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지상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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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ㆍ2014-10-29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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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은 모든 지식의 기초입니다. 거의 모든 학문은 이 상식의 토대 위에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론이 상식의 토대 위에 잘 세워지면 사람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됩니다. 상식이란 보편적인 가치나 자연 질서 같은 것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상식의 토대 위에서 학문의 깊이나 인격의 성숙이 더해갑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 상식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상식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가르칩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은총이라는 말은 특별은총과 구별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특별은총은 구원의 은혜이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일반은혜에 속합니다. 일반은혜, 즉 일반은총은 특별은혜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즉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특별은혜를 깨닫도록 하는 도구가 일반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자칫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잘 범하는 실수가 바로 일반은총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향이 심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원론 때문일 것입니다.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선교는 존재론적으로, 즉 그 자체로 거룩하고 옳고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일은 그 자체로 속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와 생각은 성경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물론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있습니다. 살인과 거짓은 그 자체로 악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기도와 선교와 구제 같은 것이 그 자체로 거룩하거나 선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분별하는 것이 경건의 능력 중의 하나입니다. 예배와 선교와 기도 같은 것은 본래 거룩하고 선한 것인데 그 동기와 목적과 방법이 잘못되어 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 배워서 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르치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우리는 전도나 선교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상명령에는 복음 전하는 것과 함께 진리를 가르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인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행하지 않으신 것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즉 가르치신 것은 다 행하셨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기가 가르친 것을 다 행할 수 없지만 예수님만은 가르치신 것을 다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고 또 보내어 전도도 하게하고 또한 귀신을 내어 쫓을 능력도 주시려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는 것은 사실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함께 있게 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려는 목적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본을 보임으로서 가르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직접 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과 직접 실천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말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말로 가르치고 본을 보이고 또한 실행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셨다는 것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공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배워서 가르칠 필요가 없지만 제자들의 상황은 다릅니다. 제자들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명령 안에는 배우라는 명령까지 패키지로 묶여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고 선생님에게 배울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배웠지만 오늘 우리의 상황은 좀 다릅니다. 궁극적으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지만, 그 성령님은 지성적 노력, 즉 독서나 연구를 통해서 배우도록 인도하십니다. 원칙적으로는 공부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 사람도 성령님께서 가르쳐 깨닫게 하실 수 있지만 거의 모든 경우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결단하고 판단하고 외우고 이해하고 실행하도록 하십니다. 가르쳐야 하는 사람은 배우는 과정을 끝낸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 오늘날만큼 이 명령이 무시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중세 때도 가르치는 일은 무시되었지만, 그 때는 평신도들에게 성경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평신도들뿐 아니라 사제들까지 성경을 깊이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릅니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나 일반성도들이나 성경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지금 교회들이 채택하고 있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의 상당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공부는 성공하고 복 받는 매뉴얼 수준입니다. 교리와 신학과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정당화 할 reference만을 찾게 됩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참 성경 메시지를 희귀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갖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는 것은 가르칠 것이 없다는 증거이고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은 배우고 공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박윤선 목사님께서 ‘우리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죽었다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까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목회자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기보다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격적인 신학공부는 목사가 된 다음에 해야 합니다. 그래야 유치한 소명 인식에서 하나님의 심오한 소명을 삶과 목회에서 심화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아울러 두렵고 떨리는 소명자의 마땅한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소명 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메시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의 방법을 메시지화 하게 되고 성공을 파는 종교상인으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사제들이 그랬고 오늘날 상당수 목회자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야 할 목사들이 신학에 대한 흥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학문인데, 그 도구가 철학입니다. 철학은 성경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지만 철학을 모르면 신학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신학을 하기 위함입니다. 신학을 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면 철학의 한계도 알게 됩니다. 철학 자체는 헛된 것이지만 신학의 도구로는 결코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철학을 모르면 신학을 공부하기가 쉽지 않고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되고 진리의 심오함을 깨닫고 누리기도 어려워집니다. 성령님은 감성적으로도 역사하시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성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한 목회자는 성경에서 성공비결이나 방법만을 찾게 됩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니까 성경을 잘 모르고 성경을 잘 모르니까 더 공부하기 싫어집니다. 이런 목회자들이 주로 교인들에게 성경 다독을 강조하거나 성경을 쓰게 하는 방법 등을 선호 합니다. 그런 방법이 전혀 불필요한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진리를 배우고 깨닫는데 턱없이 부족한 방법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아울러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검증된 가장 나은 성경해석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리와 신학과 교회역사입니다. 신학을 잘 모르고 신학의 방법인 철학도 잘 모를 뿐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해 관심이 없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러한 형편은 이곳 미국이 한국보다 더 심한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보면 총체적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신학을 통한 성경공부를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이해하고 성실히 공부하는 신실한 목회자들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뜻을 공부하라는 것까지 포함하는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특별은혜를 깨닫도록 하는 도구가 일반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자칫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인들이 잘 범하는 실수가 바로 일반은총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향이 심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원론 때문일 것입니다.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와 선교는 존재론적으로, 즉 그 자체로 거룩하고 옳고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일은 그 자체로 속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와 생각은 성경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물론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있습니다. 살인과 거짓은 그 자체로 악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기도와 선교와 구제 같은 것이 그 자체로 거룩하거나 선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분별하는 것이 경건의 능력 중의 하나입니다. 예배와 선교와 기도 같은 것은 본래 거룩하고 선한 것인데 그 동기와 목적과 방법이 잘못되어 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 배워서 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르치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우리는 전도나 선교가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상명령에는 복음 전하는 것과 함께 진리를 가르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인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행하지 않으신 것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즉 가르치신 것은 다 행하셨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기가 가르친 것을 다 행할 수 없지만 예수님만은 가르치신 것을 다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고 또 보내어 전도도 하게하고 또한 귀신을 내어 쫓을 능력도 주시려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는 것은 사실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함께 있게 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려는 목적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본을 보임으로서 가르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직접 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과 직접 실천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말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말로 가르치고 본을 보이고 또한 실행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셨다는 것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공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배워서 가르칠 필요가 없지만 제자들의 상황은 다릅니다. 제자들은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않고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명령 안에는 배우라는 명령까지 패키지로 묶여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고 선생님에게 배울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배웠지만 오늘 우리의 상황은 좀 다릅니다. 궁극적으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지만, 그 성령님은 지성적 노력, 즉 독서나 연구를 통해서 배우도록 인도하십니다. 원칙적으로는 공부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는 사람도 성령님께서 가르쳐 깨닫게 하실 수 있지만 거의 모든 경우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노력하고 결단하고 판단하고 외우고 이해하고 실행하도록 하십니다. 가르쳐야 하는 사람은 배우는 과정을 끝낸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 오늘날만큼 이 명령이 무시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중세 때도 가르치는 일은 무시되었지만, 그 때는 평신도들에게 성경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평신도들뿐 아니라 사제들까지 성경을 깊이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릅니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나 일반성도들이나 성경을 공부하지 않습니다. 지금 교회들이 채택하고 있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의 상당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공부는 성공하고 복 받는 매뉴얼 수준입니다. 교리와 신학과 기독교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정당화 할 reference만을 찾게 됩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참 성경 메시지를 희귀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갖 성경공부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는 것은 가르칠 것이 없다는 증거이고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은 배우고 공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박윤선 목사님께서 ‘우리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죽었다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까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목회자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기보다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본격적인 신학공부는 목사가 된 다음에 해야 합니다. 그래야 유치한 소명 인식에서 하나님의 심오한 소명을 삶과 목회에서 심화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아울러 두렵고 떨리는 소명자의 마땅한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소명 자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메시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의 방법을 메시지화 하게 되고 성공을 파는 종교상인으로 전락하게 되고 맙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사제들이 그랬고 오늘날 상당수 목회자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야 할 목사들이 신학에 대한 흥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학문인데, 그 도구가 철학입니다. 철학은 성경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지만 철학을 모르면 신학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신학을 하기 위함입니다. 신학을 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면 철학의 한계도 알게 됩니다. 철학 자체는 헛된 것이지만 신학의 도구로는 결코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철학을 모르면 신학을 공부하기가 쉽지 않고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게 되고 진리의 심오함을 깨닫고 누리기도 어려워집니다. 성령님은 감성적으로도 역사하시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성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한 목회자는 성경에서 성공비결이나 방법만을 찾게 됩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니까 성경을 잘 모르고 성경을 잘 모르니까 더 공부하기 싫어집니다. 이런 목회자들이 주로 교인들에게 성경 다독을 강조하거나 성경을 쓰게 하는 방법 등을 선호 합니다. 그런 방법이 전혀 불필요한 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진리를 배우고 깨닫는데 턱없이 부족한 방법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과 아울러 2000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검증된 가장 나은 성경해석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리와 신학과 교회역사입니다. 신학을 잘 모르고 신학의 방법인 철학도 잘 모를 뿐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해 관심이 없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러한 형편은 이곳 미국이 한국보다 더 심한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보면 총체적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신학을 통한 성경공부를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 이해하고 성실히 공부하는 신실한 목회자들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뜻을 공부하라는 것까지 포함하는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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