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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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4-11-1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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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통 졌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력만 믿고 남에게 함부로 못되게 굶을 이르는 말입니다. 유서(諭書)는 임금이 신임하는 무장에게만 내리는 병력 동원 위임장입니다. 무장이 유서를 받는 것은 최고의 명예입니다. 유서를 전달할 때는 통에 넣어 짊어졌는데, 그 통을 짊어진 사람이 임금의 편지를 지고 가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큰 권세나 얻은 것처럼 오만 방자하게 구는 것을 빗대어 “유세통(有勢筒) 졌나?”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와 설교에 대한 묵상에서 “유세통 졌나?”라는 말이 떠올라, 내가 설교자로서 유세를 떨지나 않았나 해서 두렵고 한 편 부끄럽기도 합니다. 요즘은 ‘설교’라는 용어 대신에 ‘말씀 선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 선포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설교자의 행위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자부심이 무의식 가운데 하나님의 권위에 편승하는 태도로 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단순히 유서(諭書)의 전달자와 다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설교자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리 인식 능력이 뛰어난 설교자라고 해도 인식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자신의 인식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설교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실제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을 알고는 있을까, 모르면서 설교해도 되는 걸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청중이 이해하지 못해도 설교해야 할까, 설교하는 내용을 확신하고 있을까, 혹시 자신의 경험을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닐까, 설교자가 잘못된 확신으로 설교하고 청중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은혜(?)를 받는 경우는 없을까, 피할 수 없이 제기되는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 역시 피조물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지만 선포해야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합리적인 인간의 생각에 비해 독단적임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인 태도로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설교라면 그 설교는 정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쉬움과 여운을 남기게 되는 설교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가 여운을 남기고,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여운을 남기듯이 좋은 설교는 여운을 남기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중들은 독단적인 설교에 은혜(?)를 받고 설교자는 청중들의 반응에 도취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단적인 설교자는 자기가 은혜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아무리 탁월한 설교라도 설교자가 교만하면 여운을 남길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모든 행위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지만, 그 전제 하에 설교자의 역할과 성령님의 역할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성령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인위적으로 은혜를 끼치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하실 일에 월권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단으로 빠지게 됩니다. 설교자가 바르고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설교했다면 무엇인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운 여운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좋은 설교는 청중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게 하는 설교입니다. 마음에 질문이 생기면서도 평안하고 안정되고 들레지 않고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설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으니 설교나 설교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 되는 것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비판을 겸손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비해 사람들의 교육 수준은 높아졌습니다. 과거에 스스로 독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고 특히 인터넷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방대하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설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충분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상실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설교자들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는 거의 예외 없이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에드윈 햇취(Edwin Hatch)는 ‘철학이 악하게 전락해 버리고 희랍인의 생활 속에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미사여구로 꾸미려는 지나친 수사학의 구사 결과다.’라고 하였습니다. 수사학이 철학을 죽였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기독교에도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설교의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시 되어 설교가 오락거리가 되었습니다. 설교 내용에 대한 결핍은 청중들로 하여금 형식과 표현과 감성에 집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청중의 취향은 설교뿐 아니라 예배까지 흥미 본위로 변질시켰습니다. 예배에 들어 온 지나친 노래와 간증은 말씀의 결핍에 대한 반증입니다. 가수, 운동선수, 연예인, 정치인, 학자, 성공한 기업인, 성공한 직장인, 그 외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들이 교회 강단에 서게 되는 것을 청중들은 설교보다 선호하게 되었고 심지어 설교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지향하게 되는 것은 오락입니다. 현대 교회의 간증과 노래는 거의 오락 수준입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데도 비판자들은 설교 무용론과 청중의 필요를 말씀의 권위보다 앞세웁니다. 설교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중요성의 우선순위에서 차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우선이고 실천하고 본을 보이는 것은 차선입니다. 이 순서를 바꾸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은 그것을 감당하기에 역량이 안 되는 일을 하도록 받은 소명이지만 절대로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을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교회의 설교는 누구나 연습만 하면 할 수 있는 수준의 설교가 태반입니다. 목사는 장로나 집사나 기타 노래를 인도하거나 간증 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목사가 아닌 사람도 목사보다 더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마추어는 전문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입니다. 아마추어도 덕담이나 경험이나 성공비결이나 복 받는 비결이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 등을 소개하거나 기도만능 믿음만능 식으로 강조하면 훌륭한(?) 설교가 됩니다. 이런 설교는 어는 정도 말재간이 있는 사람이 조금만 연습하면 훌륭히 해 낼 수 있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면에서는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지만 일반 청중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을 비웃을 수 있는 철학 이해, 성경적 안목으로 정치와 경제와 문화 일반에 대해 수준 있는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고,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비판할 수 있는 실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은 좋은 설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입니다.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교리와 신학의 역사를 늘 공부해야 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목사는 선지자와 같이 일반인들이 상상도 못한 예언자적 앞서감이 있어야 하는 데,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그것은 신탁(神託)에 의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설교자에게 그것은 끊임없는 연구와 경건의 연습을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내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 딤전 4:11-13 -
목사와 설교에 대한 묵상에서 “유세통 졌나?”라는 말이 떠올라, 내가 설교자로서 유세를 떨지나 않았나 해서 두렵고 한 편 부끄럽기도 합니다. 요즘은 ‘설교’라는 용어 대신에 ‘말씀 선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 선포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설교자의 행위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자부심이 무의식 가운데 하나님의 권위에 편승하는 태도로 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단순히 유서(諭書)의 전달자와 다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설교자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리 인식 능력이 뛰어난 설교자라고 해도 인식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자신의 인식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설교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실제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을 알고는 있을까, 모르면서 설교해도 되는 걸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청중이 이해하지 못해도 설교해야 할까, 설교하는 내용을 확신하고 있을까, 혹시 자신의 경험을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닐까, 설교자가 잘못된 확신으로 설교하고 청중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은혜(?)를 받는 경우는 없을까, 피할 수 없이 제기되는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 역시 피조물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지만 선포해야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합리적인 인간의 생각에 비해 독단적임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인 태도로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설교라면 그 설교는 정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쉬움과 여운을 남기게 되는 설교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가 여운을 남기고,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여운을 남기듯이 좋은 설교는 여운을 남기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중들은 독단적인 설교에 은혜(?)를 받고 설교자는 청중들의 반응에 도취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단적인 설교자는 자기가 은혜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아무리 탁월한 설교라도 설교자가 교만하면 여운을 남길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모든 행위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지만, 그 전제 하에 설교자의 역할과 성령님의 역할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성령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인위적으로 은혜를 끼치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하실 일에 월권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단으로 빠지게 됩니다. 설교자가 바르고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설교했다면 무엇인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운 여운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좋은 설교는 청중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게 하는 설교입니다. 마음에 질문이 생기면서도 평안하고 안정되고 들레지 않고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설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으니 설교나 설교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 되는 것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비판을 겸손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비해 사람들의 교육 수준은 높아졌습니다. 과거에 스스로 독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고 특히 인터넷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방대하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설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충분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상실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설교자들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는 거의 예외 없이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에드윈 햇취(Edwin Hatch)는 ‘철학이 악하게 전락해 버리고 희랍인의 생활 속에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미사여구로 꾸미려는 지나친 수사학의 구사 결과다.’라고 하였습니다. 수사학이 철학을 죽였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기독교에도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설교의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시 되어 설교가 오락거리가 되었습니다. 설교 내용에 대한 결핍은 청중들로 하여금 형식과 표현과 감성에 집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청중의 취향은 설교뿐 아니라 예배까지 흥미 본위로 변질시켰습니다. 예배에 들어 온 지나친 노래와 간증은 말씀의 결핍에 대한 반증입니다. 가수, 운동선수, 연예인, 정치인, 학자, 성공한 기업인, 성공한 직장인, 그 외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들이 교회 강단에 서게 되는 것을 청중들은 설교보다 선호하게 되었고 심지어 설교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지향하게 되는 것은 오락입니다. 현대 교회의 간증과 노래는 거의 오락 수준입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데도 비판자들은 설교 무용론과 청중의 필요를 말씀의 권위보다 앞세웁니다. 설교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중요성의 우선순위에서 차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우선이고 실천하고 본을 보이는 것은 차선입니다. 이 순서를 바꾸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은 그것을 감당하기에 역량이 안 되는 일을 하도록 받은 소명이지만 절대로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을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교회의 설교는 누구나 연습만 하면 할 수 있는 수준의 설교가 태반입니다. 목사는 장로나 집사나 기타 노래를 인도하거나 간증 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목사가 아닌 사람도 목사보다 더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마추어는 전문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입니다. 아마추어도 덕담이나 경험이나 성공비결이나 복 받는 비결이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 등을 소개하거나 기도만능 믿음만능 식으로 강조하면 훌륭한(?) 설교가 됩니다. 이런 설교는 어는 정도 말재간이 있는 사람이 조금만 연습하면 훌륭히 해 낼 수 있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면에서는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지만 일반 청중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을 비웃을 수 있는 철학 이해, 성경적 안목으로 정치와 경제와 문화 일반에 대해 수준 있는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고,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비판할 수 있는 실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은 좋은 설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입니다.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교리와 신학의 역사를 늘 공부해야 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목사는 선지자와 같이 일반인들이 상상도 못한 예언자적 앞서감이 있어야 하는 데,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그것은 신탁(神託)에 의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설교자에게 그것은 끊임없는 연구와 경건의 연습을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내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 딤전 4: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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