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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과 경건과 종교심을 넘어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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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5-02-28

본문

신앙인의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심입니다. 나다나엘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은 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나다나엘은 그 초월적 능력에 압도되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하면 종교심이 발동합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점쟁이 말을 믿게 됩니다. 합리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이나 대학교수들까지 점쟁이의 신통력에 넘어갑니다. 하지만 점쟁이들의 신통력이나 귀신의 능력은 생명력이 아닙니다. 파괴력입니다. 속임이고 거짓입니다. 참 진리가 아닌 것, 참 생명이 아닌 것을 믿게 하는 거짓이고 사기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의 능력은 생명력입니다. 창조하시고 살리시고 치료하시고 세우시고 구원하시고 기쁘게 하시고 행복하고 보람되게 하시는 능력이십니다. 그런데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귀신의 능력이나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표적과 이적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요소 중의 표적을 믿는 신앙은 매우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표적이나 이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성경에 수많은 이적과 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표적과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고 즉각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불신앙은 초월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부인하게 하고 참 믿음은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종교심을 활용하여 믿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 믿음이 없는 자유주의 학자들일수록 도하 지점을 위쪽으로 잡습니다. 왜냐하면 위쪽으로 갈수록 수심이 얕기 때문입니다. 수심이 얕을수록 홍해가 기적으로 갈라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도하 지점을 위쪽으로 잡으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기적으로 건넌 것이 아니고 내를 건너듯이 건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믿음 없는 집사님이 이스라엘이 홍해를 기적으로 건넜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다른 집사님에게 홍해 도하 지점이 수심이 얕은 위쪽이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믿음이 좋은 집사님이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답니다. “그래?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야! 그렇게 얕은 물에 애굽의 정예 기마병을 다 빠져 죽게 하셨으니까 말이야.”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믿는 쪽으로 생각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든 못 믿을 쪽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종교심을 억지로 막으면 안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종교심을 자꾸만 억누릅니다. 로마서 1: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는데, 칼빈은 이 구절을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종교심을 억누르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마치 용수철이 튀어 오르려는데 그것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억지로 짓누르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인간의 미련함이요 어리석음이요 불신앙이 라고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은 기독교에서 초자연적인 요소, 즉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요소는 다 빼버립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단순한 교훈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로 만들어버립니다. 기독교를 세속화시키는 것입니다. 세속화란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서 신적인 요소를 제거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 교회 안에 그런 요소가 많습니다. 유명한 설교와 신앙적 베스트셀러 가운데 보편구원론, 즉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이 많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왜곡하는 경향은 언제나 두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표적이나 초자연적인 계시의 내용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쪽으로 나아갑니다. 대개 진보적인 사람들이나 지식인들이 이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극단적 신비주의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역사와 학문과 이성과 윤리를 무시하고 오직 신비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이런 경향은 오순절이나 순복음이나 제3의 물결이나 아이합이나 시한부종말론이나 신사도운동 같은 데서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경계해야 할 점은 현대의 대형교회들이 메시지에 이 둘을 적당히 섞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런 메시지에는 초자연적인 표적도 있고 합리성도 있고 윤리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현대에는 이런 경향이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정직해야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종교심을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자 즉각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삶에 있어서 좋은 요소들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어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고 경건한 생활을 하였고 표적도 믿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그런 것은 매우 초보적인 것이고 작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예수님이 곧 하늘과 땅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강림하신 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의 비밀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깊고 오묘한 진리를 보고 깨닫고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단순히 윤리적인 실천이나 감성적인 느낌이나 종교심의 확신으로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로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이전까지 나다나엘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이것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들입니다. 착하고 정직한 것 경건과 지식과 종교심은 작은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이것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넘어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착함과 경건과 종교심은 소중한 것들입니다. 사회생활에서는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와 취미도 중요한 것들입니다. 가족과 직장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나름대로 가치를 부여하고 귀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들입니다. 동물의 세계나 인간 세계가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운 것 같지만 그들은 결국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인간이 활동하는 정치, 기업, 직장의 현장은 먹고 먹히는 아프리카의 동물의 세계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세상의 질서입니다. 거미는 나비를 잡아먹고 새는 거미를 잡아먹습니다.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작은 물고기는 세우를 잡아먹고 세우는 플랑크톤을 잡아먹습니다. 그게 자연의 질서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 세상도 다름없습니다. 이 질서 가운데 모든 것이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데 그런 것은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가족도 친구도 나라도 돈도 명예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영원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바로 서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믿는 이들 중에 신앙을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더 성취하고 싶은 욕망의 통로로 이용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니고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착하고 정직한 사람 되는 정도가 아니고, 철저한 규범적인 경건 생활 하는 것도 아니고, 신비한 체험이나 표적을 믿는 종교심도 아니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올인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정도로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의 종교 전통인 정직과 경건과 표적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정도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복음의 진수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들입니다. 그 작은 것들을 넘어서도록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더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복음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시고 생명의 신비와 비밀을 보고 누리게 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직과 경건과 표적을 믿는 종교심을 넘어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와 자연환경에서 하나님의 비밀과 진리와 새 생명의 신비를 깨닫고 풍성하게 경험하며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요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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