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경험, ‘나는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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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5-06-0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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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몇몇 사람들의 하나님 경험의 사례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그 계시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요한 내용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우리가 읽고, 보고, 듣고, 경험하고, 인식하고 깨달아서‘아, 그렇구나!’하고 과학적 사실을 인식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하나님 경험은 영혼의 포괄적인 차원과 깊이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혼의 포괄적 차원이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기능이 어떻게 다른지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하나님 경험은 갑작스러울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는데, 갑작스러운 하나님 경험은 매우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경험에서, 자기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심지어 믿음까지도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되어 스스로 입을 막고 그 동안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을 후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의 주장과 논리가 그의 친구들보다 정당했다는 사실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지만 그것까지도 온전한 지식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은 더 극적입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상황을 타게 해보려고 성전을 찾았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책을 얻기 위해 성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자적 안목으로 볼 때 유다가 위기상황이었지만 왕이나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때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 경험한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이사야가 본 광경은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노래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계시이고 이사야에게는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경험한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하나님 경험의 반응이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적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쁘고 즐겁고 희망이 솟고 살맛이 나는 은혜요 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하니 우리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우리는 이사야가 이 계시를 받았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험한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이 기원전 791년경-739이니까 이사야가 이 경험을 한 때가 주전 739년경일 것입니다. 성경이 이 시기에 이사야가 이 경험을 하게 되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연대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시대와 이 계시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웃시야 왕은 처음에는 옳은 일을 많이 했으나 점차 교만해져서 결국 벌을 받았습니다. 16살에 왕이 되어 엘랏을 재건해 유다 왕국에 복귀시켰습니다. 엘랏은 이스라엘 최남단에 있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성읍인데, 그 당시에 에돔이 지배하고 있는 것을 웃시야가 되찾았습니다. 그 외에 웃시야는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갓과 야브네, 아스돗 성읍들을 점령했고, 블레셋 지역에 아스돗이라는 새 성읍도 세웠습니다.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였을 뿐 아니라 암몬을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명성이 애굽에까지 퍼졌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에 탑들을 세워 국방을 튼튼하게 하였고 평원과 평야에 가축들을 많이 두어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광야에도 탑들을 세웠고 저수 동굴을 많이 팠습니다. 산악 지방과 기름진 땅을 개간하여 농업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땅을 사랑하는 왕이었습니다. 국방도 튼튼하게 하여 장군이 2,600여명이나 되었고 병력은 30만 7500명이나 되었습니다. 전쟁 무기도 방패와 창, 투구, 갑옷, 활, 팔맷돌들을 충분하게 비축했고 신무기까지 개발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강해지면서 동시에 교만해져 패악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사장만의 권한을 무시하고 분향 제단 위의 향을 피우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아사랴 제사장이 용감한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들어가 왕을 막아서서 만류하며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화를 내며 경고를 무시하고 분향하려 하였습니다. 웃시야가 화를 내는 동시에 나병에 걸려 평생을 별궁에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명분도 있고 옳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 증거를 하나님 섬기는 신앙의 타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형식뿐이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와 긍휼과 자비가 없었습니다. 힘과 형통만을 구가할 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결과가 강포와 거짓입니다. 왕과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모두 태평성대라고 생각하였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폐단이 이사야 시대에 유다에도 만연했던 셈입니다.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신앙의 부패와 정의와 윤리도덕의 부패가 도를 넘었습니다. 제사는 형식뿐이었고 향락과 사치와 포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나 이곳 미국의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가치와 기독교인의 가치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의로운 선지자인 이사야였지만 이 하나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큰 일 났다. 나는 망했다.”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 자신 뿐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가 망했다고 한 것입니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은 “거룩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거룩”이란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창조 때 안식일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거룩”은 카도쉬(קדוש)입니다. 카도쉬의 어원은“구별”이라는 뜻에서 온 단어인데 성경적 의미는 “비교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 놨다”는 뜻입니다. 즉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 구별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이 복된 것도 거룩하게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의 구별은 이 날이 저 날과 다른 것과 같은 일반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구별입니다. 절대적인 구별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 날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날이 하나님의 날이지만 특별하게 하나님의 날로 정하신 것이 바로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잘 드러낸 계시가 바로 이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인정하고 믿고 전하고 선포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거룩 찬송보다 많이 불린 찬송이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카도쉬(קדוש)이고 헬라어로는 아기오스(ἅγιος)이고 라틴어로는 상투스(Sanctus)입니다. 교회에서는 주로 라틴어 상투스를 사용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 정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루터교회는 예전예배를 강조하고 이 거룩 찬송을 부릅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예배에서는 이 거룩 찬송이 불러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오늘날은 예전 예배가 무시되고 예배가 강연회나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룩 찬송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거룩한 찬송이 아니라 감성적인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의미의 핵심은 피조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르다는 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다름, 즉 이것과 저것의 다름이 아니고 절대적 다름임을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재와 차원이 피조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른 것의 의미에서 메시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 다름에 영광이 있고 능력이 있고 의로움과 선이 있고 정의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하려면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거룩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거룩한 하나님 경험은 ‘큰 일 났다. 나는 망했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출발점입니다. 이사야의 이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이 선포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망한 자들인데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으로 거룩한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거룩이 낯설고 어색하고 이해가 안 되고 납득할 수 없는 차원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거룩을 좇기보다 합리와 이성과 힘과 열정을 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5,6 -
인간의 하나님 경험은 갑작스러울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는데, 갑작스러운 하나님 경험은 매우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경험에서, 자기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과 심지어 믿음까지도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되어 스스로 입을 막고 그 동안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을 후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의 주장과 논리가 그의 친구들보다 정당했다는 사실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지만 그것까지도 온전한 지식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은 더 극적입니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상황을 타게 해보려고 성전을 찾았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책을 얻기 위해 성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자적 안목으로 볼 때 유다가 위기상황이었지만 왕이나 제사장들이나 백성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때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 경험한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이사야가 본 광경은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노래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계시이고 이사야에게는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경험한 반응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하나님 경험의 반응이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적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쁘고 즐겁고 희망이 솟고 살맛이 나는 은혜요 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하니 우리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우리는 이사야가 이 계시를 받았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험한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이 기원전 791년경-739이니까 이사야가 이 경험을 한 때가 주전 739년경일 것입니다. 성경이 이 시기에 이사야가 이 경험을 하게 되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연대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시대와 이 계시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웃시야 왕은 처음에는 옳은 일을 많이 했으나 점차 교만해져서 결국 벌을 받았습니다. 16살에 왕이 되어 엘랏을 재건해 유다 왕국에 복귀시켰습니다. 엘랏은 이스라엘 최남단에 있는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성읍인데, 그 당시에 에돔이 지배하고 있는 것을 웃시야가 되찾았습니다. 그 외에 웃시야는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갓과 야브네, 아스돗 성읍들을 점령했고, 블레셋 지역에 아스돗이라는 새 성읍도 세웠습니다.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였을 뿐 아니라 암몬을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명성이 애굽에까지 퍼졌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에 탑들을 세워 국방을 튼튼하게 하였고 평원과 평야에 가축들을 많이 두어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광야에도 탑들을 세웠고 저수 동굴을 많이 팠습니다. 산악 지방과 기름진 땅을 개간하여 농업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땅을 사랑하는 왕이었습니다. 국방도 튼튼하게 하여 장군이 2,600여명이나 되었고 병력은 30만 7500명이나 되었습니다. 전쟁 무기도 방패와 창, 투구, 갑옷, 활, 팔맷돌들을 충분하게 비축했고 신무기까지 개발해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강해지면서 동시에 교만해져 패악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사장만의 권한을 무시하고 분향 제단 위의 향을 피우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아사랴 제사장이 용감한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들어가 왕을 막아서서 만류하며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화를 내며 경고를 무시하고 분향하려 하였습니다. 웃시야가 화를 내는 동시에 나병에 걸려 평생을 별궁에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명분도 있고 옳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 증거를 하나님 섬기는 신앙의 타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형식뿐이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와 긍휼과 자비가 없었습니다. 힘과 형통만을 구가할 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결과가 강포와 거짓입니다. 왕과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모두 태평성대라고 생각하였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폐단이 이사야 시대에 유다에도 만연했던 셈입니다. 외적인 번영의 이면에는 신앙의 부패와 정의와 윤리도덕의 부패가 도를 넘었습니다. 제사는 형식뿐이었고 향락과 사치와 포학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나 이곳 미국의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가치와 기독교인의 가치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의로운 선지자인 이사야였지만 이 하나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큰 일 났다. 나는 망했다.”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 자신 뿐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가 망했다고 한 것입니다.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은 “거룩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거룩”이란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창조 때 안식일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거룩”은 카도쉬(קדוש)입니다. 카도쉬의 어원은“구별”이라는 뜻에서 온 단어인데 성경적 의미는 “비교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따로 분리해 놨다”는 뜻입니다. 즉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 구별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이 복된 것도 거룩하게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의 구별은 이 날이 저 날과 다른 것과 같은 일반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구별입니다. 절대적인 구별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하다는 것은 그 날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날이 하나님의 날이지만 특별하게 하나님의 날로 정하신 것이 바로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잘 드러낸 계시가 바로 이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는 것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인정하고 믿고 전하고 선포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거룩 찬송보다 많이 불린 찬송이 없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카도쉬(קדוש)이고 헬라어로는 아기오스(ἅγιος)이고 라틴어로는 상투스(Sanctus)입니다. 교회에서는 주로 라틴어 상투스를 사용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 정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루터교회는 예전예배를 강조하고 이 거룩 찬송을 부릅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예배에서는 이 거룩 찬송이 불러지는 것이 합당합니다. 오늘날은 예전 예배가 무시되고 예배가 강연회나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룩 찬송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거룩한 찬송이 아니라 감성적인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의미의 핵심은 피조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르다는 것이 통상적인 의미의 다름, 즉 이것과 저것의 다름이 아니고 절대적 다름임을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재와 차원이 피조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른 것의 의미에서 메시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 다름에 영광이 있고 능력이 있고 의로움과 선이 있고 정의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하려면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거룩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지 못한 인간의 거룩한 하나님 경험은 ‘큰 일 났다. 나는 망했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출발점입니다. 이사야의 이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의 선언이 선포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망한 자들인데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으로 거룩한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거룩이 낯설고 어색하고 이해가 안 되고 납득할 수 없는 차원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거룩을 좇기보다 합리와 이성과 힘과 열정을 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거룩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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