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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야를 배척하는 영적 관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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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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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그 작품이 나온 이후 줄곧 현실 교회의 지도자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 시대에 시골 지주 집안인 카라마조프 가(家)에서 일어난 존속살해(尊屬殺害) 사건이 주된 내용이지만 이 소설이 지향하는 것은 카라마조프가의 인간 탐구입니다. 사건의 표면적 중심인물은 아버지인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장남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이지만 사실 이 소설의 진짜 주제를 표상하는 인물은 차남인 이반 카라마조프와 삼남 알렉세이입니다. 이반은 냉철한 지식인으로 철저하게 합리론을 신봉하며 ‘神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실존주의적 무신론자입니다. 반대로 신실한 예비 수도승인 알렉세이는 세상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작품 중에 이반이 알렉세이에게 들려주는 극시 '대심문관'이 등장합니다. ‘대심문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와 신에 대한 관념을 집대성한 걸작입니다. 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단 심문이 한창이던 15세기 에스파냐 세비야에 예수가 강림합니다. 예수는 1,500년 전 자신이 팔레스타인 땅을 돌며 복음을 전파했을 때와 같은 복장,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가 재림한 메시아인줄 알고 그에게로 나아옵니다. 그 때 마침 이단 심문을 위해 내려온 대심문관이 예수가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대신문관은 즉각 친위대로 하여금 예수를 채포하여 감옥에 가두게 합니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예수가 갇힌 지하 감옥에 들어가 예수와 독대하여 얘기를 나눕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광야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요구하는 악마의 유혹을 모두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택하였지만, 이 세상에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 신비, 권위가 있어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자유보다는 빵을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빵보다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빵에 대한 욕구로부터 자유 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믿음과 질서를 가질 기회를 박탈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를 유혹한 악마와 손을 잡고 지상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빵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가 제시한 신앙의 자유를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빵과 신비와 기적을 제공함으로써 나름의 질서를 세워왔는데 이제 와서 예수가 재림하여 자유니 사랑이니 라고 하여 질서를 흐트러트린다면 교회는 무너지고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기에 대심문관은 예수를 화형에 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대심문관 자신도 한 때 누구보다 신실한 목회자였지만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뜻을 전합니다. 대심문관의 모든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예수는 대심문관의 말이 끝난 후 그에게 가볍게 키스를 합니다. 그리고 대심문관은 예수를 풀어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대심문관의 주장은 예수 당신이 없어도 교회는 잘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가 없어야 교회의 질서가 유지되고 부흥하고 잘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당신이 개입하면 교회는 무너지고 세상은 지옥으로 변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적인 강조점은 첫째는 아는 것이고, 둘째는 믿는 것이고, 셋째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고 믿고 실천해야 할 내용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아는 것과 믿는 것 중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에 대한 논의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는 것과 믿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논리적 구분이고 존재론적 구분이 아닙니다. 즉 아는 것과 믿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성경이 가르치는 앎이란 지식적 인식을 넘어 인격적 관계 안에서의 실천적 경험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신, 구약의 전체 역사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신(神)이심을 인정하고 믿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을 계시 하시고 우리는 그 계시를 믿습니다. 계시란 열어서 보여 준다는 뜻인데, 열어서 보여 준다는 것도 반드시 시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보고 듣고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일단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냐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 또는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헬라어 번역이고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말을 들으시고 그것을 베드로가 알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왜 당신이 메시야임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엘리야라든가 선지자 중의 한 분이라든가 혹은 세례 요한이라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메시야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메시야는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까지 상대화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가 선지자라는 것이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메시야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름대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등의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각 분야는 나름대로의 전문가적 권위와 쌓아온 업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것은 인정합니다. 어떤 분야에서 아무리 탁월한 인물이 나온다고 해도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분야를 다 섭렵하거나 아우를 수는 없습니다. 정치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고,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라도 컴퓨터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아무리 잘 다루어도 배관이나 용접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존경 받는 종교 지도자라도 경제나 정치나 컴퓨터에 대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다릅니다. 메시야는 그 모든 분야를 초월합니다. 모든 분야의 권위자들의 권위를 상대화 시킬 절대 권위자가 메시야입니다. 그 메시야는 인간사의 얽히고설킨 모든 문제를 단번에 풀어내고 평정할 초월적 지도자입니다. 그런 메시야가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그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하면 일대 개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 그들이 맞닥트려야 할 상황은 혁명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관료주의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들은 개혁도 혁명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정치적 개혁도 노동개혁도 싫은 겁니다. 민주주의 종주국인 미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관료주의입니다. 일본은 이미 한 차례 홍역을 치렀지만 역시 관료주의가 그들이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입니다. 대한민국의 문제도 관료주의입니다. 관료주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심합니다. 중국의 문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구소련이 붕괴될 때 공산주의 당원의 수가 10%였다고 합니다. 중국은 성인 인구의 7.8%가 공산당원이라고 합니다. 중국이 그 사실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2014년 말 통계에 의하면 중국 공산당 당원이 8,779만3,00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일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이 수치는 1년 전보다 110만 명이 증가한 것입니다. 시진핑 주석과 여러 고위 지도자들은 공산당 간부들에게 소련의 종말을 초래했던 함정들을 중국 공산당이 피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고위 당원의 부정부패를 철저히 조사하여 무자격 당원을 축출시키며 당원 수의 증가를 억제하고 있지만, 증가의 속도가 약간 느려졌을 뿐 매년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개혁을 원하지 않습니다. 배부른 교회가 영적 관료주의, 신앙적 관료주의로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징후들 중 하나가 목회자의 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그냥 덮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지도자의 죄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교회를 수적으로 부흥시켰으면 어느 정도 공금을 횡령했건 간음을 했건 거짓말을 했건 가짜 박사 학위를 받았건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소위 능력 있는 목회자가 지은 죄 때문에 치리를 받는다면 교회 안 모든 기득권 세력에게도 치명적일 것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교회 재정과 그것을 집행하며 이득과 권위를 누리는 소위 교회 안 실세들은 개혁이나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참 메시야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작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떻게 보면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없어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부흥하고 잘 돌아가는 15세기 교회인지도 모릅니다. 영적 관료주의는 개혁이나 하나님 나라 같은 것을 싫어합니다. 미국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해 주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영적 관료주의를 비꼬는 조크입니다. 예수가 죽어야 온 민족이 망하지 않고 백성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했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 시대나 15세기나 이 시대의 영적 관료주의의 표상(表象)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 요 11:50, 1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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