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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영적 생명 활동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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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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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구체적 증거는 인간에게 주어진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1차 독자인 출애굽 한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가장 합당하고 쉬운 설명은 하나님을 애굽의 바로와 같은 절대 통치자로 묘사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애굽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주권자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와 같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다스리고 통치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창조물을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고 다스리시지만, 그보다 더 넓고 높은 차원의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의 직접 통치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통하여 다스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뒤돌아볼 때 교회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라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많은 부작용을 발생시켰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신수설이 그 대표적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약점들도 이에 해당하고, 21세기에 인류가 당면한 환경 문제인 지나친 자원 개발과 과소비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동안 ‘다스리라’는 말씀을 심각할 정도로 오해했고, 그 부작용은 인류에게 가공할 폐해를 입혔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기독교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기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도 그 오해와 폐해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들어‘다스리라’는 말씀이 단순한‘통치’나 ‘지배’라기보다 ‘돌보라’는 뜻이라고 이해하는 성경학자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만물을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지배적 다스림의 의미보다 사랑으로 보살피신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서로에 대해서나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들과 갖는 관계에서와 동일한 영향을 미치고 결과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사는 구체적 현상이고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심오한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예를 통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11).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돌이 채 안 된 손자와 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인생에 대하여, 생명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며 마치 무엇인가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무엇과 같은 의미들을 잡으려고 허우적댔습니다. 이제 태어난 지 6개월 되는 손자가 살아 있다는 것과 생애 마지막 몇 개월의 시간을 보내시던 아버지가 살아 계신 것은, ‘살아 있다’는 사실로서는 같지만 현상적으로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손자의 눈은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듯 호기심으로 반짝였지만 아버지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고 귀찮아서 늘 감고 계실 때가 많았습니다. 손자의 생명은 절정을 향하여 발현하는 씨앗과 같고 아버지의 생명은 꺼져가는 불꽃같았습니다. 약동하는 손자의 생명도 언젠가 사그라져 가는 아버지의 생명과 같은 과정을 밟게 될 것도 상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생물학적 생명은 이와 같은 과정을 지나면서 육체의 모든 기능들과 함께 쇠잔 하여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와 같은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에 대하여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시 89:47)라고 읊조렸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들은 이 시편 기자의 마음을 가슴 저미도록 공감하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진실로 허무하다는 사실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너무도 실감나게 인식하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생물학적 생명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한없는 안도감을 갖습니다. 영적 생명은 폐나 심장이나 뇌의 기능에 의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의 기능들이 정지되고 육체가 썩어 모든 진료가 산화해도 영원한 생명은 아무런 데미지를 입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 땅에서의 혈연관계와 계약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초월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땅에서의 나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만이 아니고 나의 아내가 나의 아내만이 아니고 나의 자녀가 나의 자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대통령과 최하급 공무원, 대형교회 목사와 조그만 교회 목사, 판사와 죄수, 의사와 환자, 선생과 제자, 강한 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천국에서의 그와 같은 사실이 지금 이 땅에서 작동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활동 현상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꺼져가는 불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도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으로만 살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삽니다. 영원한 영적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사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란 하나님의 뜻과 관심과 사랑에 맞추어 생각하고 말하고 결심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심과 사랑은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생물학적 생명을 포함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살도록 보살피고 돕는 것입니다. 그것의 구체적 적용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세워주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나 상황에서도 자신의 입지와 인기와 명예와 기타 이익을 먼저 도모하는 것은 영적 생명과 반대되는 것으로 죄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어떤 개인을 구심점으로 하는 진영을 만들거나 편을 만들거나 자신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논리와 학문과 경험을 사용하는 것은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영적으로 죽은 자의 행태입니다. 영적인 영원한 생명은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살리는 쪽으로 영적 촉수를 더듬어 맞추어 갑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가 자신을 죽이므로 발휘되게 하셨습니다. 그 본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 고후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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