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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인식이 어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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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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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속에 씨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씨 속에 사과가 있다는 사실은 생각을 해야 알 수 있습니다. 사과 속에 씨가 있다는 사실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사과 속에 있는 씨는 사과를 자르면 즉시 확인할 수 있지만 씨 속에 있는 사과는 즉시 확인할 수 없고 일정한 조건과 시간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정한 조건과 시간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제공할 수도 있지만 그 조건과 시간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씨앗이 열매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필요한 조건과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자라는 것은 역시 신비에 속합니다. 씨앗에서 움이 트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결실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변수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해마다 같은 땅에 같은 씨를 뿌리지만 마치 잉태한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산모처럼 기대와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까지 갖게 됩니다. 모든 씨가 다 건강하게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로 결실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를 뿌리는 농부는 100배의 결실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씨를 뿌립니다.

씨가 싹을 틔우기 위해 필요한 일차 조건은 물입니다. 그러나 물만 가지고는 안 되고 적당한 온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씨는 싹을 내고 자라서 본 잎과 뿌리가 영양분을 스스로 취할 수 있게 되기까지 당분간 필요한 영양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배젖 혹은 배유(胚乳)라고 합니다. 배젖은 씨가 싹을 내기까지 필요한 영양분이고, 떡잎은 본 잎이 나서 영양을 취할 수 있기까지 필요한 영양분입니다. 콩이나 밤, 호두 같은 식물은 배젖이 따로 없이 떡잎이 배젖 역할까지 하기 때문에 무배유종자라고 합니다. 동물이 처음 태어나서 거칠고 단단한 먹이를 먹을 수 없어서 젖을 먹는 것과 같이 식물도 어릴 때는 젖을 먹고 자라는 셈인데, 이름 없는 들풀 한 포기까지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가 놀라울 뿐입니다.

생명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쉬고 움직이며, 계속해서 음식과 물을 먹으면서 살아갑니다. 태어나기 전 몸 속에서도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기관들이 있어서 생명활동을 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활동하는 모든 과정은 인위적인 메커니즘 보다 몇 백배 아니 몇 천 배 정교하고 복잡합니다. 눈으로는 음식의 모양과 색깔을 보고, 귀로는 음료수를 컵에 따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코는 온갖 냄새를 맡습니다. 그 모든 기능들이 식욕을 돋우어 음식을 입 안에 넣으면 혀는 음식의 맛을 느끼고 짤 씹어 삼키게 하며 그러는 동안 여러 감각 기관에서 받아들인 온갖 정보는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됩니다. 뇌에서는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를 판단하여 계속 먹도록 명령하고 이 명령은 신경을 타고 손을 움직이는 근육에 전달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식욕은 독자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또 다른 정보와 기능에 의해 통제됩니다. 즉 인간의 이성은 음식이 맛은 있지만 건강에 해로운 음식은 절제하도록 또 다른 명령을 하달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계속 먹으라는 식욕의 명령과 건강을 위해 절제하라는 이성의 명령과 한 식탁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는 예의와 염치를 지키라는 사회적 명령과 이웃과 지구 반대쪽에서 굶주리는 사람까지를 생각하라는 윤리적 명령까지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 모두 생명의 활동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오감을 통해 식욕을 자극하고 그것을 섭취할 때 느끼는 즐거움과 그것이 소화되고 에너지가 되는 과정 하나하나에는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정신적, 윤리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나아가서는 영적인 작용까지 하게 됩니다. 이 복합적인 생명활동을 통해 인간은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나아가서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며 다른 생명체에게 기여하게도 되고 해를 끼치게도 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던 바울은 분명 인간 생명의 이러한 차원까지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농부나 씨에 대한 비유가 많은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조상대대로 농부로 살아왔고 땅과 하늘을 상대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을 태어나면서부터 몸으로 익히고 터득해온 나에게 농사일은 생존과 생명활동 그 자체였습니다.

게으른 농부보다는 부지런한 농부가 소출을 많이 얻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농사를 지었다면 부지런 하여 소출을 많이 낸 농부가 게을러서 소출을 적게 낸 농부보다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보아도 훌륭한 농부입니다. 그러나 소출을 많이 얻고 적게 얻는 것은 단순히 부지런함에 의해 좌우되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은 소출의 많고 적음의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출의 많고 적음이라는 결과보다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이라는 과정이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실과 착함과 공의와 정직과 희생이 성과나 업적보다 판단에 크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성실과 착함과 공의와 정직과 희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성실과 착함과 공의와 정직과 희생을 나타내지만, 그런 것들이 곧 믿음은 아닙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참 복음과 다른 복음이 여기서 갈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은 이단성이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고 참 복음과 거의 비슷하여 분별하기가 쉽지 않아 어린 신자들이 미혹되기 쉽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사람들이 참 복음보다 다른 복음을 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다른 복음은 부담이 적고 낯설지 않고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때문입니다.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준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복음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를 못합니다. 필요를 못 느끼니까 당연히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자는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진정한 필요를 일깨우는 일부터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께는 그것이 회개였기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회개는 인간에게 진정한 필요를 일깨우고, 그 진정한 필요가 참 복음입니다. 따라서 회개를 통해 진정한 필요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받은 복음은 다른 복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께서 농사 일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셔서 나에게는 매우 친근감이 있습니다. 상업이나 건축이나 어업이나 군대나 목축도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데 비유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농업이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농업이 대표적인 인간의 생계수단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쉽고 익숙했던 탓일 것입니다. 현대에는 농업에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나와 같이 농사일에 익숙한 사람은 성경 이해에서 특권을 누리는 셈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는 씨를 주제로 하는 비유가 세 가지 나옵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사람과 밭에 대한 이야기이고, 둘째는 저절로 자라는 씨에 대한 이야기이고, 셋째는 겨자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다 하나님 나라 비유들입니다. 이 비유들이 가르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스스로 자라는 하나님 나라이고, 둘째, 미미한 씨와 열매나 다 자란 나무를 대조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점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강조할까요? 그 당시에는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이 건설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무력 혁명을 꿈꾸며 품에 칼을 숨기고 다니다가 매국노를 처단하기도 하고 로마 군영을 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무력혁명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유대교 신학자들입니다. 율법학자인 그들은 율법을 연구 발전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율법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했던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실천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이념과 사상과 주장들이 있습니다. 폭력을 통해서, 학문을 통해서, 휴머니즘을 통해서, 윤리와 도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세울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이 세울 수 있는 나라라면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일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모습과 능력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씨와 같습니다. 씨의 특징은 작고 미미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씨의 현실에서 그 결과의 미래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소나무와 소나무 씨를 비교하면 몇 배나 될까요? 개미와 코끼리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하루살이와 천 년을 사는 나무와 비교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개미들이 걱정하는 일을 코끼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공연한 염려와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이야 합니다. 어떤 시인의 표현처럼 물이 소나기를 통해 엄청난 수직을 경험하였기에 수평으로 흐를 수 있듯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는 바로 예수님 자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평범한 유대인 한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형제들도 여럿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아무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소위 비주얼로는 너무나 비호감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씨의 모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그와 같아서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한 알의 겨자씨가 자라 새들이 깃들이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임과 동시에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하나님 나라 원리에 의해 성취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답고 정교하고 윤택하고 현란한 현대문명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눈이 멀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무 하찮아서 우리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우리의 관심을 끌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인간의 모든 문제의 궁극적 해답이 있고 생명의 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씨는 작고 초라합니다. 그러나 줄기와 꽃과 열매는 화려합니다. 지금 우리는 씨와 같습니다. 아직 생명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와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와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생명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생명의 완성을 약속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직은 씨처럼 볼품이 없지만 우리의 미래는 풍성한 꽃이나 열매입니다. 그게 우리의 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믿기 때문에 기쁨과 평화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꽃과 열매는 씨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씨만 보지 말고 씨의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조건만을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된 미래를 보십시오. 그것을 보았던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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