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보수 꼴통’보다 ‘진보 꼴통’이 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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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5-11-3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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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병철씨가 생전에 박희봉 신부에게 편지로 신과 세상과 인간 존재와 종교에 대하여 24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는 누군가 그 질문에 납득할만한 대답을 해 준다면 하나님을 믿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자신에 대해 매우 정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질문들은 인류가 줄곧 물어온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그 질문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해당되는 내용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런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설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예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저한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필요에 의해서 요청 또는 가정(假定)으로서의 신을 인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가장 정직한 태도는 하나님을 믿고 싶은 자신의 종교적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나 그 외의 유명한 이들 중에도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이름을 들어도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자들이 많지만 이름을 들으면 대충 알만한 무신론자는 프리드리히 니체, 버트런드 러셀,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나플라스, 프로이트, 리처드 도킨스, 스티브 호킹,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그 외에도 무신론자는 무수히 많습니다.
칸트 같은 천재 철학자나 볼테르 같은 철학자도 신이 있다고 가정을 해야 인간과 역사와 세상과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천체물리학자 나플라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가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현대의 거의 모든 진보주의자들이 이런 입장을 취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주장이 지식인들에게 어필합니다. 저는 이런 자들의 태도를 과학과 논리의 미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칼 막스와 엥겔스의 자본론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했고, 특히 지식인들이 역사와 정치에 대한 공산주의의 사회과학적 설명에 설득되고 열광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탁월한 사회과학적 설득력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 이론이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변화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과학과 합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역사는 그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 대신 인간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사회과학의 가치를 폄하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이 근대 사회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점은 지대합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 이는 마치 반사회적인 사이비 이단 종파에 빠진 맹신자들처럼 될 수 있고 그 한계와 모순을 감지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말에는 그것이 인간의 사상도 철학도 깨달음도 아니고 이론이나 과학이 아니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교육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교육이나 논리적 설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은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교육과 설득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기독교를 변증하고 설명하는 것은 교육이나 논리적 설명으로 그것을 믿게 하고 이해하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신적 개입(성령의 역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논리와 합리와 과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데, 극단적인 보수 기독교인들이 그런 것들을 무시하여 불신자들로부터 ‘보수 꼴통’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꼴통’이란 머리가 나쁜 사람을 비하하여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비하 뉘앙스의 수위로 보면 ‘바보’나 ‘멍청이’ 보다 높지만 ‘놈’이나 ‘년’보다는 낮은 표현입니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보수 꼴통’이라고 비난 받는 것이 무척 속상하고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보수 꼴통’이라고 비난 받는 이들의 태도가 기독교의 참 모습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처음부터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 착하고 건전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참 진리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잘못 된 기독교인들의 태도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가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사회과학적으로 사람들에게 설명되고 납득되어야 진리로 확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의를 더 이상 계속하는 것도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끊임없이 이런 논의를 계속 해 왔기 때문이고, 또한 그 논의에 의해 기독교 진리의 진위가 결정 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논의 자체를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할 수 있는 이런 방법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 인식의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인식까지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세계 내적 존재는 다 불완전합니다. 참 된 기독교인은 논리와 합리와 과학과 역사와 모든 지식과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 인식까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불완전해도 불완전하다는 사실 때문에 무시하지 않습니다. 사회과학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기독교인들을 보고 기독교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잘못된 기독교인들도 문제이지만 그들을 기독교 자체로 평가하는 것은 과학을 남용하는 것이고 오용하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을 좋아하는 이들은 과학 자체가 비과학적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간과하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이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어 지식인도‘진보 꼴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동쟁의나 반정부 시위 같은 것이 사회과학적 분석과 판단에 따른 정당성으로 출발했다가 일종의 유사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도 그 정당성이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바뀌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스마트한 지식인들의 논리에서 어느 순간에 그들의 논리가 일종의 유사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나는 교만하게도‘진보 꼴통’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어집니다. 악한 사람은 스스로를 선한 것처럼 가면을 쓰지만, 악하지 않지만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폐해를 끼치고 있는 다수의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현대의 지식은 너무 세분화 되어 원자주의(atomism)라는 부정적 경향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문 지식인이 다른 분야에 대해 무식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같은 물리학자 사이에도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 할 만큼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이 심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지식인은 과거의 지식인과 다릅니다. 고대 동서양의 지식인들은 모든 분야에 대해 통합된 지식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대 지식인은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하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수학적으로 세상을 설계했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있습니다. 예일 대학 출신의 피코버(Clifford A. Pickover) 박사는 그의 『하나님의 베틀(The Loom of God)』이라는 책에서 “하나님(God)이 수학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수학은 우주라는 천을 짜는 하나님의 베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의 한계가 어디인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학이나 수학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안 믿어도 수학이나 과학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안 믿으면 결국 자신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하나님 대신 인간을 믿는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거나 다스려도, 심지어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린다고 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보수 꼴통’은 자기 생각을 절대라고 생각하고 ‘진보 꼴통’역시 자기들의 생각이 절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불완전한 상대적 존재이고 하나님만 완전한 절대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화하는 순간 그 자신을 절대화 하는 것이고, 반대로 자신을 절대화 하는 순간 하나님을 상대화 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일반인이나 지식인이나 상당할 정도로 상대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상대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상대화 합니다. 기독교도 하나님 외의 것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상대화 합니다. 기독교와 상대주의의 차이는 상대화의 대상에 하나님을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의 달렸습니다. 상대주의는 하나님까지 상대화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 합니다. 기독교가 상대화의 대상에서 하나님을 제외하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주의가 상대주의 자체를 상대화 하지 않는 것은 상대주의 자체를 하나님처럼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주의 자들이 기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그 과학이 비과학적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진보적인 많은 지식인들이 과학적 미신(scientific superstition)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나의 주장이 논리적이나 학문적 권위를 갖지는 못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불완전함의 패러다임 안에서의 나름의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국정교과서 문제로 논쟁이 뜨겁습니다. 국정교과서 자체를 놓고 생각하면 그것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국정교과서 자체만을 문제 삼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나 어떤 단체라도 그 집단이 선택한 사상과 이념과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불완전하더라도 그 집단이 선택하고 표방하는 사상과 가치와 제도를 존중하고 그 가치의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허용되고 존중되고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패러다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혁명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들은 명분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계승 발전하는 방향의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패러다임을 부정하고 허무는 교육을 받고 있다고 많은 국민들이 염려하는 듯합니다.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이들은 그렇게 염려하는 국민은 무지하다고 할 것이고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국민은 훌륭하다고 할 것이지만 국민이 어리석어도 그런 논리적 말장난에 계속 속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여러 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한 번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여러 번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공산주의가 자신과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논리는 웬만하면 세울 수 있습니다. 반사회적 범죄자들에게도 나름의 자기 합리화의 논리가 있고, 떼 강도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정의와 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논리적 허용을 따라가면 안 되고 진리를 따라 가야 합니다.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대학교수들이나 학자들 중에 논리와 합리와 과학과 이론이라는 나무는 보지만 인간과 역사의 의미와 그 한계의 숲을 보지 못하는 ‘진보 꼴통’인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수 꼴통’인 분들은 대게 감정적이라서 그 부작용이 비교적 덜 위험하지만 ‘진보 꼴통’인 분들도 감정적이기는 하지만 ‘보수 꼴통’인 분들에 비해 더 이지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기 때문에 대중을 더 오랫동안 속일 수 있어서 그 폐해가 심각합니다. 인간 복지를 위하는 현대 과학 발전의 문제점 중 하나는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동성결혼이 그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논리와 합리와 과학을 좇아가다 인간은 스스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결과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알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니라.” - 겔 33:17 -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이나 그 외의 유명한 이들 중에도 무신론자들이 많습니다. 이름을 들어도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자들이 많지만 이름을 들으면 대충 알만한 무신론자는 프리드리히 니체, 버트런드 러셀,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나플라스, 프로이트, 리처드 도킨스, 스티브 호킹,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그 외에도 무신론자는 무수히 많습니다.
칸트 같은 천재 철학자나 볼테르 같은 철학자도 신이 있다고 가정을 해야 인간과 역사와 세상과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천체물리학자 나플라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가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현대의 거의 모든 진보주의자들이 이런 입장을 취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주장이 지식인들에게 어필합니다. 저는 이런 자들의 태도를 과학과 논리의 미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칼 막스와 엥겔스의 자본론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했고, 특히 지식인들이 역사와 정치에 대한 공산주의의 사회과학적 설명에 설득되고 열광했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탁월한 사회과학적 설득력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 이론이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변화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과학과 합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역사는 그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 대신 인간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사회과학의 가치를 폄하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이 근대 사회 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점은 지대합니다. 그러나 사회과학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 이는 마치 반사회적인 사이비 이단 종파에 빠진 맹신자들처럼 될 수 있고 그 한계와 모순을 감지하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라는 말에는 그것이 인간의 사상도 철학도 깨달음도 아니고 이론이나 과학이 아니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교육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교육이나 논리적 설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은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교육과 설득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기독교를 변증하고 설명하는 것은 교육이나 논리적 설명으로 그것을 믿게 하고 이해하게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신적 개입(성령의 역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논리와 합리와 과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데, 극단적인 보수 기독교인들이 그런 것들을 무시하여 불신자들로부터 ‘보수 꼴통’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꼴통’이란 머리가 나쁜 사람을 비하하여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비하 뉘앙스의 수위로 보면 ‘바보’나 ‘멍청이’ 보다 높지만 ‘놈’이나 ‘년’보다는 낮은 표현입니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보수 꼴통’이라고 비난 받는 것이 무척 속상하고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보수 꼴통’이라고 비난 받는 이들의 태도가 기독교의 참 모습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처음부터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 착하고 건전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참 진리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잘못 된 기독교인들의 태도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가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사회과학적으로 사람들에게 설명되고 납득되어야 진리로 확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의를 더 이상 계속하는 것도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끊임없이 이런 논의를 계속 해 왔기 때문이고, 또한 그 논의에 의해 기독교 진리의 진위가 결정 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논의 자체를 존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할 수 있는 이런 방법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 인식의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인식까지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세계 내적 존재는 다 불완전합니다. 참 된 기독교인은 논리와 합리와 과학과 역사와 모든 지식과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 인식까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불완전해도 불완전하다는 사실 때문에 무시하지 않습니다. 사회과학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기독교인들을 보고 기독교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잘못된 기독교인들도 문제이지만 그들을 기독교 자체로 평가하는 것은 과학을 남용하는 것이고 오용하는 것입니다. 사회과학을 좋아하는 이들은 과학 자체가 비과학적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실을 간과하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이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어 지식인도‘진보 꼴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동쟁의나 반정부 시위 같은 것이 사회과학적 분석과 판단에 따른 정당성으로 출발했다가 일종의 유사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도 그 정당성이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바뀌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스마트한 지식인들의 논리에서 어느 순간에 그들의 논리가 일종의 유사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나는 교만하게도‘진보 꼴통’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어집니다. 악한 사람은 스스로를 선한 것처럼 가면을 쓰지만, 악하지 않지만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인식하지 못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폐해를 끼치고 있는 다수의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현대의 지식은 너무 세분화 되어 원자주의(atomism)라는 부정적 경향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문 지식인이 다른 분야에 대해 무식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같은 물리학자 사이에도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 할 만큼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이 심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지식인은 과거의 지식인과 다릅니다. 고대 동서양의 지식인들은 모든 분야에 대해 통합된 지식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대 지식인은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하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수학적으로 세상을 설계했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있습니다. 예일 대학 출신의 피코버(Clifford A. Pickover) 박사는 그의 『하나님의 베틀(The Loom of God)』이라는 책에서 “하나님(God)이 수학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수학은 우주라는 천을 짜는 하나님의 베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수학이나 과학의 한계가 어디인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학이나 수학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안 믿어도 수학이나 과학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안 믿으면 결국 자신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하나님 대신 인간을 믿는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거나 다스려도, 심지어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린다고 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보수 꼴통’은 자기 생각을 절대라고 생각하고 ‘진보 꼴통’역시 자기들의 생각이 절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불완전한 상대적 존재이고 하나님만 완전한 절대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화하는 순간 그 자신을 절대화 하는 것이고, 반대로 자신을 절대화 하는 순간 하나님을 상대화 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일반인이나 지식인이나 상당할 정도로 상대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상대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상대화 합니다. 기독교도 하나님 외의 것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상대화 합니다. 기독교와 상대주의의 차이는 상대화의 대상에 하나님을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의 달렸습니다. 상대주의는 하나님까지 상대화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상대화 합니다. 기독교가 상대화의 대상에서 하나님을 제외하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주의가 상대주의 자체를 상대화 하지 않는 것은 상대주의 자체를 하나님처럼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주의 자들이 기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그 과학이 비과학적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진보적인 많은 지식인들이 과학적 미신(scientific superstition)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나의 주장이 논리적이나 학문적 권위를 갖지는 못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불완전함의 패러다임 안에서의 나름의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국정교과서 문제로 논쟁이 뜨겁습니다. 국정교과서 자체를 놓고 생각하면 그것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국정교과서 자체만을 문제 삼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나 어떤 단체라도 그 집단이 선택한 사상과 이념과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불완전하더라도 그 집단이 선택하고 표방하는 사상과 가치와 제도를 존중하고 그 가치의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의 자유가 허용되고 존중되고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패러다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혁명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들은 명분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계승 발전하는 방향의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패러다임을 부정하고 허무는 교육을 받고 있다고 많은 국민들이 염려하는 듯합니다.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이들은 그렇게 염려하는 국민은 무지하다고 할 것이고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국민은 훌륭하다고 할 것이지만 국민이 어리석어도 그런 논리적 말장난에 계속 속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을 여러 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한 번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여러 번 속일 수는 없다는 말이 있는데, 공산주의가 자신과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논리는 웬만하면 세울 수 있습니다. 반사회적 범죄자들에게도 나름의 자기 합리화의 논리가 있고, 떼 강도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정의와 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논리적 허용을 따라가면 안 되고 진리를 따라 가야 합니다. 국정교과서를 반대하는 대학교수들이나 학자들 중에 논리와 합리와 과학과 이론이라는 나무는 보지만 인간과 역사의 의미와 그 한계의 숲을 보지 못하는 ‘진보 꼴통’인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수 꼴통’인 분들은 대게 감정적이라서 그 부작용이 비교적 덜 위험하지만 ‘진보 꼴통’인 분들도 감정적이기는 하지만 ‘보수 꼴통’인 분들에 비해 더 이지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기 때문에 대중을 더 오랫동안 속일 수 있어서 그 폐해가 심각합니다. 인간 복지를 위하는 현대 과학 발전의 문제점 중 하나는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동성결혼이 그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논리와 합리와 과학을 좇아가다 인간은 스스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결과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알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바르지 아니하니라.” - 겔 3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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