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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자기 존재의 바른 인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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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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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종종 보게 되는 일입니다. 용서 못할 친구의 잘못도 술 한 잔 함께 마시며 훌훌 털어버립니다. 드라마가 아니라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술이라고 하면 그것이 곧 범죄와도 같다고 생각하는 한국 교회가 새벽기도 금요기도 금식기도까지 하면서도 교회 내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그 많은 기도가 술 한 잔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슬퍼집니다. 요즘 교회 내 분쟁이 한 번 일어났다 하면 절대로 진정 국면으로 가지 않고 점점 확대되어 파국으로 치닫는 경향을 보입니다. 교회는 영적 정신적 도덕적 집단이기 때문에 형식적 집단인 국가나 사회적 집단과 같지 않아 물리적 강제력이 없습니다. 누가 현저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영적 도덕적 지도를 거부하고 파행을 저지르면 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교회에도 법이 있고 치리회가 있어 재판을 하지만, 교회의 치리와 재판권은 어디까지나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치리를 받는 자가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자 이제는 교회 내 분쟁을 교회 내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사회법정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교인들은 교회의 영적 도덕적 권위에 대해 냉소적이 되어버렸습니다. 분쟁의 원인이 진리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견해와 입장차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양보나 타협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수준의 문제는 민주주의 원칙만 잘 지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세상에서는 분쟁이 많아도 나름대로 민주주의 원칙이 통하기 때문에 질서가 유지됩니다. 왜냐하면 그 원칙을 거부하면 법에 의한 강제적 제재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 결정을 거부해도 아무런 강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나 교회의 권위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가 물리적 강제력이 없음을 악용하여 공적 결정을 따르지 않고 마음껏 파행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질이 나쁜 태도이고 저질적인 수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에 물리적 강제력이 있다면 현재와 같이 분쟁을 일으키는 나쁜 사람들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교회 분쟁에 관계 되어 있는 분들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에서는 정치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를 위해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서 물리적 강제력이 없는 교회에서만 유별나게 정의로운 채 하는 것은 너무나 비겁한 짓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사소한 차이를 용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정하거나 비윤리적인 것을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으로 결정한다면 끝까지 거부해야 하지만 그 외의 문제라면 민주주의 절차에 따른 공적 결정에 승복해야 합니다.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두고 보자는 태도로 승복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분쟁이 있는 교회에서는 민주절차에 따른 결정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나와 의견이 달라도 공적 결정에 승복해야 하고,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이 정도는 세상 사람들도 지키는 질서입니다. 물론 이 수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납과 용서를 카운터 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도 용서합니다. 우리에게는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고 유대인들도 잘못한 사람을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다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베드로는 나름의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민간에서는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의 갑절인 여섯 번보다 많은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지요 라고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현실적으로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세 번 용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것의 갑절보다 많은 일곱 번 용서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면 그것은 아예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불가능한 명령에 이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빚을 준 임금은 하나님이고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은 죄인인 인간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갚을 수 없는 액수이고, 갚을 수 없다는 것은 그와 그의 가족의 신분이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예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는 절대로 자유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상황이 바로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에서 빚진 종이 사정을 하자 임금님은 그를 불쌍하게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임금은 몰인정한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임금님이 그의 빚을 탕감하여 준 것은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자의 감격과 태도로 살아가기를 바라서입니다.

용서는 숫자로 카운트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갚을 수 없는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 의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우리는 용서와 인내와 사랑을 카운터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도록 노력해야지, 세 번이나, 일곱 번이나, 490번이나, 끝 없이 용서하는 것이야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하는데 까지는 해봐야지... 거짓말 하는 남편, 게으르고 사치하고 낭비하는 아내, 말 안 듣는 자식,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들, 교회 분쟁에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참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참는데 한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폭발합니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한계입니다.

이 한계 때문에 이혼도 하고, 부모 자식의 인연을 끊기도 하고,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참으며 살다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지... 라는 생각에 고민하고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황에 시달리다 보면 심리적으로 가학적이 되거나 자학적이 되거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폭력적이 되거나 냉소적이 되거나 온갖 종류의 정신병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지역감정, 인맥과 학연, 선후배의 지나친 위계 관계, 계층과 계층의 반목, 세대와 세대의 불신은 한계 수준을 한 참 넘어섰습니다. 어느 나라나 그런 문제가 없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으니까 그 억울함과 분노가 쌓여서 공격 대상을 찾게 되고 소극적인 사람은 자신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자살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참아라, 용서해라, 이해해라, 포용해라, 사랑하라고 해봐야 그런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와 생각을 학문적으로 이야기 하면 사회과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옳음과 그름,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 같은 것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절대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대 사상이고 철학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절대적인 선도 정의도 없습니다. 가치의 질서를 부정하여 가치의 우선순위를 혼란하게 합니다.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하고 남자가 여자가 되기도 합니다. 여자가 여자와 남자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합법입니다. 간통이 죄가 아닙니다. 성이 점점 무질서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적질 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간통을 하고 바람을 피우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가치 질서가 무너져서 불륜과 범죄를 즐기는 사람들은 좋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자살자들이 많은 것도 가치 질서의 붕괴 때문에 개인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과 두려움과 부담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사회적 병리현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참아라, 끝없이 용서하라고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숫자나 방법이나 다른 사람의 태도에 따라 마음과 의지가 우유부단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갚을 수 없는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 해주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감격이 너무 커서 백 데나리온으로 감정이 오르내리고 생각이 왔다 갔다 할 수 없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는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에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 마 18:32,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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