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골리앗’에 주눅 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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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5-07-2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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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육강식은 이성 없는 동물의 생존방식입니다. 먹이사슬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약육강식입니다. 동물 세계의 약육강식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약육강식이 야만적인 것이지 동물의 생존방식을 야만이나 문화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약육강식의 생존방식을 취하면 스스로를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힘으로 약한 자를 해하거나 그의 소유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시인들도 폭력으로 남을 해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압니다. 인간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못한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옳고 그름의 절대 기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양심의 기능과 이성의 판단으로 물리적인 힘을 절제하여 사용합니다. 인간에게도 동물적 약육강식의 본능이 있지만 그것을 절제할 수 있는 양심과 이성이 있기 때문에 짐승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스스로 절제할 수도 있고 또한 자발적으로 절제가 잘 안 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절제를 하게 합니다. 가정과 국가와 사회에는 도덕과 법과 여러 종류의 규범이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절제하게 하는 방법들입니다.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잘 절제 된 사회를 선진사회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회를 후진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성 없는 동물처럼 약육강식의 생존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고대에는 약육강식의 방식이 노골적이었다면 현대는 지능화 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능화 했다는 것은, 실제로는 약육강식의 방식이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한다는 뜻입니다. 공산주의는 노골적으로 약육강식을 정당화 하지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아래서는 약육강식의 방식을 위장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에 강한 자는 점점 강하게 되고 약한 자는 점점 약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약육강식의 생존방식 아래서는 힘이 곧 정의가 되기 때문에 약자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래서 문학이나 경기나 스포츠나 드라마 같은 데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내용이나 권선징악을 약자들은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약자의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게임이나 작품에서 약자가 강자를 꺾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독재자나 강한 자가 폭력적으로 약한 자를 누르고 괴롭히고 빼앗는 것을 정당화 하고 즐기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이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약한 자가 강한 자의 폭력에 대항하여 이기는 싸움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 같은 가상 세계에서 이상적 테마가 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도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고전입니다. 강자와 약자의 대결에서, 즉 동물적 약육강식의 관계에서 강자는 언제나 법과 원칙을 무시할 수 있고 약자는 언제나 법과 원칙을 준수해야만 하는 힘의 부익부빈익빈 상황이 심화되어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가 쉽게 정당화 됩니다.
인간 사회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사람들이 다윗과 골리앗 같은 성경 이야기를 지나치게 단순한 교훈으로 받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훈은 대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약한 자라도 강한 자를 이길 수 있다.’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도 쉽게 단순화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약한 자라도 강한 자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면 언제나 골리앗이 이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게도 하시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경험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강한 자가 이기는 현실에서 그 사실을 전제하고 대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한 자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강한 자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과 계산을 하며 살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의 모욕과 위협을 고스란히 감수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누구든지 자기와 싸워 승패를 가려 지는 편이 이기는 편의 종이 되는 한 판 싸움을 하자고 재촉합니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전의 상실이고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에도 장수가 있었지만 골리앗과 대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떤 용기 있는 장수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하여 나선다고 해도 그 싸움은 하나마나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입니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나선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고 객기일 뿐입니다. 쿠바가 미국과 싸워서 이겨보겠다는 것보다 더 무모한 짓입니다. 쿠바는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미국과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은 누구든지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 자는 자기의 사위로 삼고 많은 재물을 주고 그 집은 세금을 면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웬만하면 상금이 탐이 나서라도 용기를 내어 나서는 장수가 있을 법도 한데 아무도 나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아직 어린 다윗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 겁을 먹어야 정상인데, 자기가 나가서 골리앗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다윗의 형 엘리압이 다윗의 그러한 태도를 무모하고 교만한 태도라고 몹시 화를 내며 나무랍니다. 한 마디로 철딱서니 없이 까분다는 것입니다. 양 돌보기가 싫으니까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하며 다윗을 문제아 취급합니다.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다윗의 태도와 결심을 사울 왕이 알게 되어 다윗은 왕 앞에 불러갔습니다. 왕이 다윗을 볼 때 용기는 가상하지만 골리앗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말에 왕은 허락을 했고 다윗이 나가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하여 주고받은 말 가운데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라는 대목입니다. 이 구절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의 핵심이고 하이라이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일당백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레 26:3, 7-8; 수 23:9-11).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인데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이 약속과 정반대 상황입니다. 불레셋의 골리앗 한 사람이 이스라엘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서는 거의 언제나 그 약속과는 반대 상황에 직면하게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을 일당백으로 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약육강식의 방식이 지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믿음이 작동하기가 어렵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대로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여 떠는 것을 너무 쉽게 비난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현재 우리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골리앗 때문에 벌벌 떨 듯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세상이 두려워 벌벌 떨지는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세상의 위협에 떨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일까요? 골리앗은 거대한 몸집과 엄청나게 큰 창과 칼로 이스라엘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는 돈의 힘으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돈 앞에 맥을 못 춥니다. 목사님들도 돈 앞에 너무나 힘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거의 모든 분쟁과 싸움의 진짜 원인은 돈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모든 교인들도 돈 앞에 내심 가장 두려워하고 벌벌 떱니다. 공동의회도 당회도 제직회도 돈의 힘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돈을 믿고 돈에 복종하고 돈을 추종하고 돈을 좋아하고 돈에 지배를 받습니다. 변명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무엇을 결정하든지 무엇을 선택하든지 무엇을 추구하든지 결국은 돈의 위력에 굴복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고 가치관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입니다. 돈의 위력이 너무 커서 믿음의 선택은 엄두도 못 냅니다. 지도자들까지 돈의 힘에 주눅 들어 바른 말도 못하고 바른 선택도 못하고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며 진리를 따르지 못합니다. 심지어 돈의 위력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짓고 정당하고 바른 회개도 제대로 못하게 합니다. 회개를 해도 돈 손해 안 보는 회개, 회초리로 자기 종아리를 치는 식의 회개를 합니다. 그런 것은 돈이 안 드니까요. 돈의 위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절대로 삭개오처럼 4배를 갚는 회개의 결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다윗이 나서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 자신의 용맹을 증명해 보이는 게 아니라 구원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용맹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목표요 가치관입니다. 현실은 힘이 지배하고 강한 자가 언제나 이기고 이 세상을 총체적으로 지배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도 궁극적으로 물리적인 힘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배하심을 증명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미선입니다. 요리문답은 그것을 가리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으로만 구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증명한 게 아니라 양을 칠 때에도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가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을 물고가면 달려가 그 맹수의 입에서 양을 구해내고 사자나 곰을 쳐 죽였습니다. 다윗이 아직 어린 소년인데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을까요? 골리앗이면 몰라도 다윗이 그런 일을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사자나 곰에게서 자기를 건져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어떤 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돈의 매력과 위력을 단호히 거부하고 믿음으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구원이 전적으로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셨고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삼상 17:37 -
그런데 인간이 약육강식의 생존방식을 취하면 스스로를 동물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힘으로 약한 자를 해하거나 그의 소유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시인들도 폭력으로 남을 해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나쁜 것임을 압니다. 인간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못한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옳고 그름의 절대 기준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양심의 기능과 이성의 판단으로 물리적인 힘을 절제하여 사용합니다. 인간에게도 동물적 약육강식의 본능이 있지만 그것을 절제할 수 있는 양심과 이성이 있기 때문에 짐승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스스로 절제할 수도 있고 또한 자발적으로 절제가 잘 안 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절제를 하게 합니다. 가정과 국가와 사회에는 도덕과 법과 여러 종류의 규범이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절제하게 하는 방법들입니다. 인간의 동물적 본능이 잘 절제 된 사회를 선진사회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회를 후진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 후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성 없는 동물처럼 약육강식의 생존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고대에는 약육강식의 방식이 노골적이었다면 현대는 지능화 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능화 했다는 것은, 실제로는 약육강식의 방식이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한다는 뜻입니다. 공산주의는 노골적으로 약육강식을 정당화 하지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아래서는 약육강식의 방식을 위장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에 강한 자는 점점 강하게 되고 약한 자는 점점 약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약육강식의 생존방식 아래서는 힘이 곧 정의가 되기 때문에 약자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그래서 문학이나 경기나 스포츠나 드라마 같은 데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내용이나 권선징악을 약자들은 좋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약자의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게임이나 작품에서 약자가 강자를 꺾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독재자나 강한 자가 폭력적으로 약한 자를 누르고 괴롭히고 빼앗는 것을 정당화 하고 즐기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소수이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약한 자가 강한 자의 폭력에 대항하여 이기는 싸움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 같은 가상 세계에서 이상적 테마가 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도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고전입니다. 강자와 약자의 대결에서, 즉 동물적 약육강식의 관계에서 강자는 언제나 법과 원칙을 무시할 수 있고 약자는 언제나 법과 원칙을 준수해야만 하는 힘의 부익부빈익빈 상황이 심화되어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가 쉽게 정당화 됩니다.
인간 사회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사람들이 다윗과 골리앗 같은 성경 이야기를 지나치게 단순한 교훈으로 받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훈은 대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약한 자라도 강한 자를 이길 수 있다.’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도 쉽게 단순화합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약한 자라도 강한 자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면 언제나 골리앗이 이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게도 하시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경험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강한 자가 이기는 현실에서 그 사실을 전제하고 대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한 자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강한 자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과 계산을 하며 살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의 모욕과 위협을 고스란히 감수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누구든지 자기와 싸워 승패를 가려 지는 편이 이기는 편의 종이 되는 한 판 싸움을 하자고 재촉합니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전의 상실이고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에도 장수가 있었지만 골리앗과 대결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떤 용기 있는 장수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하여 나선다고 해도 그 싸움은 하나마나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입니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나선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고 객기일 뿐입니다. 쿠바가 미국과 싸워서 이겨보겠다는 것보다 더 무모한 짓입니다. 쿠바는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미국과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은 누구든지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 자는 자기의 사위로 삼고 많은 재물을 주고 그 집은 세금을 면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웬만하면 상금이 탐이 나서라도 용기를 내어 나서는 장수가 있을 법도 한데 아무도 나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상황을 알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아직 어린 다윗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 겁을 먹어야 정상인데, 자기가 나가서 골리앗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다윗의 형 엘리압이 다윗의 그러한 태도를 무모하고 교만한 태도라고 몹시 화를 내며 나무랍니다. 한 마디로 철딱서니 없이 까분다는 것입니다. 양 돌보기가 싫으니까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고 하며 다윗을 문제아 취급합니다.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고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다윗의 태도와 결심을 사울 왕이 알게 되어 다윗은 왕 앞에 불러갔습니다. 왕이 다윗을 볼 때 용기는 가상하지만 골리앗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말에 왕은 허락을 했고 다윗이 나가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하여 주고받은 말 가운데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라는 대목입니다. 이 구절이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의 핵심이고 하이라이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 일당백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레 26:3, 7-8; 수 23:9-11).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인데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이 약속과 정반대 상황입니다. 불레셋의 골리앗 한 사람이 이스라엘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서는 거의 언제나 그 약속과는 반대 상황에 직면하게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사람을 일당백으로 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약육강식의 방식이 지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믿음이 작동하기가 어렵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대로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여 떠는 것을 너무 쉽게 비난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현재 우리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골리앗 때문에 벌벌 떨 듯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세상이 두려워 벌벌 떨지는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세상의 위협에 떨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일까요? 골리앗은 거대한 몸집과 엄청나게 큰 창과 칼로 이스라엘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는 돈의 힘으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돈 앞에 맥을 못 춥니다. 목사님들도 돈 앞에 너무나 힘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거의 모든 분쟁과 싸움의 진짜 원인은 돈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모든 교인들도 돈 앞에 내심 가장 두려워하고 벌벌 떱니다. 공동의회도 당회도 제직회도 돈의 힘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돈을 믿고 돈에 복종하고 돈을 추종하고 돈을 좋아하고 돈에 지배를 받습니다. 변명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무엇을 결정하든지 무엇을 선택하든지 무엇을 추구하든지 결국은 돈의 위력에 굴복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고 가치관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입니다. 돈의 위력이 너무 커서 믿음의 선택은 엄두도 못 냅니다. 지도자들까지 돈의 힘에 주눅 들어 바른 말도 못하고 바른 선택도 못하고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며 진리를 따르지 못합니다. 심지어 돈의 위력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짓고 정당하고 바른 회개도 제대로 못하게 합니다. 회개를 해도 돈 손해 안 보는 회개, 회초리로 자기 종아리를 치는 식의 회개를 합니다. 그런 것은 돈이 안 드니까요. 돈의 위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절대로 삭개오처럼 4배를 갚는 회개의 결단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다윗이 나서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 자신의 용맹을 증명해 보이는 게 아니라 구원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용맹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목표요 가치관입니다. 현실은 힘이 지배하고 강한 자가 언제나 이기고 이 세상을 총체적으로 지배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도 궁극적으로 물리적인 힘이 지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배하심을 증명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미선입니다. 요리문답은 그것을 가리켜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것으로만 구원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증명한 게 아니라 양을 칠 때에도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가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을 물고가면 달려가 그 맹수의 입에서 양을 구해내고 사자나 곰을 쳐 죽였습니다. 다윗이 아직 어린 소년인데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을까요? 골리앗이면 몰라도 다윗이 그런 일을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사자나 곰에게서 자기를 건져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어떤 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돈의 매력과 위력을 단호히 거부하고 믿음으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하여 구원이 전적으로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셨고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삼상 17: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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