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구원론-무시되는 영벌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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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5-03-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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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는 유난히 지옥의 공포가 강조되었었습니다. 교회가 지옥의 공포를 강조한 것이 교회의 지배적 이 데올로기라고 비판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수도사들까지 대부분의 묵상시간을 지옥의 공포를 극복하는데 사용한 것을 보면 그것을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만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물론 지옥의 공포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하나님과 복음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고, 또한 교회가 그것을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이용한 면은 철저히 비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14세기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는 아름다운 천당과 공포의 혼돈이 지배하는 지옥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1541년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되던 날 그곳에 모였던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과 교황청 관료들과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 모두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쥐어짜는 듯한 “이단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미켈란젤로를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 참여한 모두는, 성인 성녀들을 포함하여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임을 보고 경악하면서 당장 지울 것을 요구하였으나 작가는 그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논란이 거듭되다가 작가의 제자였던 볼테라(Daniele da Volterra: 1509-1566)에 의해 스승의 의도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성기 부분에 최소한의 가리개만 입히는 수준으로 변형시켰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작품을 본래 상태로 복원할 것을 허락함으로써 몇 백 년 만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아무리 탁월해도 그 시대정신과 당시 교회의 형편과 그것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과 인식과 판단의 반영일 뿐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복음을 충분히 반영하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로마에 갔을 때 로마는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혼란과 두려움과 무기력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두 강대국인 스페인과 프랑스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1527년 카를 5세가 로마를 침략하여, 476년 야만인들에 의해 로마가 멸망한 이래 가장 비참하고 치욕적인 생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군인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살해하고 수녀들을 성폭행 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은 군인들의 마구간으로, 바티칸 궁전은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하므로 로마인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밟혔으며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미래임을 상기시키면서 관람객들로 하여금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자신을 보게 하려고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에는 유난히 성직자가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죄는 성과 돈에 대한 탐욕으로 묘사된 것을 보아 지옥의 공포를 강조한 것이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만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교회와 사회는 총체적으로 부패해 있었지만 지옥의 공포는 탐욕의 죄에 대한 경고가 강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옥 가는 죄가 교리적인 죄이기보다 교회의 부패와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고발이라는 성격이 농후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옥에 대한 공포는 “교회는 신만이 가질 수 있는 죽음의 권력을 지상에서 사용하였다.”고 하여 교회 권력층을 고발하는 특징도 지니고 있습니다.
지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왜곡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어떤 이유로든지 지옥에 대한 정당한 두려움을 감소시키거나 없애버리려는 생각이나 경향은 경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교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형벌의 보응을 점점 강조하는 쪽으로 왜곡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상업적인 수준으로 전락시켜 정확한 계산에 근거하여 사람을 처리하시는 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양에 있어서나 강조에 있어서 형벌보다는 사랑 쪽에 무게와 강조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온갖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징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손상시키고 그 결과 유대교나 중세 교회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벌과 지옥의 심판의 공포에 질려 복음 안에서의 은혜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을 악용하거나 남용하여 복음과 예수님의 말씀을 오직 사랑만으로 설명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성경은 하나님도 사랑이시라고 하였지만 복음과 함께 선포된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과 그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편 구원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는 있어도 영벌(영원한 형벌)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고대 헬라 교부들, 판테이누스, 클레멘트, 오리겐 같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이들은 보편 구원론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리겐의 보편 구원론은 주후 54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설로 규정되었지만 그러한 주장은 현대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암시하였고 그 후 신정통주의 신학의 영향 하에서 보편 구원론의 경향은 확산되어 왔습니다. 미국의 미시건 주 마르스 힐(Mars Hill)교회 담임이었던 롭 벨(Rob Bell) 목사는 그의 저서 “사랑이 이긴다.: 천국, 지옥,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책(A Book About Heaven, Hell, and the Fate of Every Person Who Ever Lived)”에서 지옥은 없으며,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보편 구원론 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편 구원론적인 주장을 거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강조하다 보면 보편 구원론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형별의 보응원리가 손상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형벌 그 어느 것도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조금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이해와 판단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편협하다고 생각하는 배경에는 예정과 제한구원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반발은 하나님께 대한 이성의 반발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편 구원론의 주장이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종교다원주의가 발흥하며 보편 구원론 역시 확산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에 부응하는 교회들이 가시적 성장에 집착하는 동안 보편 구원론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의 역할을 무장 해제시키고 말았습니다. 작금 현대인에게 어필하는 유명한 설교자의 메시지와 기독교 신앙의 베스트셀러는 보편 구원론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전통적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음부)에 내려가사”부분을 빼버린 것은 아주 잘못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도신경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나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여러 번 지옥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 십자가는 주님께서 그 지옥의 형벌을 우리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지옥의 형벌을 받으신 사실을 명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작성한 거의 모든 교리교육서와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서 역시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형벌의 가혹함과 처참함을 아는 만큼 깊고 넓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늘 지옥의 공포에 떨며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지만 영벌에 대한 의식 없이 사는 것 역시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벌이 없다면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14세기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는 아름다운 천당과 공포의 혼돈이 지배하는 지옥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1541년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되던 날 그곳에 모였던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과 교황청 관료들과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 모두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쥐어짜는 듯한 “이단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미켈란젤로를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 참여한 모두는, 성인 성녀들을 포함하여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임을 보고 경악하면서 당장 지울 것을 요구하였으나 작가는 그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논란이 거듭되다가 작가의 제자였던 볼테라(Daniele da Volterra: 1509-1566)에 의해 스승의 의도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차원에서 성기 부분에 최소한의 가리개만 입히는 수준으로 변형시켰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작품을 본래 상태로 복원할 것을 허락함으로써 몇 백 년 만에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아무리 탁월해도 그 시대정신과 당시 교회의 형편과 그것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과 인식과 판단의 반영일 뿐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복음을 충분히 반영하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로마에 갔을 때 로마는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혼란과 두려움과 무기력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두 강대국인 스페인과 프랑스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1527년 카를 5세가 로마를 침략하여, 476년 야만인들에 의해 로마가 멸망한 이래 가장 비참하고 치욕적인 생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군인들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살해하고 수녀들을 성폭행 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은 군인들의 마구간으로, 바티칸 궁전은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하므로 로마인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밟혔으며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미래임을 상기시키면서 관람객들로 하여금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자신을 보게 하려고 “최후의 심판”을 그렸습니다. 지옥에 대한 묘사에는 유난히 성직자가 많이 등장하고 그들의 죄는 성과 돈에 대한 탐욕으로 묘사된 것을 보아 지옥의 공포를 강조한 것이 교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만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교회와 사회는 총체적으로 부패해 있었지만 지옥의 공포는 탐욕의 죄에 대한 경고가 강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옥 가는 죄가 교리적인 죄이기보다 교회의 부패와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고발이라는 성격이 농후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옥에 대한 공포는 “교회는 신만이 가질 수 있는 죽음의 권력을 지상에서 사용하였다.”고 하여 교회 권력층을 고발하는 특징도 지니고 있습니다.
지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왜곡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어떤 이유로든지 지옥에 대한 정당한 두려움을 감소시키거나 없애버리려는 생각이나 경향은 경계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교는 하나님의 사랑보다 형벌의 보응을 점점 강조하는 쪽으로 왜곡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상업적인 수준으로 전락시켜 정확한 계산에 근거하여 사람을 처리하시는 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양에 있어서나 강조에 있어서 형벌보다는 사랑 쪽에 무게와 강조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온갖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징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손상시키고 그 결과 유대교나 중세 교회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벌과 지옥의 심판의 공포에 질려 복음 안에서의 은혜와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을 악용하거나 남용하여 복음과 예수님의 말씀을 오직 사랑만으로 설명하고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성경은 하나님도 사랑이시라고 하였지만 복음과 함께 선포된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과 그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편 구원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는 있어도 영벌(영원한 형벌)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고대 헬라 교부들, 판테이누스, 클레멘트, 오리겐 같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한 이들은 보편 구원론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리겐의 보편 구원론은 주후 54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설로 규정되었지만 그러한 주장은 현대까지 꾸준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암시하였고 그 후 신정통주의 신학의 영향 하에서 보편 구원론의 경향은 확산되어 왔습니다. 미국의 미시건 주 마르스 힐(Mars Hill)교회 담임이었던 롭 벨(Rob Bell) 목사는 그의 저서 “사랑이 이긴다.: 천국, 지옥,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책(A Book About Heaven, Hell, and the Fate of Every Person Who Ever Lived)”에서 지옥은 없으며,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보편 구원론 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편 구원론적인 주장을 거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강조하다 보면 보편 구원론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형별의 보응원리가 손상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형벌 그 어느 것도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조금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이해와 판단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편협하다고 생각하는 배경에는 예정과 제한구원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반발은 하나님께 대한 이성의 반발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편 구원론의 주장이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종교다원주의가 발흥하며 보편 구원론 역시 확산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에 부응하는 교회들이 가시적 성장에 집착하는 동안 보편 구원론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의 역할을 무장 해제시키고 말았습니다. 작금 현대인에게 어필하는 유명한 설교자의 메시지와 기독교 신앙의 베스트셀러는 보편 구원론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전통적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음부)에 내려가사”부분을 빼버린 것은 아주 잘못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도신경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지옥강하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나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여러 번 지옥에 대한 말씀을 하셨고, 십자가는 주님께서 그 지옥의 형벌을 우리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지옥의 형벌을 받으신 사실을 명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작성한 거의 모든 교리교육서와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서 역시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형벌의 가혹함과 처참함을 아는 만큼 깊고 넓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늘 지옥의 공포에 떨며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지만 영벌에 대한 의식 없이 사는 것 역시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벌이 없다면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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