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보다 주현절 맞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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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6-01-0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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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나 년 초가 되면 방송들이 송구영신 행사들을 뉴스로 보도합니다. 한국에서는 종로 보신각에, 이곳 미국 뉴욕에는 타임스퀘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송구영신의 행사를 합니다. 새 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보려고 바닷가로 또는 높은 산을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이 있나 봅니다. 해돋이 명소나 해넘이 명소를 찾아 소원을 비는 것이 딱히 신앙적 행위는 아니고, 단순히 자연을 감상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스도인이 이런 풍속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합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는데,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며 지난 일들을 반성하고 새 해의 복을 비는 것과 해돋이나 해넘이를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풍속도는 전통 교회가 가르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정신을 따른 것도 아닙니다.
사건 사고나 문화나 운동이나 유행이 지배적일 때 그리스도인은 개혁적 청개구리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청개구리는 무조건 부모의 뜻에 불순종 하는 행동이 어리석음을 가르치는 상징이지만 개혁적 청개구리는 하나님 나라 정신으로 “세상을 본 받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좇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것이 좁은 길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설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타락을 전제할 때 세상에서는 소수보다는 다수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수보다 진리라는 초월적 가치를 따릅니다. 물론 진리란 민주적 가치를 초월하는 것이지 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란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영향을 받는 것으로서 필요하기도 하고 또한 일반은총으로 감사와 향유의 대상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어떤 문화가 나쁘지 않아도 그 문화에 지나치게 지배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인간이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행위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기업과 미디어는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유행과 새로운 풍속을 만들어냅니다. 미디어는 정치, 법, 정의, 스포츠, 문화의 보편 가치를 강조하여 세우기보다 돈을 벌기 위해 선동적이고 선정적인 방법으로 분별없이 이용합니다. 방송이 정치 참여나 시민운동이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비정상적으로 부추겨 일종의 유사 종교 운동이 되게 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야 할 신문이나 방송은 정치 경제 문화를 통해 인류의 보편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런데 방송이 미신을 조장하고 갈등을 심화시키며 정당들과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분쟁을 부추기는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발전을 강조하기 위해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은 갈등을 유발하며 갈등은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 번 시작된 분쟁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습니다. 분쟁의 원인을 역 추적하면 발전이 분쟁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발전 자체를 분쟁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분쟁의 원인은 발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닉하는 인간의 지나친 욕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 해 초두에 사람들의 주된 관심을 자세히 살펴보아서 개혁적 청개구리로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풍속과 문화가 성경적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쁘지 않다고 따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세가 아닙니다. 방송들은 새 해 맞는 분위기를 만들고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휩싸이는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력에 따라 주현절에 마음을 쏟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12월 마지막 주일로 대림절이 끝나고 1월 첫 주부터는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은 2월 둘째 주일까지입니다.
주후 2세기에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는 1월 6일을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이 날도 본래 이방 종교의 축제일이었습니다. 또한 후에 로마에서 발전한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이 주현절도 그 기원이 이교도의 축제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력에서 주현절은 부활절과 오순절 다음으로 오래 된 절기입니다. 주현이란 주님의 오심을 의미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이 주현이라는 단어((Epiphanie)를 신이 세상에 나타남과 한 통치자가 어떤 한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헬라 교부들은 이 단어를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을 말할 때에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빛을 상징하는 의미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주현절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를 경축하는 절기로 지켰고, 서방교회에서는 새로운 왕의 탄생과 관련시켜 지켰습니다. 중세 독일에서는 동방박사들의 유물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독일 퀄른으로 옮겨진 것을 계기로 주현절을 매우 중요한 절기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1월 6일을 “세 동방박사의 날”, 또한 “주현의 날”로 명명하였습니다. 루터도 이 절기에 주님의 세례를 강조하였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주현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강조하여 세례를 줍니다. 서유럽 나라들은 크리스마스와 이 주현절 중간기간을 휴일로 지키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와 주현절 사이에 있는 금요일은 금식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중세 영국에서는 주현절 다음 월요일이 “밭갈이 월요일(Plough Monday)”로, 밭갈이가 시작되는 날이었고, 경작하고 파종하는 일에 창조주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 역사를 더듬어 보면 전통 교회는 새 해맞이보다 주현절 지키는 일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년말연시에 송구영신, 해맞이 등 세속적 분위기가 주도적인 이때에 교회는 교회력을 따라 주현절을 지키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유익하리라 여겨집니다. 주현절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 또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념하고 그 뜻을 배워서 주님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고 또한 왕으로 오신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생활을 강조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세 명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천문학자들이지만 점성가들입니다. 당시 점성가는 하늘의 별을 보고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예고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런 점성술을 미신으로 무시하지만 고대 점성가들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에는 점성술이 지금의 과학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늘의 별을 관찰하다가 의미심장한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학문적 연구와 노하우를 가지고 그 별의 의미가 왕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이상한 별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리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은 단순히 문헌연구나 점성술의 노하우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별을 따라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동방이란 지금의 이라크나 이란이라고 합니다. 인도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멀리서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있는지를 수소문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 낯선 이들의 방문으로 온통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이방인들에 의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건 상관없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은 모두를 흥분시켰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와 주권을 잃고 살아온 한 많은 긴 세월이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그들을 들뜨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유대인의 왕인 헤롯입니다. 자기가 왕인데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반란을 예고하는 것이니까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확인까지 하였습니다. 헤롯은 내심 충격을 받았을 것이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조용히 동방박사들을 불러 자기도 그 아기 왕께 경배하려고 하니까 돌아가는 길에 아기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헤롯은 겉으로는 자기도 경배하려 한다고 하였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헤롯은 그 일을 은밀히 진행시켰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헤롯왕에게 들려서 아기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아기를 살해하려는 결심을 천사가 동방 박사들에게 귀띔해 주어 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은 복음서를 비롯하여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수 없이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알려주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그를 믿는 많은 이들의 고백으로도 증거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비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는 바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았다는 사실은 아기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음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점점 자라서 유대인의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태어나실 때 이미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탄생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고 또한 정죄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위에 붙여 놓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는 예수님을 조롱하려는 의도로 붙여놓았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그것이 만고의 진리입니다.
헤롯, 로마 정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백성들까지도 왕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세속적 메시아를 기대하지만 참 메시야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경제적 풍요에 안주하여 더 큰 복만 추구하는 현대인의 가치관이 새 해 인사에 잘 반영되고 있습니다. 불신자나 그리스도인이나 새해 인사는 복을 비는 인사입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보다 차원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방의 점성술사인 동방의 박사들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의 왕이 어디 계시냐?”고 묻습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강조하는 절기입니다. 지금의 교회 풍속도로 보아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지 못하고 배척을 받으시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닌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로 주현절을 맞이하여 주님을 왕으로 잘 섬기는 한 해가 되도록 하십시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 2:2 -
사건 사고나 문화나 운동이나 유행이 지배적일 때 그리스도인은 개혁적 청개구리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청개구리는 무조건 부모의 뜻에 불순종 하는 행동이 어리석음을 가르치는 상징이지만 개혁적 청개구리는 하나님 나라 정신으로 “세상을 본 받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좇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것이 좁은 길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설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타락을 전제할 때 세상에서는 소수보다는 다수라는 민주주의 원칙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수보다 진리라는 초월적 가치를 따릅니다. 물론 진리란 민주적 가치를 초월하는 것이지 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란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영향을 받는 것으로서 필요하기도 하고 또한 일반은총으로 감사와 향유의 대상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어떤 문화가 나쁘지 않아도 그 문화에 지나치게 지배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인간이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문화적 행위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기업과 미디어는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유행과 새로운 풍속을 만들어냅니다. 미디어는 정치, 법, 정의, 스포츠, 문화의 보편 가치를 강조하여 세우기보다 돈을 벌기 위해 선동적이고 선정적인 방법으로 분별없이 이용합니다. 방송이 정치 참여나 시민운동이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비정상적으로 부추겨 일종의 유사 종교 운동이 되게 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야 할 신문이나 방송은 정치 경제 문화를 통해 인류의 보편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런데 방송이 미신을 조장하고 갈등을 심화시키며 정당들과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분쟁을 부추기는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발전을 강조하기 위해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은 갈등을 유발하며 갈등은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 번 시작된 분쟁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습니다. 분쟁의 원인을 역 추적하면 발전이 분쟁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발전 자체를 분쟁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분쟁의 원인은 발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닉하는 인간의 지나친 욕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 해 초두에 사람들의 주된 관심을 자세히 살펴보아서 개혁적 청개구리로 처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풍속과 문화가 성경적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쁘지 않다고 따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세가 아닙니다. 방송들은 새 해 맞는 분위기를 만들고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휩싸이는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교회력에 따라 주현절에 마음을 쏟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12월 마지막 주일로 대림절이 끝나고 1월 첫 주부터는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은 2월 둘째 주일까지입니다.
주후 2세기에 소아시아와 이집트에서는 1월 6일을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이 날도 본래 이방 종교의 축제일이었습니다. 또한 후에 로마에서 발전한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이 주현절도 그 기원이 이교도의 축제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력에서 주현절은 부활절과 오순절 다음으로 오래 된 절기입니다. 주현이란 주님의 오심을 의미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이 주현이라는 단어((Epiphanie)를 신이 세상에 나타남과 한 통치자가 어떤 한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헬라 교부들은 이 단어를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을 말할 때에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빛을 상징하는 의미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주현절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를 경축하는 절기로 지켰고, 서방교회에서는 새로운 왕의 탄생과 관련시켜 지켰습니다. 중세 독일에서는 동방박사들의 유물이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독일 퀄른으로 옮겨진 것을 계기로 주현절을 매우 중요한 절기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1월 6일을 “세 동방박사의 날”, 또한 “주현의 날”로 명명하였습니다. 루터도 이 절기에 주님의 세례를 강조하였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주현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강조하여 세례를 줍니다. 서유럽 나라들은 크리스마스와 이 주현절 중간기간을 휴일로 지키기도 합니다. 크리스마스와 주현절 사이에 있는 금요일은 금식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중세 영국에서는 주현절 다음 월요일이 “밭갈이 월요일(Plough Monday)”로, 밭갈이가 시작되는 날이었고, 경작하고 파종하는 일에 창조주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 역사를 더듬어 보면 전통 교회는 새 해맞이보다 주현절 지키는 일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년말연시에 송구영신, 해맞이 등 세속적 분위기가 주도적인 이때에 교회는 교회력을 따라 주현절을 지키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유익하리라 여겨집니다. 주현절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 또한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기념하고 그 뜻을 배워서 주님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고 또한 왕으로 오신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생활을 강조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세 명의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천문학자들이지만 점성가들입니다. 당시 점성가는 하늘의 별을 보고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예고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런 점성술을 미신으로 무시하지만 고대 점성가들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에는 점성술이 지금의 과학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늘의 별을 관찰하다가 의미심장한 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학문적 연구와 노하우를 가지고 그 별의 의미가 왕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이상한 별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리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은 단순히 문헌연구나 점성술의 노하우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별을 따라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동방이란 지금의 이라크나 이란이라고 합니다. 인도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멀리서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있는지를 수소문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 낯선 이들의 방문으로 온통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이방인들에 의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건 상관없이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은 모두를 흥분시켰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와 주권을 잃고 살아온 한 많은 긴 세월이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그들을 들뜨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문에 위기를 느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유대인의 왕인 헤롯입니다. 자기가 왕인데 새로운 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반란을 예고하는 것이니까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확인까지 하였습니다. 헤롯은 내심 충격을 받았을 것이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조용히 동방박사들을 불러 자기도 그 아기 왕께 경배하려고 하니까 돌아가는 길에 아기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헤롯은 겉으로는 자기도 경배하려 한다고 하였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헤롯은 그 일을 은밀히 진행시켰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헤롯왕에게 들려서 아기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아기를 살해하려는 결심을 천사가 동방 박사들에게 귀띔해 주어 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은 복음서를 비롯하여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수 없이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알려주었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그를 믿는 많은 이들의 고백으로도 증거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비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는 바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았다는 사실은 아기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음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점점 자라서 유대인의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태어나실 때 이미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탄생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고 또한 정죄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위에 붙여 놓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는 예수님을 조롱하려는 의도로 붙여놓았지만 아니러니 하게도 그것이 만고의 진리입니다.
헤롯, 로마 정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백성들까지도 왕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세속적 메시아를 기대하지만 참 메시야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경제적 풍요에 안주하여 더 큰 복만 추구하는 현대인의 가치관이 새 해 인사에 잘 반영되고 있습니다. 불신자나 그리스도인이나 새해 인사는 복을 비는 인사입니다. 서로를 축복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보다 차원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방의 점성술사인 동방의 박사들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의 왕이 어디 계시냐?”고 묻습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강조하는 절기입니다. 지금의 교회 풍속도로 보아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지 못하고 배척을 받으시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닌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로 주현절을 맞이하여 주님을 왕으로 잘 섬기는 한 해가 되도록 하십시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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