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하시는 성령님과 쓰임받는 은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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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흥용ㆍ2009-08-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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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 치료를 이용해서 복음을 잘못 전하거나 복음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경계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치료 능력을 신학적 논리로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치료의 은사자들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고 비판의 목소리부터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멀쩡하게 기성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 분까지 자신이 옳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 신학을 쭉 나열합니다. 이런 류의 목소리들에서는 어떤 사명감까지 느껴집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신학적 다양성으로 이해하며 읽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비판을 읽다 보면 다분히 인신 공격적인 내용이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입는 옷이 어떻다, 말투가 어떻다, 손짓이 어떻다, 현수막에 왜 자기 사진을 넣느냐? 현수막에 자기의 이름을 크게 넣은 것이 마음에 안든다 등등 객관적인 비평이 아닌 편향적이고도 매우 일방적인 비판과 비난 그리고 비방의 수준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입니다. 구체적인 표현들을 여기에 옮기는 것이 민망할 정도입니다.
이런 류의 글을 쓰는 분들중에는 불행하게도 신학 교육을 받고 있거나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하긴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뭘 알아야 어런 글도 쓸 수 있으니까 당연한 것인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이런 비판의 글들을 수용하기에 앞서서 딱 두 가지를 점거해 보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이러한 비판자들 스스로가 혹시 편협하고도 바리세적인 율법에 빠져서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둘째, 비평의 내용속에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배려가 있는지를 찾아 보십시오.
남에 대해서 도가 넘는 지나친 비판의 말과 글을 쓰는 분들에게도 성경적인 지식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비평의 내면에는 자기 교만도 함께 내재합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자기 교만은 곧 열등감과 같은 동격입니다. 자신이 가진 상처와 열등 의식을 지적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내세우고 방어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적인 지식을 내세워 상대를 비판하고, 자신을 방어하면서, 자신이 받았던 깊은 상처만큼 남에게 상처를 주는 병든 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논쟁하려는 것은 사실은 이단이냐 삼단이냐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상처받은 영혼임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분들이야 말로 성령의 치료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몸이 아파본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대부분 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찾아가고,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고, 심한 경우에는 수술을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의 병이 하나님이 주신 무슨 훈장같은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부터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에 동감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안타까움을 전하는 위로의 말과 치료의 방법을 찾는 노력을 먼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안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겠죠. 전 믿음 좋다는 분들중에서도 죽을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감사기도를 먼저 드렸다는 분들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실에 대한 충격과 복잡한 감정변화를 먼저 경험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 것입니다. “죽는 것이 더 좋다", "죽어도 감사하다", "아픈 지금이 더 좋다" 등의 말이 환자 스스로 나올 정도가 되었다면 그 분은 이미 많은 심적인 처리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요즘은 몸이 안아파도 예방차원에서 정기검진을 권장하는 세상입니다. 병없이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멀쩡한 사람도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 먹으려고 하고, 용하다는 의원이나 민간요법은 다 해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몸이 아프거나 장애인의 경우에 병으로 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이런 모든 분들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보시고 성령께서 목회자들과 은사자들을 통해서 치료해 주길 원하십니다.
이시대의 성도들이 성령치료를 바로 볼 수 있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이면서도 전인격적인 가르침과 영적 분별력이 요구 됩니다. 교인들이 성령치료를 올바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무조건적 반대보다 지혜롭게 인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아픈자를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의 분이십니다.
지금도 이를 위해서 일하도록 목회자들과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치료의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성령의 치유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시며, 이를 통해서 우리로 부터 영광을 받고자 원하십니다. 성령의 치료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멀쩡하게 기성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 분까지 자신이 옳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 신학을 쭉 나열합니다. 이런 류의 목소리들에서는 어떤 사명감까지 느껴집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신학적 다양성으로 이해하며 읽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비판을 읽다 보면 다분히 인신 공격적인 내용이 함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입는 옷이 어떻다, 말투가 어떻다, 손짓이 어떻다, 현수막에 왜 자기 사진을 넣느냐? 현수막에 자기의 이름을 크게 넣은 것이 마음에 안든다 등등 객관적인 비평이 아닌 편향적이고도 매우 일방적인 비판과 비난 그리고 비방의 수준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입니다. 구체적인 표현들을 여기에 옮기는 것이 민망할 정도입니다.
이런 류의 글을 쓰는 분들중에는 불행하게도 신학 교육을 받고 있거나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하긴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뭘 알아야 어런 글도 쓸 수 있으니까 당연한 것인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이런 비판의 글들을 수용하기에 앞서서 딱 두 가지를 점거해 보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이러한 비판자들 스스로가 혹시 편협하고도 바리세적인 율법에 빠져서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둘째, 비평의 내용속에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배려가 있는지를 찾아 보십시오.
남에 대해서 도가 넘는 지나친 비판의 말과 글을 쓰는 분들에게도 성경적인 지식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의 비평의 내면에는 자기 교만도 함께 내재합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자기 교만은 곧 열등감과 같은 동격입니다. 자신이 가진 상처와 열등 의식을 지적 표현을 통해서 자신을 내세우고 방어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적인 지식을 내세워 상대를 비판하고, 자신을 방어하면서, 자신이 받았던 깊은 상처만큼 남에게 상처를 주는 병든 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논쟁하려는 것은 사실은 이단이냐 삼단이냐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상처받은 영혼임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이분들이야 말로 성령의 치료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몸이 아파본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대부분 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몸이 아프면, 의사에게 찾아가고,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고, 심한 경우에는 수술을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의 병이 하나님이 주신 무슨 훈장같은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부터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에 동감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안타까움을 전하는 위로의 말과 치료의 방법을 찾는 노력을 먼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안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겠죠. 전 믿음 좋다는 분들중에서도 죽을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감사기도를 먼저 드렸다는 분들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실에 대한 충격과 복잡한 감정변화를 먼저 경험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 것입니다. “죽는 것이 더 좋다", "죽어도 감사하다", "아픈 지금이 더 좋다" 등의 말이 환자 스스로 나올 정도가 되었다면 그 분은 이미 많은 심적인 처리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요즘은 몸이 안아파도 예방차원에서 정기검진을 권장하는 세상입니다. 병없이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멀쩡한 사람도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 먹으려고 하고, 용하다는 의원이나 민간요법은 다 해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몸이 아프거나 장애인의 경우에 병으로 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이런 모든 분들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보시고 성령께서 목회자들과 은사자들을 통해서 치료해 주길 원하십니다.
이시대의 성도들이 성령치료를 바로 볼 수 있는 목회자들의 성경적이면서도 전인격적인 가르침과 영적 분별력이 요구 됩니다. 교인들이 성령치료를 올바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무조건적 반대보다 지혜롭게 인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아픈자를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의 분이십니다.
지금도 이를 위해서 일하도록 목회자들과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치료의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성령의 치유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시며, 이를 통해서 우리로 부터 영광을 받고자 원하십니다. 성령의 치료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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