세기 경의 터툴리아누스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성주의자들에게 심한 공격과 무시를 당하였지만 정통 교회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져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워주었고 하나님과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과 합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무모하고 위험한 태도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순전히 자기의 상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성경 해석의 원칙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불분명한 말씀은 분명한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데까지만 나아가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상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 방법은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무조건 쓸데없다고 하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과 지식이 너무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오류를 피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성은 창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무신론자 니체도 “이성은 창녀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도 이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성을 하늘 같이 믿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경의 내용들을 합리적 상식으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성령을 믿고 의지하여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큰 뜻에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맞추려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모두에게 덕이 되며 자신에게 복이 되어 불필요한 갈등과 고통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믿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을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져 우리를 교만하지 못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이러한 패러독스는 논리학, 기하학. 통계학 등 수학의 각 분야에 걸쳐 등장하며 마술사의 묘기와도 같은 오락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많은 흥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패러독스는 명백히 거짓인 것처럼 보이지만 참인 명제가 있고, 그 반대로 명백히 참인 것처럼 보이지만 거짓인 명제가 있는가 하면 전혀 오류가 없지만 나중에 논리적 모순에 봉착하는 추론과 같은 것들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에는 교수형의 패러독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국경을 넘어 온 사람을 붙잡고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느냐?”고 물어서 만일 붙잡힌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면 교수형에 처해버리는 나라에 동키호테의 종인 산초가 총독으로 등장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국경을 넘어오다 붙잡히자 그는 말하기를 “나는 교수형을 당하러 여기에 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는 바람에 그 나라에서는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면 나라 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야 하고, 그렇다고 그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그가 한 말이 맞는 말이 되기 때문에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법을 어기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처한 상황에서 “골치 아프니까 풀어 줘라”라는 판결을 내려 그 사람은 석방되었습니다.
논리라는 것은 가끔 이러한 패러독스에 걸려 맥을 못 추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령 어떤 책이 있는데 첫 페이지를 열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쓰여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마치 에피메니데스가 제기한 “거짓말쟁이 역설”과 같은 것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라는 말도 바로 그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반대의 일치 논리라고 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성경도 이런 패러독스에 속한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바로 그 성경이 “이 책 속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이다.”라고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라는 사실을 바로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말이 안 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내용이 많습니다. 성경은 기초적이고 중요한 내용일수록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라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이나 안셀무스 같은 이들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m)고 하였던 것입니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은 믿으면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인 성경 말씀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후 2세기 경의 터툴리아누스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성주의자들에게 심한 공격과 무시를 당하였지만 정통 교회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져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워주었고 하나님과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성과 합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무모하고 위험한 태도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순전히 자기의 상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성경 해석의 원칙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불분명한 말씀은 분명한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데까지만 나아가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상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 방법은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무조건 쓸데없다고 하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과 지식이 너무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오류를 피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성은 창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무신론자 니체도 “이성은 창녀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도 이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성을 하늘 같이 믿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경의 내용들을 합리적 상식으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성령을 믿고 의지하여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큰 뜻에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맞추려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모두에게 덕이 되며 자신에게 복이 되어 불필요한 갈등과 고통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믿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을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져 우리를 교만하지 못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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