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 대한 설명과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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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4-12-1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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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비교적 존중하였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전의 그와 같은 기준보다는 자신이 보고 느끼는 데 따른 판단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자신이 느끼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자신이 좋게 보고 좋게 느끼면 행복한 것이고, 자신에게 좋지 않게 보이고 좋지 않게 느껴지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좋은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현대인의 이러한 가치관은 실존을 본질에 앞세우는(existence must precede essence) 실존주의의 영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존주의는 “주관성이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subjectivity must be the starting point)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관성을 출발점으로 삼는 사상은 객관적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는 정통 기독교와 다릅니다. 물론 무신론적 실존주의와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싸잡아 취급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 둘은 계시의 절대성을 상대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한국 교회에서 강조되는 ‘은혜’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실존주의와 그 외의 여러 현대사조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통 기독교의 ‘은혜’ 개념은 기독교와 이방 종교, 즉 계시종교와 자연종교를 구분할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자연종교에는 은혜 개념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자체 안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의미를 왜곡하는 신학사조와 부단한 싸움을 계속해왔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은혜를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만큼 심각합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는 거의 이 은혜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예정교리도 결국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정교리만큼 은혜를 확실하게 하는 교리가 없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이 은혜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전 역사는 은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은혜는 계시적이고 역사적이고 객관적이고 초월적입니다. 그 은혜는 감성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느끼지 못하고 반응을 하지 못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의 모든 성경을 통해 당신의 은혜를 설명하고 은혜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십니다. 따라서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성경저자들이나 오늘날 설교자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고 해명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이 은혜는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입니다. 중요한 만큼 은혜를 잘못 이해하면 피해도 큽니다. 한국교회는 이 은혜를 오해하고 오용하는 일이 너무 심합니다. 예배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로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한 마디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은혜 타령이 심합니다. 다른 나라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예배나 설교가 자기 마음에 들고 감동이 되면 은혜 받았다고 하고 자기마음에 안 들면 은혜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자기 판단과 기분에 의해 좌우됩니다. 은혜는 그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일입니다. 은혜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배와 설교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목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를 끼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교인이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아멘을 연습시키기도 합니다. 슬픈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시고 길이십니다. 설교자는 진리와 길을 제시하고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대설교자는 마치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안달하는 장사꾼과 같습니다.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고 영역인데 인위적인 방법적으로 해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란 그 성격상 베푸시는 분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감정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판단과 기분에 의해 좌우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은혜에는 우리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그 섭리를 이루신 위대하고 장구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합니다. 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은 은혜를 받으라고 강조하는 일이 아니고 은혜 자체에 대해 설명하고 해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해명하고 설명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구원과 계시와 하나님의 나라와 성도의 삶 전반이 이 은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과 문화와 역사와 정치와 경제와 과학과 예술과 일상이 모두 이 은혜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일만도 벅찹니다. 이미 받아서 누리고 있는 은혜를 다 설명하고 은혜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데도 시간과 설교자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라고 닦달하는 것이나 은혜를 받으려고 안달하는 것은 참 기독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대한 설교자의 설명이 턱없이 부족해도 은혜를 은혜로 깨닫고 느끼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은혜를 끼치는 자라는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나 은혜의 바른 의미를 배워 가는데 일생을 투자해도 모자랍니다.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에 따라 은혜의 유무가 결정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존주의적 믿음입니다. 넓게 보면 그런 것도 은혜이기는 합니다. 어떻게 보면 생활이 어렵고 힘들수록 그런 은혜가 필요하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만 성경은 그것을 강조하여 가르쳤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그런 것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은혜를 강조할 때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은혜가 아닙니다. 감정과 느낌에 의해 좌우되는 은혜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역사적이고 계시적이고 상대적이 아니고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구약의 역사에서도 그와 같은 가르침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다가 나라를 잃고 백성의 일부는 포로로 잡혀가고 일부는 남아서 식민통치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에게 은혜란 어떤 것일까요? 하루 세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이고, 의료보험도 없는 데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은혜이고, 자신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들에게 오늘 하루도 얻어맞지 않고 무사히 보낸 것이 은혜이고,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도 대단합니다. 그런 것도 은혜인 것은 맞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을 잘못하면 자신의 인생을 저주와 형벌과 재난과 고통으로 인한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모든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면 좋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은 아닙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시각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자신들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는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그의 모든 관심과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시각과 태도는 조국 유다가 망하는 운명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바벨론 포로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은혜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진행형으로 역사상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믿음, 물론 고난과 역경의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 성취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유다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가 없어졌고 성전도 파괴되었고 인권도 자유도 모두 빼앗겼는데 말씀의 성취는 무슨 소리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시각입니다. 사람들은 현실만 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와 역사를 바라보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선지자와 백성들의 단순한 영적 수준의 차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것은 운명론이 아니고 숙명론도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악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의 영역에서 벗어난 게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극명한 예입니다. 철저한 실패 같은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승리로 결론 났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승리에 참여한 자들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누구도 다 헤아릴 수 없기에 설명이 필요 하고 은혜를 오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명이 필요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엡 1:17-19 -
현대 한국 교회에서 강조되는 ‘은혜’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치우치고 있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실존주의와 그 외의 여러 현대사조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정통 기독교의 ‘은혜’ 개념은 기독교와 이방 종교, 즉 계시종교와 자연종교를 구분할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자연종교에는 은혜 개념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자체 안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의미를 왜곡하는 신학사조와 부단한 싸움을 계속해왔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은혜를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만큼 심각합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는 거의 이 은혜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예정교리도 결국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정교리만큼 은혜를 확실하게 하는 교리가 없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이 은혜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전 역사는 은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은혜는 계시적이고 역사적이고 객관적이고 초월적입니다. 그 은혜는 감성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느끼지 못하고 반응을 하지 못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의 모든 성경을 통해 당신의 은혜를 설명하고 은혜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십니다. 따라서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성경저자들이나 오늘날 설교자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고 해명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이 은혜는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입니다. 중요한 만큼 은혜를 잘못 이해하면 피해도 큽니다. 한국교회는 이 은혜를 오해하고 오용하는 일이 너무 심합니다. 예배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로 모든 것을 평가합니다. 한 마디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은혜 타령이 심합니다. 다른 나라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예배나 설교가 자기 마음에 들고 감동이 되면 은혜 받았다고 하고 자기마음에 안 들면 은혜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자기 판단과 기분에 의해 좌우됩니다. 은혜는 그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일입니다. 은혜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배와 설교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목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를 끼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교인이 설교에 은혜를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아멘을 연습시키기도 합니다. 슬픈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시고 길이십니다. 설교자는 진리와 길을 제시하고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대설교자는 마치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안달하는 장사꾼과 같습니다.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고 영역인데 인위적인 방법적으로 해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란 그 성격상 베푸시는 분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감정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판단과 기분에 의해 좌우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은혜에는 우리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그 섭리를 이루신 위대하고 장구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합니다. 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은 은혜를 받으라고 강조하는 일이 아니고 은혜 자체에 대해 설명하고 해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해명하고 설명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구원과 계시와 하나님의 나라와 성도의 삶 전반이 이 은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연과 문화와 역사와 정치와 경제와 과학과 예술과 일상이 모두 이 은혜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일만도 벅찹니다. 이미 받아서 누리고 있는 은혜를 다 설명하고 은혜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데도 시간과 설교자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라고 닦달하는 것이나 은혜를 받으려고 안달하는 것은 참 기독교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대한 설교자의 설명이 턱없이 부족해도 은혜를 은혜로 깨닫고 느끼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은혜를 끼치는 자라는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이나 은혜의 바른 의미를 배워 가는데 일생을 투자해도 모자랍니다.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에 따라 은혜의 유무가 결정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존주의적 믿음입니다. 넓게 보면 그런 것도 은혜이기는 합니다. 어떻게 보면 생활이 어렵고 힘들수록 그런 은혜가 필요하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만 성경은 그것을 강조하여 가르쳤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그런 것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은혜를 강조할 때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은혜가 아닙니다. 감정과 느낌에 의해 좌우되는 은혜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역사적이고 계시적이고 상대적이 아니고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구약의 역사에서도 그와 같은 가르침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다가 나라를 잃고 백성의 일부는 포로로 잡혀가고 일부는 남아서 식민통치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에게 은혜란 어떤 것일까요? 하루 세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은혜이고, 의료보험도 없는 데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은혜이고, 자신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들에게 오늘 하루도 얻어맞지 않고 무사히 보낸 것이 은혜이고,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도 대단합니다. 그런 것도 은혜인 것은 맞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각을 잘못하면 자신의 인생을 저주와 형벌과 재난과 고통으로 인한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모든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면 좋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은 아닙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시각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자신들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는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그의 모든 관심과 역량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시각과 태도는 조국 유다가 망하는 운명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바벨론 포로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새로운 은혜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진행형으로 역사상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믿음, 물론 고난과 역경의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 성취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유다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가 없어졌고 성전도 파괴되었고 인권도 자유도 모두 빼앗겼는데 말씀의 성취는 무슨 소리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형편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시각입니다. 사람들은 현실만 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와 역사를 바라보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선지자와 백성들의 단순한 영적 수준의 차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것은 운명론이 아니고 숙명론도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악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의 영역에서 벗어난 게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극명한 예입니다. 철저한 실패 같은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승리로 결론 났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승리에 참여한 자들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누구도 다 헤아릴 수 없기에 설명이 필요 하고 은혜를 오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명이 필요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엡 1: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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