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실증적 확인 불가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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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5-04-0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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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그의 서신에서나 사도행전에서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따라서 바울을 통해 세워진 이방인의 교회는 부활공동체였습니다. 지금의 모든 교회는 이 교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헛된 믿음(고전 15:2)에 대해 말 하는데, 그 헛된 믿음이란 바로 부활을 부인하고 믿지 못하는 믿음(고전 15:14)을 말합니다. 전통적 교회가 부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초대교회 안에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부활을 믿지 않지만 예수를 믿는 이들이 있고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역사적인 인물인 바로 그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당시 희랍 철학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나 오늘날 실증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지성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증주의자들은 십자가사건과 부활을 다르게 봅니다. 그들의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실증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이 실증적 사건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똑 같이 확인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총독 빌라도나 대제사장 가야바나 바리새인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문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 사건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경험하고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다릅니다. 빌라도나 가야바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실증될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희랍 철학적 이해를 하는 이들이나 오늘날의 실증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예수님의 부활의 실증적 증거로 빈 무덤이나 수의를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들이 부활의 실증적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에 의해서 시비 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어 여러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중에도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한참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으면서도 몰라보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제자들이 함께 있는 방의 문이 닫혔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가셨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부활이 십자가 사건처럼 실증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함을 말해 줍니다. 도마가 예수님 부활의 실증적 증거를 요구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부활의 실증적 증거를 그렇게 요구하던 도마도 자기 손으로 직접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을 만져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실증을 요구했으나 예수님을 알아보고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즉각 부활의 주님이 자기가 평소에 따르던 역사적 예수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고,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비롯하여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난 이들은 특별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이들에 의해 복음은 능력 있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 부활의 직접 목격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 이후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때 이후 예수님을 믿는 거의 모든 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증적 확인이 불가능하다면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보고 믿는 이들이나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 중 전자가 결코 유리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들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부활의 확실성을 세 가지로 증거합니다. 첫째는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하였고, 둘째는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고, 셋째는 자기 자신이 부활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가장 믿을만한 증거는 성경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성경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다음이 부활 증인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경험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은 성경 계시와 교회의 역사를 통해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은 거의 모두 성경 계시와 예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있던 자들입니다. 부활 신앙이 초월적이고 신비롭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계시와 증인들의 증거와 성령님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실증적 증거를 통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믿는 것도 아닙니다. 계시와 역사와 체험이 잘 어우러지게 하셔서 믿음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광신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가족이 병이 들어 죽게 되어도 병원에 가지 않고 약을 쓰지 않고 기도로만 낫게 하겠다는 것은 광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광신의 반대편에 실증주의가 있습니다. 볼 수 있고 실증할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것은 불가지론(不可知論)입니다. 불가지론이란 하나님이나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입니다. 불가지론이란 신이나 본질은 알 수 없다는 뜻이지만 그것의 본래의 의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광신이나 불가지론은 모두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부활을 막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이라고 생각할 뿐 부활을 믿는 믿음이 나의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면 참 된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생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서게 합니다. 부활 신앙은 영원한 새 생명으로의 삶의 경험이며 시작입니다. 부활 신앙은 일반은총의 가치도 인정하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상대화시킵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세계관, 즉 가치관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부활 생명을 다 설명하거나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실증적 증거로 확인할 수 없지만 성경 계시를 믿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사모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부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취되었고 우리가 믿지만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과정에서 증명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역사의 끝에 부활의 신비가 확실하고 풍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까지 계시의 말씀을 배우고 부활공동체에 참여하여 주님의 약속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부활생명으로 소망가운데서 살아가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실증주의자들은 십자가사건과 부활을 다르게 봅니다. 그들의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실증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이 실증적 사건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똑 같이 확인될 수 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총독 빌라도나 대제사장 가야바나 바리새인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문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 사건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고 경험하고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다릅니다. 빌라도나 가야바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실증될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입니다. 희랍 철학적 이해를 하는 이들이나 오늘날의 실증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예수님의 부활의 실증적 증거로 빈 무덤이나 수의를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들이 부활의 실증적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은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기독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에 의해서 시비 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어 여러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중에도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한참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으면서도 몰라보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제자들이 함께 있는 방의 문이 닫혔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가셨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부활이 십자가 사건처럼 실증적으로 확인이 불가능함을 말해 줍니다. 도마가 예수님 부활의 실증적 증거를 요구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부활의 실증적 증거를 그렇게 요구하던 도마도 자기 손으로 직접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을 만져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실증을 요구했으나 예수님을 알아보고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즉각 부활의 주님이 자기가 평소에 따르던 역사적 예수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고,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비롯하여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난 이들은 특별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이들에 의해 복음은 능력 있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 부활의 직접 목격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 이후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때 이후 예수님을 믿는 거의 모든 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증적 확인이 불가능하다면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보고 믿는 이들이나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 중 전자가 결코 유리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들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부활의 확실성을 세 가지로 증거합니다. 첫째는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하였고, 둘째는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고, 셋째는 자기 자신이 부활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가장 믿을만한 증거는 성경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성경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다음이 부활 증인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경험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은 성경 계시와 교회의 역사를 통해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은 거의 모두 성경 계시와 예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있던 자들입니다. 부활 신앙이 초월적이고 신비롭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객관적 계시와 증인들의 증거와 성령님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실증적 증거를 통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무조건 믿는 것도 아닙니다. 계시와 역사와 체험이 잘 어우러지게 하셔서 믿음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광신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가족이 병이 들어 죽게 되어도 병원에 가지 않고 약을 쓰지 않고 기도로만 낫게 하겠다는 것은 광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광신의 반대편에 실증주의가 있습니다. 볼 수 있고 실증할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것은 불가지론(不可知論)입니다. 불가지론이란 하나님이나 사물의 본질은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관점입니다. 불가지론이란 신이나 본질은 알 수 없다는 뜻이지만 그것의 본래의 의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광신이나 불가지론은 모두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부활을 막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이라고 생각할 뿐 부활을 믿는 믿음이 나의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면 참 된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생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넘어서게 합니다. 부활 신앙은 영원한 새 생명으로의 삶의 경험이며 시작입니다. 부활 신앙은 일반은총의 가치도 인정하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상대화시킵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세계관, 즉 가치관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부활 생명을 다 설명하거나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실증적 증거로 확인할 수 없지만 성경 계시를 믿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사모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부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취되었고 우리가 믿지만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 과정에서 증명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역사의 끝에 부활의 신비가 확실하고 풍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까지 계시의 말씀을 배우고 부활공동체에 참여하여 주님의 약속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부활생명으로 소망가운데서 살아가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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