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고 기뻐할 이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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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5-12-2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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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천 6백여 년 전 유대 나라는 변화의 격랑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는 앗수르가 지배하고 있었으나 신흥 제국 바벨론의 세력이 점점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모하리만치 앗수르에 저항하였지만 남 유대는 조공을 바치며 비굴한 외교로 거의 100여 년을 버텨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는 점점 힘이 약해지고 새로운 제국 바벨론은 점점 강해져서 결국 앗수르 제국을 무너뜨리고 주전 587년에는 유대까지 정복하였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스바냐는 앗수르가 베벨론에 의해 무너지기 전에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로 보아 앗수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 동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비굴한 외교로 버텨 오던 유대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유대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습니다. 이 때 유대가 취해야 할 선택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버텨 왔지만 이제는 바벨론을 섬겨야 합니다.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도 할 겨를도 없고 발 빠르게 힘이 강한 바벨론에 아부를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너무나 엄청난 현실이기 때문에 선지자라고 하여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유대는 외교적 노력을 해 볼 겨를도 없이 바벨론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집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이 상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앗수르가 망하고 베벨론이 부상하는 것을 단순히 국제 질서의 개편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로 본 것입니다(습 1:4-6).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바벨론 제국의 지배아래 들어가고 주권과 신앙의 정체성마저 처참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스바냐 선지자는 제국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벨론이 의롭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앗수르도 심판하시고 또한 나중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바벨론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베벨론 제국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들려 유대를 심판하는 도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신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나 나라도 필요에 따라 쓰십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유대와 예루살렘의 죄는 우상숭배와 불의입니다. 모든 우상은 재물과 관련이 있고 재물은 인간의 욕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우상숭배는 단순히 이상하게 생긴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피조물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우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 권력, 쾌락, 명예, 인기 등이 모두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은 대표적인 우상입니다. 돈이 곧 힘이고 능력이라는 사실이 교회에서도 너무나 확실하게 증명됩니다. 돈만 좀 있으면 인격이 좀 모자라고 수준이 낮아도 그 앞에 모두 허리를 굽힙니다. 돈의 이런 능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삶을 의롭게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의와 진리의 편에 줄을 서는 게 아니라 돈과 진영에 따라 줄을 섭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겨도 당장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돈이 우상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알이 하루아침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앉은 게 아닙니다. 바알을 섬겨도 괜찮으니까 조금씩 성전 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화려한 예배당이나 교회의 비자금이나 목회자의 세습도 같은 과정을 통해서 정당화 되고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결국 인간 삶을 불의하게 만듭니다. 돈이 우상이라는 것은 돈이 최고의 가치라는 의미입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돈을 위해서는 어떤 행위도 정당화되기 때문에 삶이 불의하게 됩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국방, 종교, 이념, 노동쟁의, 민주화, 사회사업, 구제, 선교, 심지어 혼인까지 우리 삶의 어느 것 하나 돈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었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돈이 절대 가치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추상적으로 밖에 작동하지 않고 돈은 실제적으로 작동합니다. 2천 6백여 년 전의 유대나 오늘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바벨론이 앗수를 무너뜨리고 유대를 무참히 무너뜨린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심판 중에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긍휼은 온 나라와 민족이 우상에 빠져 있는 중에도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이들을 남겨 두셨다(습 3:12, 13)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남은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인데 국가와 민족이 지리멸렬되는 상황에서도 악을 행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먹고 평안히 잠을 잘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요? 스바냐는 그 가능성을 선포합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모든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와 부자들은 더 불안합니다. 국제 질서가 개편되고 유대가 섬겨야 할 주인이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바뀝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가 그를 믿는 남은 자들에게 선포됩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노래하라! 기뻐하라!’ 입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많은 백성들이 죽고 포로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우상을 섬기지 않은 남은 자들이라고 안전할 리 없습니다. 화는 그들에게도 미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노래하라,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노래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집과 성전은 무너지고 가족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 갑니다. 유대 사람은 나라와 주권을 잃었습니다. 집도 잃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춥고 배고프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뿐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가 노래하라 기뻐하라고 한 메시지는 이 모든 것도 결국은 지나간다는 전제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길게 보아야 합니다. 길게 보아도 내일에 대한 보장이 없으면 노래하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은 결국 다 지나간다는 전제에서 그들이 진정 노래하고 기뻐할 일이 예비 되어 있음을 일러 줍니다.
스바냐가 제시하는 노래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는 첫째,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당장 강도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는데 경찰이 멀리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강도가 자주 들어오는 가게에 무장 경찰이 잠복근무를 하고 있다가 강도를 잡았습니다. 경찰이 무장을 하고 잠복근무를 하고 있으니까 가게 주인은 강도가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잠복근무를 하고 계십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약속을 분명히 믿으면 실패나 환란이 두렵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도 원수보다 힘이 약하면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전능 자 하나님과 남은 자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과 그를 믿는 우리와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3:17절은 바로 그 관계를 설명합니다. “...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 하시시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이 전능자라고 해도 나와 가까운 관계가 아니면 소용없습니다. 나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아내와 손자 루카스와의 관계를 생각하였습니다. 아내는 루카스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시간만 나면 루카스 사진을 들여다보고 좋아합니다. 아내가 루카를 좋아하는 것은 루카스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똑똑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내가 루카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시는 이유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남도 아니고 똑똑함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손자 루카스를 좋아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몇 십 배 아니 몇 백배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만 생각하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신다니, 이것이 노래하고 기뻐할 이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 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사 49:15, 습 3:17
구약의 선지자 스바냐는 앗수르가 베벨론에 의해 무너지기 전에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로 보아 앗수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 동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비굴한 외교로 버텨 오던 유대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유대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습니다. 이 때 유대가 취해야 할 선택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버텨 왔지만 이제는 바벨론을 섬겨야 합니다.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도 할 겨를도 없고 발 빠르게 힘이 강한 바벨론에 아부를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너무나 엄청난 현실이기 때문에 선지자라고 하여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유대는 외교적 노력을 해 볼 겨를도 없이 바벨론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집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이 상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앗수르가 망하고 베벨론이 부상하는 것을 단순히 국제 질서의 개편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로 본 것입니다(습 1:4-6).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바벨론 제국의 지배아래 들어가고 주권과 신앙의 정체성마저 처참하게 무너지는 상황을 스바냐 선지자는 제국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벨론이 의롭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앗수르도 심판하시고 또한 나중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바벨론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베벨론 제국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들려 유대를 심판하는 도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신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나 나라도 필요에 따라 쓰십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유대와 예루살렘의 죄는 우상숭배와 불의입니다. 모든 우상은 재물과 관련이 있고 재물은 인간의 욕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우상숭배는 단순히 이상하게 생긴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피조물을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우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 권력, 쾌락, 명예, 인기 등이 모두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은 대표적인 우상입니다. 돈이 곧 힘이고 능력이라는 사실이 교회에서도 너무나 확실하게 증명됩니다. 돈만 좀 있으면 인격이 좀 모자라고 수준이 낮아도 그 앞에 모두 허리를 굽힙니다. 돈의 이런 능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삶을 의롭게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의와 진리의 편에 줄을 서는 게 아니라 돈과 진영에 따라 줄을 섭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겨도 당장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돈이 우상 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알이 하루아침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앉은 게 아닙니다. 바알을 섬겨도 괜찮으니까 조금씩 성전 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화려한 예배당이나 교회의 비자금이나 목회자의 세습도 같은 과정을 통해서 정당화 되고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모든 우상숭배는 결국 인간 삶을 불의하게 만듭니다. 돈이 우상이라는 것은 돈이 최고의 가치라는 의미입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돈을 위해서는 어떤 행위도 정당화되기 때문에 삶이 불의하게 됩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국방, 종교, 이념, 노동쟁의, 민주화, 사회사업, 구제, 선교, 심지어 혼인까지 우리 삶의 어느 것 하나 돈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었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돈이 절대 가치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추상적으로 밖에 작동하지 않고 돈은 실제적으로 작동합니다. 2천 6백여 년 전의 유대나 오늘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바벨론이 앗수를 무너뜨리고 유대를 무참히 무너뜨린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심판 중에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긍휼은 온 나라와 민족이 우상에 빠져 있는 중에도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이들을 남겨 두셨다(습 3:12, 13)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남은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인데 국가와 민족이 지리멸렬되는 상황에서도 악을 행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먹고 평안히 잠을 잘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할까요? 스바냐는 그 가능성을 선포합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모든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와 부자들은 더 불안합니다. 국제 질서가 개편되고 유대가 섬겨야 할 주인이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바뀝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가 그를 믿는 남은 자들에게 선포됩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노래하라! 기뻐하라!’ 입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많은 백성들이 죽고 포로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우상을 섬기지 않은 남은 자들이라고 안전할 리 없습니다. 화는 그들에게도 미칠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노래하라, 기뻐하라고 외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노래하고 기뻐할 수 있을까요? 집과 성전은 무너지고 가족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 갑니다. 유대 사람은 나라와 주권을 잃었습니다. 집도 잃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춥고 배고프고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뿐입니다.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가 노래하라 기뻐하라고 한 메시지는 이 모든 것도 결국은 지나간다는 전제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길게 보아야 합니다. 길게 보아도 내일에 대한 보장이 없으면 노래하고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은 결국 다 지나간다는 전제에서 그들이 진정 노래하고 기뻐할 일이 예비 되어 있음을 일러 줍니다.
스바냐가 제시하는 노래하고 기뻐해야 할 이유는 첫째,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당장 강도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는데 경찰이 멀리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강도가 자주 들어오는 가게에 무장 경찰이 잠복근무를 하고 있다가 강도를 잡았습니다. 경찰이 무장을 하고 잠복근무를 하고 있으니까 가게 주인은 강도가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잠복근무를 하고 계십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약속을 분명히 믿으면 실패나 환란이 두렵지 않습니다. 둘째,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도 원수보다 힘이 약하면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고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여기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전능 자 하나님과 남은 자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과 그를 믿는 우리와의 관계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스바냐 3:17절은 바로 그 관계를 설명합니다. “...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 하시시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그분이 전능자라고 해도 나와 가까운 관계가 아니면 소용없습니다. 나는 이 성경을 읽으면서 아내와 손자 루카스와의 관계를 생각하였습니다. 아내는 루카스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시간만 나면 루카스 사진을 들여다보고 좋아합니다. 아내가 루카를 좋아하는 것은 루카스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똑똑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내가 루카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시는 이유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남도 아니고 똑똑함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손자 루카스를 좋아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나를 몇 십 배 아니 몇 백배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만 생각하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신다니, 이것이 노래하고 기뻐할 이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 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사 49:15, 습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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