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생명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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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5-03-1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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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신화에는 최고의 신인 제우스도 어쩔 수 없는 영원한“운명”(μοῖρα)이라는 절대 개념이 있습니다. 이 운명 앞에는 신들도 꼼짝할 수 없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습니다. 희랍비극의 출현은 이 영원한 운명에 항거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과 철학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중세철학에서는 주지설(Intellectualism)과 주의설(Voluntarism)이 그랬고, 칸트는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찌의 철학이 가져올 숙명론을 극복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썼습니다. 운명론이나 숙명론은 인간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이고, 인간의 자유를 부인하면 도덕이나 윤리가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칸트는 자유와 결정론의 이율배반을 통해 자연법은 현상의 세계에, 자유는 가상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자유는 과학적 이론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여 자유와 과학적 필연성 둘 다를 가능하게 하려고 노력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그가 주장한 무상명령에 의해 규제되기 때문에 임의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다만 이성의 본능에 의하여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법칙에 따라 결정하는 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유의지를 이론적으로 취급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러한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버드대의 심리학 교수였던 스키너는 그의 “자유와 존엄성을 넘어서”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나 자유의지나 인격 같은 것의 존엄성을 세속화 시켜버렸습니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일체 부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유전을 포함하여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론은 미국을 비롯하여 영어권의 모든 행동주의 과학과 철학 사상에 깊이 뿌리 내린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인간을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도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의적으로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외부의 자극에 의하여 행동하며 그 진로가 결정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환경에 의해 상당할 정도로 지배를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환경의 영향이나 어떤 원인 없이 행동할 수 있고 자기의 욕구를 거슬러 행동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따르드(Gabriel de Tarde)는 인간을 “큰 신에 대항하는 하나의 작은 신”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를 비롯하여 셈족어로 신을 “엘”(לא) 이라고 합니다. 이 엘은 힘 곧 능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힘의 행사여부, 행사방식, 행사시간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권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자유의지를 소유하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가장 하나님을 닮은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인간의 지식과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자유가 확대되고 그것이 곧 인간 성숙과 존엄이 신장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조가 인간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은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과 논리는 자유를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 희랍신화의 “운명”은 희랍철학에 그대로 유지되어 거의 모든 희랍철학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특성을 유지하고 그것은 현대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희랍 비극이 보여주는 것은 영구 불변한 합리적 진리에 항거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실패로 끝나며 어리석고 무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희랍철학이 전제하는 합리는 그 본질상 자유와 조화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나 이론은 원인을 따지는 학문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자유는 그 본질상 원인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자유에는 원인이 없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자유가 아닙니다. 합리와 과학이 원인을 통해 자유를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론적 사고는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본체론)는 주장이 “하나님이나 인간이 자기 뜻대로 그렇게 결정했다.”(주지론)는 주장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과학이 비과학적인 우연이라는 전제 위에 이론을 세워 놓고 그것을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는 인격체와 관계된 문제이고 현상에 지배 받지 않지만 이론적 사고는 본질상 비인격적인 현상을 그 대상으로 하고 그 현상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듯이 생명 또한 그러합니다. 생명의 신비를 풀어보려는 인간의 노력은 끝이 없지만 생명에 대한 철학적 또는 과학적 설명이 더해질수록 생명의 신비는 점점 더 깊어갑니다. 상식적으로 생명이란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의 과정과 상태를 말하나 학술적으로는 생과 사의 경계마저 확실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론도 자연발생설이나 배종발달설 등 여러 학설이나 이론이 있지만 이 모두는 원인을 추적하여 생명의 기원을 알아내려는 과학적인 방법들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과학적으로 정의하거나 규명할 수 없는 것처럼 생명도 과학으로 규명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생명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이론을 세웁니다. 그 이론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기 때문에 어떤 이론이나 법칙이나 원리로 설명을 한다 해도 다음 순간 곧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고 맙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멘델의 유전의 법칙들이 자신들에 의해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고 도전 받고 있는 것도 생명이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생명현상의 가장 대표적 특징은 자유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생명은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도 영향 받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그런 자유의지가 없다면 도덕적 책임도 질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것은 짐승의 수준입니다. 짐승은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어떤 도덕적 책임도 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고 자유의지는 인간 존엄성의 핵심이며 하나님 형상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성경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존재 형식의 특징이 자유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방종을 뜻하지 않고 자유를 포기할 자유까지를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책임적 존재이고 책임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 갈 5:1,13 -
그러나 자유는 그가 주장한 무상명령에 의해 규제되기 때문에 임의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다만 이성의 본능에 의하여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법칙에 따라 결정하는 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유의지를 이론적으로 취급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러한 결과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버드대의 심리학 교수였던 스키너는 그의 “자유와 존엄성을 넘어서”라는 책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나 자유의지나 인격 같은 것의 존엄성을 세속화 시켜버렸습니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일체 부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유전을 포함하여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론은 미국을 비롯하여 영어권의 모든 행동주의 과학과 철학 사상에 깊이 뿌리 내린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인간을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 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행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도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의적으로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외부의 자극에 의하여 행동하며 그 진로가 결정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환경에 의해 상당할 정도로 지배를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환경의 영향이나 어떤 원인 없이 행동할 수 있고 자기의 욕구를 거슬러 행동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따르드(Gabriel de Tarde)는 인간을 “큰 신에 대항하는 하나의 작은 신”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를 비롯하여 셈족어로 신을 “엘”(לא) 이라고 합니다. 이 엘은 힘 곧 능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힘의 행사여부, 행사방식, 행사시간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권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자유의지를 소유하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가장 하나님을 닮은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인간의 지식과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자유가 확대되고 그것이 곧 인간 성숙과 존엄이 신장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조가 인간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은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과 논리는 자유를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 희랍신화의 “운명”은 희랍철학에 그대로 유지되어 거의 모든 희랍철학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특성을 유지하고 그것은 현대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희랍 비극이 보여주는 것은 영구 불변한 합리적 진리에 항거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실패로 끝나며 어리석고 무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희랍철학이 전제하는 합리는 그 본질상 자유와 조화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나 이론은 원인을 따지는 학문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자유는 그 본질상 원인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자유에는 원인이 없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자유가 아닙니다. 합리와 과학이 원인을 통해 자유를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론적 사고는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본체론)는 주장이 “하나님이나 인간이 자기 뜻대로 그렇게 결정했다.”(주지론)는 주장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과학이 비과학적인 우연이라는 전제 위에 이론을 세워 놓고 그것을 과학적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는 인격체와 관계된 문제이고 현상에 지배 받지 않지만 이론적 사고는 본질상 비인격적인 현상을 그 대상으로 하고 그 현상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듯이 생명 또한 그러합니다. 생명의 신비를 풀어보려는 인간의 노력은 끝이 없지만 생명에 대한 철학적 또는 과학적 설명이 더해질수록 생명의 신비는 점점 더 깊어갑니다. 상식적으로 생명이란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의 과정과 상태를 말하나 학술적으로는 생과 사의 경계마저 확실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론도 자연발생설이나 배종발달설 등 여러 학설이나 이론이 있지만 이 모두는 원인을 추적하여 생명의 기원을 알아내려는 과학적인 방법들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과학적으로 정의하거나 규명할 수 없는 것처럼 생명도 과학으로 규명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생명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이론을 세웁니다. 그 이론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외부의 조건에 의해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기 때문에 어떤 이론이나 법칙이나 원리로 설명을 한다 해도 다음 순간 곧 설명이 불가능하게 되고 맙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멘델의 유전의 법칙들이 자신들에 의해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고 도전 받고 있는 것도 생명이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생명현상의 가장 대표적 특징은 자유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생명은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도 영향 받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그런 자유의지가 없다면 도덕적 책임도 질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것은 짐승의 수준입니다. 짐승은 자유의지가 없기 때문에 어떤 도덕적 책임도 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고 자유의지는 인간 존엄성의 핵심이며 하나님 형상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성경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존재 형식의 특징이 자유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방종을 뜻하지 않고 자유를 포기할 자유까지를 의미하며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책임적 존재이고 책임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 갈 5: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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