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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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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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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믿음을 교양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양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교양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믿음이 교양보다 상위개념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교양이 있을 수 있지만 교양 없는 믿음이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구원의 전적 은혜 교리와 충돌하는 것 같지만 성경은 교양이나 윤리나 도덕이 무시된 믿음이 가능하다는 그 어떤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교양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양은 예의보다는 범위가 넓고 가치의 무게가 무겁지만 윤리나 도덕보다는 가치의 무게가 가벼운 것처럼 느껴지는 개념입니다. 예의를 잘 지키는 사람을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예의가 곧 교양은 아닙니다. 교양은 지식과도 다릅니다. 흔히 사람들에게 지식이 많은 사람은 일단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지식을 쌓았다고 교양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많이 배우지 못해도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교양이란 윤리나 도덕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의는 나라나 문화에 따라 다릅니다. 예의란 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격식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인사 법이나 대인관계에서의 격식은 보편적 가치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곳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 옆에서 트림 하는 것을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 코는 아무데서나 풉니다. 심지어 미국인들은 식탁에서도 별 거리낌 없이 코를 풉니다. 트림은 컨트롤하기 어려운 생리적 현상이고 코 푸는 것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인데, 이 둘이 뒤바뀐 것 같아 우리에게는 불편합니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이 식탁에서 코 푸는 것을 두고 교양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윤리나 도덕이나 교양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의 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중심 주제는 교양입니다. 교양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질, 혹은 자질입니다. 예의가 형식의 문제라면 교양은 마음의 문제이고 가치관에 더 가까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 중에 예의보다 교양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교양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교양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교양 있는 행동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하였습니다. 변화 받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변화 받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기도나 찬송이나 감사 같은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을 전제할 때 변화 받은 마음으로부터 당연히 그런 것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 받은 마음으로부터 교양 있는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은 너무 소홀히 취급합니다. 변화를 받는 게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변화를 받았다고 하여 교양 있는 행동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마음의 문화”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문화를 영어로 culture라고 하는데, 이는 라틴어 cultura에서 온 말로서 그 의미는 땅을 “갈다”(colere)는 것으로, 땅을 갈아 생산한 물건을 문화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원의(原意)를 갖고 있는 말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하여 만들어낸 행동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게 된 것은 인간이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많은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이 마치 땅을 갈아 곡식을 생산해내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고 인간이 노력해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을 문화라고 합니다. 세네카가 마음의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밭이 아무리 비옥하더라도 갈지 않으면 결실을 맺지 못하듯이 배우고 갈고 닦지 않는 마음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양은 마음을 갈아서 쌓는 것입니다. 마음을 갈지 않고 그냥 두면 교양이 없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된 것은 문화가 아니듯이 마음을 갈고 닦지 않으면 본능적인 짐승과 같은 수준입니다. 마음을 갈고 닦으면 교양 있는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마음의 결과이며, 문화도 결국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문화(文化)는 일반적으로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체계입니다. 사회사상, 가치관, 행동양식 등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관점의 이론적 기반에 따라 여러 가지 문화의 정의가 존재합니다. 인간이 주어진 자연환경을 변화시키고 본능을 적절히 조절하여 만들어낸 생활양식과 그에 따른 산물들을 모두 문화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마음을 갈아서 교양을 쌓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교육입니다. 가정교육은 말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부모가 교양 있는 사람이 되어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녀는 무의식 가운데 부모의 영향을 받습니다. 부모가 교양이 있으면 자녀는 쉽게 교양을 쌓을 수 있고 부모가 교양이 없으면 자녀가 교양 있는 자녀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의식적으로 가르치고 강조하는 것보다 무의식 중에 받는 영향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목사가 능력이 있고 실력이 뛰어난 것이 곧 교양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에게도 교양이 필요할까요? 이런 질문 자체가 사실은 불편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되기 위해 교양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부모가 되기 위해 따로 교양을 쌓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다닌 신학교의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사가 되라 입니다. 여기에는 사실 한 가지가 생략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되라 입니다. 신자가 되라는 교훈은 사람이 되라는 교훈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계를 볼 때 신자는 되었는데 사람이 덜 된 이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인데 사람이 덜 됐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양을 염두에 둔 평가입니다. 사람이 덜 됐다는 것은 교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사가 되기 위해 교양과목을 따로 배우지는 않지만 사실 목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교양입니다. 목사뿐 아니라 장로와 집사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교양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장로와 집사의 자격을 이야기할 때 가정을 잘 다스리고 성도들에게 덕이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 듣는 사람 이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교양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어떤 교단에서는 목사의 자질을 심사할 때 심한 인생 굴곡을 경험한 사람은 피하고 정상적인 가정과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양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능력 있는 교회 지도자들 중에 교양 없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양 없는 지도자를 좋아하는 교인들은 교양 없는 교인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회는 본질상 가정과 같은 곳입니다. 예배하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보호하고 서로 돕고 경건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부모가 교양이 없으면 자식이 교양을 쌓기가 어렵듯이 목사가 교양이 없으면 교인들이 교양을 쌓기가 어렵습니다. 어릴 때 교양을 쌓지 못한 사람이라면 성인이 되어서는 의식적으로 스스로 노력하여 교양을 쌓아야 합니다. 교양을 쌓는 데는 어른들에게도 어린이 못지않게 친구가 중요합니다.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그를 닮기가 쉽습니다. 거짓말 슬쩍슬쩍 하는 친구와 사귀면 자신도 모르게 그 친구를 닮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친구를 가까이 하면 자기도 돈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직과 성실이 체질화 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양에도 하나의 철학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양을 다른 사람에게 교양 있는 사람으로 평가 받는 것을 목적으로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교양은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교양이나 윤리나 도덕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교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교양보다 어린아이 같은 태도가 더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예의와 교양 있는 태도로 행동하고 말해야 합니다. 나쁜 마음이나 좋은 마음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고 당사자와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를 배려해서 말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교양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해야 하고,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며, 셋째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교양은 자신을 가꾸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무라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양은 자기를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교양은 내가 얼마나 마음이 너그럽고 사랑이 많으냐를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교양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익을 끼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하려면 내가 불편한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성실, 공평, 정직해야 합니다. 현대에는 개인의 행동이 행동하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내가 교회 생활 성실하게 하는 것은 같은 교인들에게는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직장 동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합니다. 직장 동료나 모든 대인관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 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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