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직 개념과 섬김의 왕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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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ㆍ2014-11-1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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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왕의 역할과 관련된 맥락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고 왕 이시라는 사실은 성경 안에서 증명 된 사실이 아니라 전제 된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명령은 모든 생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이 곧 하나님 형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그 지배권을 행사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일환이며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을 본받도록 받은 소명입니다.
시편 145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하여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시편 기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그 계획에서의 지혜와 실행에서의 능력과 완성에서의 선함이 풍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는 능력과 자비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이 곧 후대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왕의 자질로 요구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위임된 지배권을 행사할 때 하나님의 왕권이 갖는 성격과 가치들을 반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은 거만한 패권의 남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겸손히 반영하는 섬김입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어떤 우월주의도 일체 배격합니다. 인간이 받은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처분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생각과 뜻에 제약을 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만이 아니라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관대하시고, 무엇보다 한없는 사랑으로 보호하십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모델로서 인간의 지배는 선한 목자, 겸손한 종, 섬기는 왕인데 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와 관련된 특징들입니다. 성경은 창조 기사에서부터 족장 시대와 출애굽 시대와 사사 시대와 왕정시대를 거처 신약 시대와 주님 재림까지 변하지 않는 인간의 청지기 직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청지기 직의 대표적인 오해와 남용의 예는 르호보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젊은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하였을 때 북부 지역 백성들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억압 정책을 완화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이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로운 노인들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지혜로운 노인들은 르호보암에게 왕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조언하였습니다.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왕상 12:7). 노인들의 이 말은 백성들이 왕을 섬겨야 하는 의무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왕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보다 앞서 백성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성경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왕의 통치에 대한 공통된 메타포가 바로 목자입니다. 왕은 그 백성의 목자였습니다. 목자의 일차적 책임은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목자’라는 메타포가 의미하는 것은 권리보다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르호보암처럼 폭력과 압제를 일삼던 왕들을 맹렬히 탄핵하면서 하나님만이 참 왕이시며 목자라고 하며 다윗의 혈통에서 나실 메시야를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창조 세계 안에서 행사해야 할 인간의 지배권은 청지기 직이라기보다 섬기는 왕 직이 더 적합합니다. ‘청지기’란 용어가 성경에 나오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직무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지만 그것의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금전적인 것에 국한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천연자원에 대한 무분별한 채굴과 독점과 남용까지도 도덕적인 것인 양 오해하게 하는 데 청지기 직 개념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청지기 직은 자본주의와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지배적이고 수탈적인 정신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지기 직은 청지기가 관리하는 재산보다 청지기의 존재가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살아 있는 존재들을 다스리며 섬기는 책임을 실현하는 데는 섬기는 왕 직이 더 적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물을 지키는 청지기가 아니라 모든 것을 섬김의 방식으로 다스리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자의 종으로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섬기는 왕의 직무는 특별히 약자를 위해 행사되어야 하고 강자를 편들거나 자기 이익 추구의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왕은 일을 바로 잡기 위해 시비에 개입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변호하고, 압제 당하는 자를 구해 주고, 억울한 호소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사정을 살피고 돕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일을 효과적으로 잘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대한 정확한 응답을 주셔서 아기를 두고 벌어진 두 창녀의 시비를 가려 만고에 귀감이 되는 지혜로운 판결을 하였습니다. 왕은 언제나 가장 취약한 자를 돕는 데 그의 관심과 성실을 쏟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하는 섬김의 왕 직입니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 잠언 31:8-9 -
시편 145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하여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시편 기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그 계획에서의 지혜와 실행에서의 능력과 완성에서의 선함이 풍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는 능력과 자비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이 곧 후대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왕의 자질로 요구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위임된 지배권을 행사할 때 하나님의 왕권이 갖는 성격과 가치들을 반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은 거만한 패권의 남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겸손히 반영하는 섬김입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어떤 우월주의도 일체 배격합니다. 인간이 받은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는 처분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생각과 뜻에 제약을 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만이 아니라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관대하시고, 무엇보다 한없는 사랑으로 보호하십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모델로서 인간의 지배는 선한 목자, 겸손한 종, 섬기는 왕인데 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와 관련된 특징들입니다. 성경은 창조 기사에서부터 족장 시대와 출애굽 시대와 사사 시대와 왕정시대를 거처 신약 시대와 주님 재림까지 변하지 않는 인간의 청지기 직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청지기 직의 대표적인 오해와 남용의 예는 르호보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젊은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하였을 때 북부 지역 백성들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억압 정책을 완화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이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로운 노인들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지혜로운 노인들은 르호보암에게 왕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조언하였습니다.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왕상 12:7). 노인들의 이 말은 백성들이 왕을 섬겨야 하는 의무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왕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보다 앞서 백성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성경 뿐 아니라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왕의 통치에 대한 공통된 메타포가 바로 목자입니다. 왕은 그 백성의 목자였습니다. 목자의 일차적 책임은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목자’라는 메타포가 의미하는 것은 권리보다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르호보암처럼 폭력과 압제를 일삼던 왕들을 맹렬히 탄핵하면서 하나님만이 참 왕이시며 목자라고 하며 다윗의 혈통에서 나실 메시야를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창조 세계 안에서 행사해야 할 인간의 지배권은 청지기 직이라기보다 섬기는 왕 직이 더 적합합니다. ‘청지기’란 용어가 성경에 나오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직무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지만 그것의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금전적인 것에 국한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천연자원에 대한 무분별한 채굴과 독점과 남용까지도 도덕적인 것인 양 오해하게 하는 데 청지기 직 개념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청지기 직은 자본주의와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지배적이고 수탈적인 정신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지기 직은 청지기가 관리하는 재산보다 청지기의 존재가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살아 있는 존재들을 다스리며 섬기는 책임을 실현하는 데는 섬기는 왕 직이 더 적합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물을 지키는 청지기가 아니라 모든 것을 섬김의 방식으로 다스리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은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자의 종으로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워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섬기는 왕의 직무는 특별히 약자를 위해 행사되어야 하고 강자를 편들거나 자기 이익 추구의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왕은 일을 바로 잡기 위해 시비에 개입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변호하고, 압제 당하는 자를 구해 주고, 억울한 호소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사정을 살피고 돕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일을 효과적으로 잘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대한 정확한 응답을 주셔서 아기를 두고 벌어진 두 창녀의 시비를 가려 만고에 귀감이 되는 지혜로운 판결을 하였습니다. 왕은 언제나 가장 취약한 자를 돕는 데 그의 관심과 성실을 쏟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하는 섬김의 왕 직입니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 잠언 3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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