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안전 불감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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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5-08-1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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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인데 미국인들은 참 겁이 많습니다. 눈이 조금만 많이 내리면 차를 몰고 나가지 않을뿐더러 학교나 교회도 클로즈 합니다. 별로 깊지 않은 물에서도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운전 시 안전벨트 매는 것도 한국 사람보다 철저합니다. 20여 년 전 한국에서 운전할 때는 안전벨트를 매는 것과 저수지 같은 데서 배를 탈 때 구명조끼를 입는 것이 왠지 겁 많은 행동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미국인들의 태도가 당연히 겁 많은 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코피라도 흘리게 되면 선생님은 위생장갑부터 찾습니다. 나는 미국인들의 이런 태도를 철저한 사고예방의 합리적 태도라고 생각하기보다 겁이 많은 태도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의 안전 불감증 때문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안전 불감증을 용감성이나 믿음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폭설이 내려 자동차 운행이 거의 불가능한 때도 주일 예배를 한 번도 취소하지 않은 것을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폭설 때문에 주일 예배를 취소하는 미국인들은 어쩐지 믿음이 없는 것 같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주일예배를 취소하지 않는 한국교인들이 믿음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은 안전 불감증 때문입니다. 미국인들이 안전예방을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사고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안전예방은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상당할 정도로 줄일 수는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대형사고들 중에 미국 사회 같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리 역 폭파,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침몰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사고들은 거의 100% 안전 불감증이 불러온 사고들입니다. 안전 불감증의 원인 중의 하나는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급격한 변화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안전 불감증이 그렇게 심각한 대형사고로 연결 될 위험이 적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사람의 생존 방식이 자연을 상대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홍수나 지진이나 폭설 같은 피해는 거의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인 재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안전 예방을 하지 않아서 사고가 발생해도 그 피해는 지극히 미미했습니다. 달구지를 몰던 농부가 안전을 지키지 않고 졸다가 전복되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는 많은 사고가 사람 때문에 발생하는 인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 사회에서 한 사람이 달구지 몰던 의식으로 버스나 열차를 몰다가 사고를 일으키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따라서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치명적인 악이 되는 가를 철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안전 불감증의 또 다른 원인은 합리적 사고의 부족 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은 대게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대응하고 동양인들은 대게 감정적으로 대응합니다. 그 결과 서양의 문화는 합리적이고 동양의 문화는 감정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존에 합리성과 감정은 둘 다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는 합리성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합리성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산업사회에 살면서 합리적 사고를 훈련하지 않으면 안전 불감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전 불감증은 대형사고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범죄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합리적 사고의 부족이 안전 불감증의 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 신앙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지중해 연안으로 전파되면서 불가피하게 합리적인 그리스 사상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합리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초합리적인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이 둘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합리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리스의 합리적 철학을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몽주의 시대와 자연과학의 발전을 거치면서 방법론으로 사용하던 철학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주장하고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전통교회는 이러한 세속적 도전에 대응하다가 반지성적 경향으로 기울기도 하고 일반은총과 인문학을 소홀히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성과 합리성과 지성을 불신앙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은 당연히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일반은총을 무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합리적인 것을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특별 계시는 아니지만 일반은총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채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을 존중합니다. 그 세 가지가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둘째는 윤리이고 셋째는 법입니다. 성경과 윤리와 법은 다수결의 원칙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물론 법은 충분한 논의를 거처 바꿀 수 있지만 편의에 의해서 쉽게 바꾸면 안 되고 성경과 윤리에 부합하도록 충분한 연구와 논의를 거처 바꿔야 합니다. 법은 완전하지 못해도 그것이 개정되기 전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모두가 안전 합니다.
안전 불감증의 또 다른 원인은 관료주의입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미국사회에도 관료주의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합리적인 사회에서 관료주의가 생기는 원인 중의 하나는 수용 가능한 위험 때문입니다. 최첨단 과학의 결정체인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로 쏘아 올리는 나사의 엔지니어들에게도 수용 가능한 위험(Acceptable Risk)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에 100% 완전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용 가능한 위험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에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핑계로 수용 가능한 위험을 점점 늘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비 도적인 범죄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의 우주선 챌린저 호는 수용 가능한 위험을 늘이다가 폭발사고로 이어진 경우이고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는 수용 가능한 위험 몇 개가 우연하게도 사고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되면서 발생한 경우라고 합니다. 수용 가능한 위험 여러 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에 걸쳐 아무런 사고 없이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발사한 경험이 수용 가능한 위험을 늘이는 안전 불감증으로 이어져 결국은 사고를 내고 만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대부분도 영적 안전 불감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합리성 보다 믿음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합리성과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합리성과 대립하면서 교인들에게 합리성이 불신앙에 가까운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비민주적인 방법과 거짓말까지도 믿음으로 수용하거나 정당화 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은 따지는 것이 아니고 비판해도 안 되고 웬만한 불법이나 거짓말은 용납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교회 안에 수용 가능한 위험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간음, 횡령, 거짓말, 사기, 권모와 술수, 권력욕, 명예욕, 돈을 탐하는 것 등 온갖 탐욕과 교만과 거짓이 ‘수용 가능한 위험’에 첨가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이 땅의 하나님 나라에도 ‘수용 가능한 위험’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까지 수용 가능한 위험에 포함된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극대화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달구지 몰던 사람의 안전 의식으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처럼, 불과 몇 십 명 모이는 작은 교회에서 회의 하던 습관과 재정운용 방식과 의식으로 수 만 명 모이는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만큼 재정운용(財政運用)이 어두운 곳이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교회만큼 무시되는 곳도 없습니다. 교회 안의 거의 모든 문제는 지도자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주도되지만 믿음은 합리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분별력 없는 교인들의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작은 불법이나 거짓말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인들이 거짓말 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지도하고 솔선수범해야 하고 교인들은 지도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불법을 행하면 반대하고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사소한 거짓말, 사소한 불의가 대형 사고를 불러일으킵니다. 안전 불감증은 범죄행위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사소한 거짓말과 사소한 재정의 불투명이 바로 대형 사고를 불러오는 영적 안전 불감증입니다. 철저히 원칙과 질서를 지키고 거짓 말 하지 않고 속이거나 말을 바꾸거나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입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9,10 -
한국에서 일어났던 대형사고들 중에 미국 사회 같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리 역 폭파,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침몰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사고들은 거의 100% 안전 불감증이 불러온 사고들입니다. 안전 불감증의 원인 중의 하나는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급격한 변화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안전 불감증이 그렇게 심각한 대형사고로 연결 될 위험이 적었습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사람의 생존 방식이 자연을 상대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홍수나 지진이나 폭설 같은 피해는 거의 사람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인 재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안전 예방을 하지 않아서 사고가 발생해도 그 피해는 지극히 미미했습니다. 달구지를 몰던 농부가 안전을 지키지 않고 졸다가 전복되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는 많은 사고가 사람 때문에 발생하는 인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 사회에서 한 사람이 달구지 몰던 의식으로 버스나 열차를 몰다가 사고를 일으키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따라서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치명적인 악이 되는 가를 철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안전 불감증의 또 다른 원인은 합리적 사고의 부족 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은 대게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대응하고 동양인들은 대게 감정적으로 대응합니다. 그 결과 서양의 문화는 합리적이고 동양의 문화는 감정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존에 합리성과 감정은 둘 다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는 합리성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합리성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산업사회에 살면서 합리적 사고를 훈련하지 않으면 안전 불감증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전 불감증은 대형사고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범죄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합리적 사고의 부족이 안전 불감증의 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 신앙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지중해 연안으로 전파되면서 불가피하게 합리적인 그리스 사상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합리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초합리적인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이 둘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합리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리스의 합리적 철학을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계몽주의 시대와 자연과학의 발전을 거치면서 방법론으로 사용하던 철학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주장하고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전통교회는 이러한 세속적 도전에 대응하다가 반지성적 경향으로 기울기도 하고 일반은총과 인문학을 소홀히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성과 합리성과 지성을 불신앙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은 당연히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일반은총을 무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합리적인 것을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특별 계시는 아니지만 일반은총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채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을 존중합니다. 그 세 가지가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고 둘째는 윤리이고 셋째는 법입니다. 성경과 윤리와 법은 다수결의 원칙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물론 법은 충분한 논의를 거처 바꿀 수 있지만 편의에 의해서 쉽게 바꾸면 안 되고 성경과 윤리에 부합하도록 충분한 연구와 논의를 거처 바꿔야 합니다. 법은 완전하지 못해도 그것이 개정되기 전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모두가 안전 합니다.
안전 불감증의 또 다른 원인은 관료주의입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미국사회에도 관료주의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합리적인 사회에서 관료주의가 생기는 원인 중의 하나는 수용 가능한 위험 때문입니다. 최첨단 과학의 결정체인 우주선을 만들어 우주로 쏘아 올리는 나사의 엔지니어들에게도 수용 가능한 위험(Acceptable Risk)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에 100% 완전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용 가능한 위험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에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핑계로 수용 가능한 위험을 점점 늘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비 도적인 범죄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의 우주선 챌린저 호는 수용 가능한 위험을 늘이다가 폭발사고로 이어진 경우이고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는 수용 가능한 위험 몇 개가 우연하게도 사고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되면서 발생한 경우라고 합니다. 수용 가능한 위험 여러 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에 걸쳐 아무런 사고 없이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발사한 경험이 수용 가능한 위험을 늘이는 안전 불감증으로 이어져 결국은 사고를 내고 만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대부분도 영적 안전 불감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합리성 보다 믿음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합리성과 반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합리성과 대립하면서 교인들에게 합리성이 불신앙에 가까운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비민주적인 방법과 거짓말까지도 믿음으로 수용하거나 정당화 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은 따지는 것이 아니고 비판해도 안 되고 웬만한 불법이나 거짓말은 용납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교회 안에 수용 가능한 위험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간음, 횡령, 거짓말, 사기, 권모와 술수, 권력욕, 명예욕, 돈을 탐하는 것 등 온갖 탐욕과 교만과 거짓이 ‘수용 가능한 위험’에 첨가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이 땅의 하나님 나라에도 ‘수용 가능한 위험’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까지 수용 가능한 위험에 포함된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은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극대화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달구지 몰던 사람의 안전 의식으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처럼, 불과 몇 십 명 모이는 작은 교회에서 회의 하던 습관과 재정운용 방식과 의식으로 수 만 명 모이는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만큼 재정운용(財政運用)이 어두운 곳이 없습니다. 민주주의가 교회만큼 무시되는 곳도 없습니다. 교회 안의 거의 모든 문제는 지도자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주도되지만 믿음은 합리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분별력 없는 교인들의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작은 불법이나 거짓말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인들이 거짓말 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지도하고 솔선수범해야 하고 교인들은 지도자가 거짓말을 하거나 불법을 행하면 반대하고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사소한 거짓말, 사소한 불의가 대형 사고를 불러일으킵니다. 안전 불감증은 범죄행위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사소한 거짓말과 사소한 재정의 불투명이 바로 대형 사고를 불러오는 영적 안전 불감증입니다. 철저히 원칙과 질서를 지키고 거짓 말 하지 않고 속이거나 말을 바꾸거나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입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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